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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Hwang 황선연 Apr 28. 2017

6. 믿고 있는 모든 것에 의문을 품어라!

6. 믿고 있는 모든 것에 의문을 품어라!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친 참가자 전원이 액상 젤리 벽을 통과하여 ‘침묵을 지키는 복도’로 들어섰다. 그러나 복도를 따라 아무리 걸어가도 열려있는 문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왕허준과 티앤 단까오는 장난 삼아 이 문, 저 문을 밀거나 문손잡이를 요란스레 흔들어댔다. 이안과 카할도 가세했다. 


 어제 위원장이 그토록 하지 말라고 단단히 경고했건만 그는 정말로 잘 몰랐나 보다. 아이들은, 특히 장난꾸러기들은 하라고 하면 절대 안 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꼭 하는 습성을 말이다. 우리의 친구 피노키오와 톰 소여를 읽어보면 바로 알 수 있는 그 불멸의 진리를 말이다.


 여기서 잠깐, 그가 어제 한 말을 다시 떠올려보자. 그는 “절대로, 절대로 닫힌 문을 밀거나 손잡이를 돌려 안으로 들어가지 마세요.”라고 경고했었다. 그는 완전히 틀렸다. 대신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거, 열고 싶으면 한번 열어보세요. 뭐, 별 볼일 없으니까요. 괜히 힘만 들지.” 이랬다면 지금 저들이 벌이고 있는 장난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경고를 잊지 않은 수진이 기겁하여 소리쳤다.

  

“그만둬! 어제 위원장이 경고했잖아.”


“들어가지 않으면 되는 거지 무슨 상관이야!”


 과연 티앤 단까오의 말처럼 들어가지 않을까? 아니, 아마도 거짓말일 것이다. 문이 계속해서 열리지 않자 그들은 다른 문으로, 또 다른 문으로 옮겨가며 낑낑대었다.


“끼이익~”


 그들이 지나쳤던 뒤쪽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추적해보니 아까 허준이 시도했었던, 왼쪽 벽에서 열 번째 문이 조금 열려있었다. 수진과 가만히 있던 아이들은 순간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몸에 소름이 쫙 끼치며 지레 겁을 집어먹었다. 장난꾸러기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오싹한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그들은 열린 문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평범한 교실이었다. 검은 매끄러운 돌로 만들어진 칠판이 앞에 세워져 있고, 나무 책상과 걸상이 줄지어 나란히 놓여있었다. 천장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아주 높았다. 회색 벽은 장식 하나 없이 울퉁불퉁한 암석들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와 있었다. 이안과 카할은 제일 뒷줄에 앉았고 안젤라는 이안 바로 옆자리에 재빠르게 앉아버렸다. 수진과 우란의 이안의 앞 책상에 나란히 앉았다. 티앤 단까오는 수진의 왼쪽으로, 해마는 우란의 오른쪽에 앉았다. 허준은 제일 구석진 오른쪽 끝에 혼자 떨어져 앉았다.

     

 잠시 후, 한 명의 딥언더니아인이 조용히 교실로 들어왔다. 다름 아닌, 바로 접수대에 앉아 참가자의 금화를 수염 속에 챙겨 넣던 실크롱이었다. 그는 자신의 긴 수염을 왼손에다 적당히 말아 든 채 사뿐사뿐 발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몰래 들어왔다. 그래서 그가 헛기침을 할 때까지 아무도 그가 들어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물론 그의 키가 책상보다 낮아 완전히 가려지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는 검은 장화에 품이 넉넉한 갈색 원피스를 입고 낡은 가죽 허리띠를 차고 있었다. 그는 칠판이 있는 곳까지 가지 않고 교실의 중간쯤에 멈춰 섰다. 그리고 걸상을 타고 책상 위로 올라가 그 위에 걸터앉았다. 짧은 다리를 책상 밑으로 내린 채 그는 참가자 한 명 한 명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동시에 왼손에 말아둔 흰 수염을 천천히 펼치자 책상 앞 바닥 위로 수염 다발이 둥글게 쌓여갔다. 흡사 꿈틀거리며 몇 겹으로 꽈리를 튼 하얀 뱀이 그의 턱을 물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아이들 관찰을 끝낸 그가 수염 속으로 오른손을 집어넣어 이리저리 뒤지더니 뭔가를 꺼내었다. 분필 모양의 쇳조각이었다. 그는 책상 위로 일어섰다. 그것으로 허공에다 글씨를 쓰자, 맨 앞의 검은 칠판 위로 하얀 글자가 저절로 써지기 시작했다.


브라잇 동맹


 그는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자기소개를 했다. 자꾸 목이 막히는지 말 중간중간에 습관처럼 “흠흠”거렸다.

      

“흠흠, 우리는 이미 만난 적이 있지? 흠흠, 난 ‘실크롱’이란다. 현재 딥언더니아 왕궁에서 브라잇 동맹과 관련된 외교문서 업무와 서기를 맡고 있지. 흠흠, 앞으로 삼일 동안 오전은 나와 함께 보낼 예정이란다. 흠흠, 그럼 강의에 앞서 나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는지 질문 좀 받아볼까? 흠흠, 혹시 질문 있나?”


 왕허준이 그의 몸집과 안 어울리게 손을 날렵하게 들어 올린 후 짓궂은 표정으로 물었다.

 

“수염을 기른 지 얼마나 되었나요? 퍽 불편해 보이는데 왜 안 자르나요? 그걸로 밧줄을 만들어도 되겠어요. 아님 우리 오나시아에서 사용하는 붓을 만들거나, 아마 못해도 붓 수 십 만개는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어떻게 들으면 기분 나쁘게 들릴법한 질문인데도 실크롱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나긋하게 대답했다.


“내가 태어나서 한 번도 수염은 자른 적이 없으니, 흠흠. 지금 내 나이가 몇 살이더라. 흠흠, 작년 생일 케이크에 220이라고 씌어있었으니 올해는 221살이겠군. 흠흠, 221년 동안 길렀다네.”


 수진만 깜짝 놀랐을 뿐 다른 이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반응이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이안이 딥언더니아인의 평균수명이 250세라고 알려주었던 것을 그녀는 겨우 기억해냈다. 실크롱은 노인이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젊은이 못지않게 맑고 카랑카랑했다. 그는 살짝 장난기 섞인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흠흠, 나중에 죽으면 이 수염으로 밧줄을 만들라 해도 좋겠군. 흠흠, 집안 대대로 물려줄 유산으로 말이야. 흠흠, 아주 좋은 아이디어를 주어서 고맙군, 허준 왕자.”


 자신의 농담이 그에게 별 타격을 주지 못하자 허준은 당황하여 얼굴을 붉혔다.

 

 실크롱은 이제 시작해도 되겠다고 여겼는지 허공에다 밑줄을 두 번 긋자 칠판 글자 아래로 두 줄이 따라 그어졌다.


“흠흠, 이안 1세가 이끈 ‘브라잇 동맹’과 마왕 블랙수트가 이끈 ‘다크 동맹’과의 전쟁, 즉  ‘블랙수트마키아’ 이후, 흠흠, 마왕이 지하에 봉인되고 3,000년이 흐르는 동안 브라잇 동맹국들은 평화를 누리며 각자 눈부신 번영을 이룩해왔다. 흠흠,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이름만 동맹일 뿐, 서로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부족해지고 자기가 먼저라는 이기심이 널리 팽배해졌지. 흠흠, 원래 방어 동맹으로 맺어진 사이이니 그럴 수밖에. 흠흠, 그리고 그 후 동맹을 결집시킬 전쟁이나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흠흠, 어쨌든 이젠 ‘동맹’이란 단어는 ‘옥수수’와 마찬가지로 그저 습관적으로 쓰이는 흔해빠진 용어가 되어버렸다. 흠흠, 당연히 그것의 절박했던 초심은 이미 퇴색해버린 지 오래이고. 흠흠, 이런 상황에서 우리 동맹원들이 다시 하나가 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딥언더니아의 스톰펌 왕의 노고로 이렇게 캠프를 개최할 수 있었다.

 흠흠, 특이하고 재밌는 프로그램들이 많이 있겠지만, 흠흠, 어떻게 보면 지루할 수도 있을 내 시간에는 동맹의 역사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자유롭게 토론해보는 기회를 가져보자꾸나. 흠흠, 난 토론하는 것을 아주 좋아해. 흠흠, 그러니 질문이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눈치 보지 말고 그때그때 손을 들도록. 흠흠, 인사치레는 이쯤 하고, 흠흠,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까?”  


 그의 손이 허공에서 흔들어대자 칠판의 ‘브라잇 동맹’ 밑으로 ‘메리슨 폰데 캠프’라고 써졌다.


브라잇 동맹

메리슨 폰데 캠프


“흠흠. 카할, 자네는 혹시 캠프의 이름이 뜻하는 바를 알고 있나?”


“글쎄요. 그것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는데요.”


“흠흠, 그럼 이것에 대해 아는 사람?”

 

 뒤에 몰려 앉은 참가자들 중에서 오직 이안이 손을 번쩍 들고 대답했다.


“일룸니아, 오나시아, 딥언더니아, 스위티니아, 아쿠아니아의 왕들이 모여 ‘브라잇 동맹’을 체결한 장소가 바로 ‘메리슨 폰데 호수’였습니다.”


 실크롱은 그의 정확한 대답에 감동을 받았는지 고개까지 흔들어대며 박수를 보냈다. 그의 허연 수염이 턱에서부터 뱀처럼 마구 꿈틀거렸다. 다른 이들도 “와아~”라는 감탄사와 함께 박수를 쳐주었다. 이안은 쑥스러운지 머리를 긁적이고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렇지, 흠흠, 아주 좋아. 흠흠, 뱀파이어인데도 동맹의 역사에 대해 꽤나 박식하구나. 흠흠, 물론 뱀파이어를 비하하는 건 절대 아니란다. 흠흠, 그냥 좀 놀라서 그런 것뿐이야. 흠흠, 뱀파이어 왕국인 ‘뱀파니아’가 ‘브라잇 동맹’에 들어온 지는 겨우 20년밖에 안 되었으니까. 흠흠, 그러니 당시 메리슨 폰데 호수 모임에는 뱀파니아 왕국이 참석할 수 없었다는 것을 당연히 알겠지?

 흠흠, 그런데 말이다. 흠흠, 혹시 시작 원년의 (‘0년’으로 ‘브라잇 동맹’이 결성된 해를 기준으로 새로운 세기가 시작됨. 약 3,000년 전을 말함.) 그 모임에 단 한 명의 뱀파이어가 참석했었다는 것을 알고 있나? 흠흠, 그는 브라잇 동맹과 다크 동맹 사이에 곧 일어날 전쟁에서 중립을 지키겠다고 그 자리에서 선언했지. 흠흠, ‘일룸니아 왕국’의 위대한 왕 이안 1세가 그에게 브라잇 동맹에 들어오라고 여러 번 설득했지만 결국 다 실패했단다. 흠흠, 그리고 대대로 전해지는 그 처절하면서도 끔찍한 블랙수트마키아 전쟁이 일어났지. 그 뱀파이어는 잠시 사라졌다가 전쟁이 끝나고 마왕이 지하얼음에 봉인된 후가 되어서야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흠흠, 하지만 돌아왔을 땐 혼자가 아니었어. 흠흠, 한 무리의 뱀파이어들을 데리고 왔으니까. 흠흠, 이후 그들은 독립된 '뱀파니아 왕국'을 건설해 유지해오다가 마침내 20년 전, 브라잇 동맹에 편입되었다.”


“뱀파이어가 호수 모임에 참석했다는 사실은 브라잇동맹사에 나와 있지 않아요.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왜 안 적어놓은 거죠?”


 이안의 질문에 실크롱은 점점 재미있어진다는 표정으로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리고 수업에 관심이 없는지 눈을 감고 있는 안젤라를 넌지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글쎄다, 흠흠. 역사책에 적힌 내용이 모두 사실일까? 흠흠, 하나도 빼먹지 않고 모든 사실을 정확히 기록해놓을 수 있었을까? 흠흠, 혹시 그 당시 승자가 은폐하고 싶었던 것은 없었을까? 흠흠, 아무도 3,000년 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으니 직접 확인할 길도 없고 말이다. 흠흠, 안젤라, 흠흠, 3,000년 전에 존재한 그 뱀파이어의 이름을 알고 있나?”


아자젤(Azazel)일 겁니다. 우리의 시조인 그를 모르면 진정한 뱀파이어가 아니죠.”


“흠흠, 옮거니. 흠흠, 내가 조사를 하다가 아주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는데 말이다. 흠흠, 그가 우리의 적인 ‘다크 동맹’의 마왕 블랙수트와 아주 친한 사이였다는 것을 알고 있나, 안젤라?”


“친구라고요?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


“흠흠, 아마 너뿐 아니라 모두들 처음 듣는 이야기일 거다.”


 실크롱이 배를 부여잡고서 혼자 낄낄대었다. 이상한 비사 같은 이야기를 자꾸 늘어놓는 것 같아 짜증이 난 이안이 볼멘소리로 툴툴거렸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진실을 왜 자꾸 들쑤시려는 거예요?”


“흠흠, 뭐, 진실? 흠흠, 그런 개뼉다귀는 들판에나 던져버려! 바다에다 던져버리라고! 흠흠, 다들 잘 듣고 명심해라. 흠흠. 너희가 믿고 있는 모든 것에 의문을 품어야 해!”


 실크롱이 부들부들 떨더니 마지막 문장의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줘가며 강조했다. 그의 예기치 못한 반응에 이안 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깜짝 놀라 어리둥절해졌다. 교실에 잠시 적막감이 흘렀다. 그는 무척이나 흥분한 상태에서 다음 말을 이어갔다.

 

“흠흠, 무슨 근거? 당연히 있지. 흠흠, 그럼 내가 상상력을 동원해서 이야기를 지었을까 봐? 흠흠, 아주 오랫동안 묵혀있던 귀중한 자료 하나를 몇 년 전 도서관 기록실에서 발견했지. 흠흠, 딥언더니아의 괴짜 왕실 서기관들이 비사들만 모아 편집한 '카더라통신' 이란다. 흠흠, 딥언더니아인은 수중에 들어온 것을 함부로 버리지 않아. 흠흠, 비록 주위가 금세 쓰레기장으로 변하지만 말이야. 흠흠, 어찌 됐든 거기에는 오래되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단다. 흠흠, 뭐 기회가 되면 차차 이야기하기로 하고.

흠흠, 한 마디로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닐 수도 있다란 말이야.”

 

“에이, 아무리 그래도 말이 안 돼요. 만약 그가 마왕과 친한 친구였다면 당연히 그를 도와 다크 동맹 편에서 전쟁을 치렀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렇게 혼자 도망치는 게 아니고요.”


 카할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자 실크롱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여 동조했다. 자신의 시조가 혼자 도망쳤다는 표현에 안젤라는 카할을 사납게 째려보았다. 그는 바로 주눅이 들어 몸을 움츠렸다.


“흠흠, 그래. 흠흠, 진정한 친구라면 그렇게 해야지. 흠흠, 근데 그는 ‘다크 동맹’에 들어가지 않았어. 흠흠, 아니, 돕기는커녕 친구를 버리고 떠나기까지 했지. 흠흠, 결국 마왕에게는 진정으로 자신을 위하는 친구가 아무도 없었던 거야. 흠흠, 물론 그에게는 그가 낳은 수많은 괴물이 있었지만, 흠흠, 이름처럼 그저 괴물일 뿐 친구가 될 수 없었던 게지.

 흠흠, 반면 우리 ‘브라잇 동맹’은 강한 우정과 신의를 기반으로 서로 도왔기에 악의 무리를 무찌를 수 있었단다. 흠흠, 힘을 합치면 이 세상에 무찌를 수 없는 적은 없단다. 흠흠, 근데 말이다. 흠흠, 내가 한 번도 가보지 않아 잘 모르겠다만, ‘뱀파니아’ 그곳은 낮에도 햇빛이 전혀 들지 않고 항상 밤이라던데 정말이니, 이안? 원체 소문만 무성할 뿐 실제 가봤다는 자가 없어서.”


“네, 정말 그래요.”


 이안은 자신도 가본 적 없는 왕국에 대해 뭐라 할 말이 없어 조용히 있자 안젤라가 대신 대답했다. 실크롱은 수염을 정성스럽게 쓰다듬으며 혼자 생각에 잠긴 듯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교실에 다시 불편한 적막이 이리저리 떠다녔다. 아이들은 꾸벅 졸거나 저마다의 상념의 세계로 빠져들려던 찰나였다.


“근데요, 만약 그 ‘아자젤’이라는 뱀파이어가 마왕을 도왔다면 전쟁의 결과가 혹시 바뀌지 않았을까요? 다크 동맹이 브라잇 동맹을 이겼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장난꾸러기 티앤 단까오의 진지하고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실크롱 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번뜩 깨어났다. 그는 정말 자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무척이나 궁금한 듯 검은 눈동자를 반짝거렸다.


“흠흠, 글쎄다. 흠흠, 하나의 변수가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상하기는 힘들지만. 흠흠, 글쎄, 아마 그가 도왔어도 별 소용이 없지 않았을까? 흠흠, 고작 한 명이 더 거든다고 해서 큰 차이는 없었을 것 같은데. 흠흠, 그러는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지?”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혹시 그가 뱀파이어 군단을 만들어 도왔다면 전세가 뒤집혔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아니에요, 그랬어도 이기기는 힘들었을 거예요. 돕건 안 돕건 마왕에겐 상관없었을 테니까요.”


 대답하는 티앤 단까오의 얼굴에서 평소의 장난스러운 표정이 싹 사라졌다. 대신 뭔가 심각하면서도 아련한 느낌이 풍겨 나왔다. 실크롱이 보기에 과자나 초콜릿 같은 간식에만 관심을 둘 것 같은 ‘스위티니아’ 출신의 그에게 이런 진지한 면이 있다니 좀 의외이다 싶었다. 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거리며 감탄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흠흠, 아주 좋아. 흠흠, 만약 뱀파이어 군단이 도왔다면 글쎄, 흠흠, 그래도 ‘브라잇 동맹’이 이기지 않았을까? 흠흠, 물론 내 추측이긴 하지만. 흠흠, 이렇게 똑똑한 친구들이 여기에 앉아있다니 참으로 기분이 좋군. 흠흠, 아주 강의할 맛이 나는데.”


 말을 많이 해서인지 그가 헛기침을 여러 번 하였다. 그는 수염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조그만 은색 술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시더니 뚜껑을 닫고 얼른 수염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의 얼굴에 금세 취기가 돌았다.


“흠흠, 시작 원년에 메리슨 폰데 호수에서 맺은 브라잇 동맹조약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꾸나.

 흠흠, 호수 한가운데로 오나시아에서 가져온 팔각 정자가 띄어졌지. 흠흠 일룸니아 왕국, 오나시아 왕국, 딥언더니아 왕국, 스위티니아 왕국 그리고 아쿠아니아 왕국의 왕이 처음으로 정자 위에서 다 함께 만났단다. 흠흠, 물론 아자젤도 같이. 흠흠, 그를 제외한 채 그들은 서로 동맹을 체결하고 마왕 블랙수트와의 전쟁에서 함께 싸우기로 합의했단다. 흠흠, 사실 많은 장소를 놔두고 하필 거기서 조약을 맺은 이유가 물이 편안한 아쿠아니아의 인어왕을 위한 배려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 

 흠흠, 그럼 동맹을 맺게 한 주요 원인이 된 전쟁 ‘블랙수트마키아’는 왜 일어났지?”


“마왕이 일룸니아 왕국의 디아 왕비를 감히 납치하려고 했잖아요. 부인과 자신, 그리고 나라의 명예가 많이 실추된 점에 분개한 일룸니아의 이안 1세가 그에게 전쟁을 선포했고요. 평소 마왕을 두려워했던 다른 나라들도 동맹군으로 함께 싸우게 된 거지요.”


 카할은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을 새삼스레 왜 묻느냐, 우리를 무시하냐는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답했다.


“흠흠, 그럼 왜 갑자기 그가 일룸니아의 왕비를 뺏으려 했을까?”


“그는 이름처럼 마왕, 악마잖아요. 악마가 나쁜 짓을 하는데 별다른 이유가 있나요? 오나시아에서 일룸니아로 시집온 아름다운 디아 왕비만 운 나쁘게 그의 희생양으로 선택된 거죠.”


 마치 자신이 그 비련의 여주인공이나 된 것처럼 안젤라가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애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실크롱은 살며시 미소를 짓더니 수염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한동안 휘젓다가 네모난 뭔가를 꺼내 들었다. 그의 수염은 정말 만능 가방이었다. 그가 막 꺼낸 것은 조그만 노란 책자였다. 겉표지에 검은 글씨로 ‘브라잇동맹사의 모든 것을 알려주마.’라고 쓰여 있었다. 처음 몇 페이지를 훑어보던 그가 몇 장을 더 읽고 나서 그것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흠흠, 요즘 각국에서 출판되는 브라잇동맹사에 관한 책들 중, 한 권이라도 제대로 독파한 자를 만나기가 쉽지 않더구나. 흠흠, 내가 들고 있는 이것은 일룸니아 왕국의 고대학 교수가 쓴 책으로 개인적으로 제일 낫더군. 흠흠, 표현이 시적이기도 하고. 흠흠, 물론 그의 주장에 다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뭐. 흠흠, 여러분 중에 혹시 동맹사 한 권이라도 읽어본 자가 있나?”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 와중에 이안이 혼자 멋쩍게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오, 흠흠, 또 너구나. 흠흠, 그래 어떤 책을 읽었지?”


“‘삼십 분 만에 독파하는 브라잇동맹사’입니다. 딱 2분 줄여 이십팔 분 만에 다 읽었습니다.”


“흠흠, 아주 얇은 책이었나 보군. 흠흠, 그래도 그거라도 읽은 게 어디냐? 흠흠, 여러분에게 지금 이 책을 꼭 추천하는데, 흠흠, 자 봐라, 별로 두껍지도 않지? 흠흠, 하루면 충분히 다 읽을 수 있어요. 흠흠, 갈수록 아이들이 역사를 몰라 무식해져서 걱정이야.

 흠흠, 수진아, 여기 붉은색으로 표시된 부분 좀 크게 읽어주지 않으렴?”


 실크롱이 책상 몇 개를 밟으며 건너와 그녀의 책상 위로 올라서서는 펼쳐진 책을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 든 그녀가 큰 소리로 또박또박 읽기 시작했다.


“안타깝도다. 애석하도다. 암흑과 악의 근원, 마왕 블랙수트가 그의 수하 뿔락드래곤에게 디아 왕비를 납치하라고 명령하였도다.”


“흠흠, 뿔락이 아니고 블랙! 흠흠, 이렇게 무식이 드러나는군.”


 그의 지적에 그녀의 얼굴은 토마토처럼 새빨개졌다. 그녀는 눈을 크게 치켜뜬 후 글씨들을 노려보며 처음부터 다시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안타깝도다. 애석하도다. 암흑과 악의 근원, 마왕 블랙수트가 그의 수하 블랙드래곤에게 디아 왕비를 납치하라고 명령하였도다. 숲에서 산책하던 왕비를 목격한 드래곤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가냘픈 그녀를 낚아채려는 순간, 하늘이 도우시사 때마침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던 이안 1세와 마법기사단의 반격으로 악행이 저지되었도다. 이 얼마나 불행 중 다행이었는가? 마왕에게 잡혀갈 뻔한 모욕을 견디지 못한 왕비는 그날 밤 독을 먹고 자살을 기도하였도다.


 하지만 독의 함량이 약해 실패로 돌아갔으니 이 또한 하늘과 지상을 지키는 신들의 도움이 아니었겠는가? 신들이여, 우리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무궁한 축복을 받으소서. 브라잇 동맹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죽음은 해가 사라진 낮과 같이, 꽃이 사라진 들판과 같이 무서운 재앙이 되었을 터이니이다.


 그날 밤, 일룸니아 궁전 집무실을 가득 채운 어둠 속에서 이안 1세가 홀로 앉아있었도다. 세상의 행복과 불행은 한순간의 꿈이라고 하던데 그는 진정으로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 제발 이 일이 꿈이기를, 그래서 어서 빨리 이 악몽에서 벗어나기를.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꿈은 깨어지지 않았다. 그동안 블랙수트와 쌓아온 우정과 신뢰가 이렇게 끝났다는 사실에 그는 주체하지 못할 배신감과 분노를 느껴 온몸을 떨었도다.


 "마왕이여, 나와 일룸니아 왕국의 저주를 받을지어다!"


 마왕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자신은 그를 진정한 친구로 대하여 믿어주었었다. 그런 자신의 진정어린 믿음과 우정을 헌신짝처럼 차 버리다니. 감히 자신을 이리도 철저히 모독하다니. 심장을 도려내는 것보다 더 큰 아픔과 고통이 그를 휘감았도다.


"마왕이여, 나와 일룸니아 왕국의 처절한 저주를 받을지어다!"


 번개가 치는 것처럼 그의 눈앞이 번쩍였다. 그는 단번에 알아차리고 말았다. 이 사건은 마왕이 앞으로 일으킬 끔찍한 비극의 서곡에 불과하다는 것을.


 무시무시한 어둠의 밤을 밀어내고 다시 하늘의 제왕인 태양을 맞이하려 준비하는, 새벽 여신의 몸에서 발산된 밝은 옷자락이 창문에 펄럭일 때가 되어서야 자신과 왕비, 일룸니아의 명예 회복을 위해, 그리고 선량한 다른 왕국들의 생존과 안전을 위해 이안 1세는 블랙수트를 이대로 놔둘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참으로 브라잇 동맹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도 숭고한 결정이었도다.


 그는 마침내 마왕과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더 이상 그의 끔찍한 부정과 만행을 용납할 수 없었기에 이안 1세는 몸과 마음을 바쳐 싸우기로 굳게 결심하였도다. 왕이여, 동맹국의 축복을 받으소서.


 그는 딥언더니아, 아쿠아니아, 스위티니아, 오나시아에게 전쟁의 동참을 요청하였도다. 각국에서 보낸 답장에는 그를 굳게 믿으며 다 함께 싸워 마왕을 제거하고 태초부터 ‘하하호호히히’세상에 부여된 순수한 정의와 조화로운 평화를 되찾자고 씌어 있었으니, 이 얼마나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순간인가?


 메리슨 폰데 호수 위에서 브라잇 동맹이 결성되는 순간, 그들의 역사는 이 땅 위에 다시 써지기 시작하였다.


 브라잇 동맹이여, 그대에게 무한한 영광과 번영, 평화가 늘 함께할지어다.”     




 수진의 낭독이 끝나자 실크롱은 감고 있던 눈을 살며시 떴다. 아직도 남아있는 감동의 여운이 그의 얼굴에 마지막으로 묻어났다. 그는 꿈을 꾸는 듯 졸린 눈으로 허공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흠흠. 마왕 블랙수트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어쩌면 무한대로 살아온 존재였을지 모른다. 흠흠, 세상에 인류가 등장하면서 따라 등장한 것이 뭔지 아니? 흠흠, 바로 ‘악’이야. 흠흠, 선과 악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지. 흠흠, 괴물과 악마의 아버지인 그는 잔인하고 냉혹한 성격을 지녔을게다. 흠흠, 그런 그가 이안 1세와 우정을 나누게 된 거야. 흠흠, 물론 책에 따르면 '표면적'이었지만 말이야. 흠흠, 그동안에는 조용하고 평화로웠지. 흠흠, 그런데 그가 친구의 부인 디아 왕비를 납치했다. 흠흠, 어느 날 갑자기 말이지. 흠흠, 도대체 마왕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왜 그랬을까?”


“친구끼리 싸웠나 보죠.”


  수진이 성의 없이 대답하자 살짝 인상을 쓰며 못마땅해하는 실크롱의 작은 눈이 옆으로 더욱 째지었다. 거의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로 그녀의 의견을 반박했다.


“흠흠, 단순히 둘이 싸워서 복수심에 그런 짓을 했다고? 흠흠, 그가, 마왕이 10살짜리 아이니? 흠흠, 그는 세상에서 가장 영리하고 가장 나이가 많은 자란 말이다.”


 어서 다른 의견을 내보라며 그의 단춧구멍 같은 눈들이 아이들을 재촉했다. 카할은 거의 확신이 없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너무 오래 살았더니 더 이상 살기 싫어져 자살하려고 하는데 그냥 죽기가 아까워 한번 돌발행동 해 본 거 아닐까요?


“흠흠,  그러니까 그가...흠흠, 우울증에 걸렸다는 말이냐?”


“아니면 완벽한 존재인 이안 1세를 너무 부러워해서 그런 일을 벌인 게 아닐까요?”


 이안의 매우 자랑스러워하는 어투에 그는 픽 비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흠흠, 마왕이 하찮은 인간을 질투라. 흠흠, 글쎄다.”


 자신의 선조가 하찮다는 표현에 이안은 순간 화가 났지만 현재 소속이 일룸니아가 아닌 뱀파니아로 되어 있기에 꾹 참았다. 괜히 자신의 정체를 의심스럽게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아이들은 별별 의견들을 툭툭 내뱉었다.


‘디아 왕비의 유명한 음식 솜씨를 직접 맛보고 싶어 유괴했다.’

‘일룸니아의 아름다운 궁전을 차지하기 위해 왕비를 인질로 납치했다.’

‘마왕이 그날 컨디션이 무척 안 좋아 잠깐 정신이 돌았다.’

‘처음부터 원래 미친 작자였다. 이안 1세와 아자젤이 깜빡 속은 것뿐이다.’


 그러나 실크롱은 한 명 한 명 말할 때마다 연신 고개를 내저으며 계속 부정할 뿐이었다.


“블랙수트와...그녀가 서로 좋아해서 같이 떠나려 했던 게 아닐까요?”


 찬물을 끼얹은 듯 교실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지금 누가 말한 거야? 서로 눈치를 보다가 티앤 단까오의 발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1, 2, 3, 4, 5초 후 교실은 한바탕 웃음바다로 변하였다. 배꼽을 잡고 웃다가 겨우 웃음을 멈춘 실크롱이 수염 자락으로 눈물을 닦으며 꺼억꺼억 기침을 했다. 그리고 조롱하듯이 말을 내뱉었다.


“컥컥컥컥, 이런 로맨티시스트 같으니라고. 흠흠, 농담도 심하구나. 흠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린 집어치우고. 흠흠, 여기 봐라. (수진이 읽었던 브라잇동맹사 책을 흔들어대며) 왕비가 자살시도를 했다고 적혀있지 않느냐?”


“함께 떠나려던 계획이 실패하자 절망감에 자살시도를 할 수도 있었겠죠. 제가 좋아하는 로맨스 소설에 많이 나오던데요? 음, 뭐라더라? 딱 맞는 전문용어가 있었는데. 음, 맞아요. '사랑의 도피'를 한 것일 수도 있죠. 그리고 아까 역사책을 액면 그대로 믿지 말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러니 자살도 확실치 않을 수 있지 않을까요?”


 아이들 중 유일하게 웃지 않은 수진이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실크롱의 표정이 아차 싶더니 혼자 깊은 생각에 잠기었다. 그는 고개를 들고 손에 든 쇠분필을 허공에서 흔들었다. 앞쪽 칠판에 ‘양파’라고 써졌다.


“흠흠, 그래, 만에 하나 그럴 수도 있겠지. 흠흠, 우리가 배운 사실이 다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걸 나 역시 자꾸 까먹는구나. 흠흠. 난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단다. 흠흠, ‘진실’은 양파와 같아서 계속 껍질을 까도 그 속내를 다 알 수 없는 거라고. 흠흠, 이 시간 이후부터 너희가 믿고 있는 모든 것에 한번 의문을 가져보렴. 흠흠, 그럼 이전과 다르게 보일 거야. 흠흠, 새로운 눈이 떠지는 순간이지.

 흠흠, 아이고, 시간이 벌써. 흠흠, 그럼 이만, 내일 아침에 또 보자꾸나.”


 그는 야구 투수처럼 왼팔을 요란스레 돌려 재빨리 수염을 감더니 부리나케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누가 보면 무척 화장실이 급한 분처럼 보였을 것이다. 정말로 그랬나?

 아이들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돌리기도 하고 체조를 하면서 몸을 풀었다.


“참 괴짜이셔, 괴짜.”


 카할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수진을 향해 말했다. 그녀는 잔뜩 기대했던 캠프의 첫 일정이 이리 학구적일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내일 또 있다니 벌써부터 실망감에 젖어들었다. 동맹의 역사나 진실, 양파는 그녀에게 관심 밖의 따분한 주제일 뿐이었다.


 반면 이안은 기분이 이상했다. 아까부터 머릿속으로 알지 못할 먹구름이 잔뜩 몰려오더니 폭풍전야의 고요함을 경험하고 있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다만 교실 문을 나서면서 자신의 눈이 이전보다 좀 밝아진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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