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오후, 침묵을 지키는 복도로 다시 되돌아온 참가자들은 교실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오전에는 분명 닫혀있던 그 옆의 문이 살짝 열려있었다. 문 안쪽은 방이 아닌 동굴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안과 카할이 앞장서 들어가고 나머지가 그 뒤를 따랐다.
혼자 꼴찌로 걷던 티앤 단까오는 바로 앞에 있는 안젤라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완전히 무시한 채 걷기만 했다. 무안해진 그가 그녀를 지나쳐 때마침 혼자가 된 수진을 발견하곤 그녀 옆으로 재빨리 다가갔다. 동굴은 아이 두 명이 충분히 지나갈 수 있는 너비였다. 노란 빵모자를 푹 눌러쓰고 머리가 수진의 어깨까지 오는 티앤 역시 참가자라면 입어야 하는 아방가르드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왕허준 다음가는 똥배가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그는 초록 쫄바지의 뒷주머니로 손을 집어넣어 휘젓더니 뭔가를 꺼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슬그머니 건네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것 좀 먹어볼래? 내가 집에서 가져온 젤리사탕이야.”
수진의 손바닥 위로 붉은 줄과 하얀 줄이 엉켜있는 한입 크기의 네모난 사탕들이 놓였다. 그녀는 고마움을 표시하고 얼른 하나를 입에 넣었다. 부드럽게 녹는 것이 여태껏 먹어본 사탕과는 확연히 달랐다. 입안에서 5초 정도 흐르자 굳어있던 체리 크림과 우유 크림이 서서히 녹으면서 캐러멜처럼 끈끈한 액체로 바뀌더니 곧 쫄깃쫄깃한 젤리로 바뀌었다. 체리의 달콤함과 우유의 고소함까지 더해져 아주 맛있었다. 다 씹어 먹은 그녀는 금세 나머지도 다 먹어버렸다. 기분이 좋아진 티앤 단까오는 뒷주머니를 탈탈 털어 자신의 입에 젤리사탕 두 개를 넣고 나머지 세 개를 그녀에게 몽땅 주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직접 만든 사탕이야. 집에서 만들어 파는 건데 내 이름을 붙여 ‘티앤단까오 젤리사탕’이라고 부르지. 어때? 맛있지? 내가 많이 가지고 왔으니까 종종 나눠줄게.”
그들은 나란히 걸었다. 회색 암벽에 횃불이 띄엄띄엄 걸려있었지만 그다지 밝진 않았다. 불현듯 그녀는 바깥세상의 햇빛이 무척 그리워졌다. 딥언더니아에 온 후로 해를 보지 못하였다. 물씬 솟아나는 밝음에 대한 그리움을 잊기 위해 그녀는 마지막 사탕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아껴가며 잘근잘근 씹고 있는 그녀를 그가 올려다보며 친근하게 물어왔다.
“근데 아까 말이야, 왕비가 절망감에 자살을 시도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된 거야?”
“글쎄, 그냥 떠오른 거야.”
“혹시 사랑을 해 본 적 있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앞서가고 있는 이안의 뒤통수를 슬그머니 쳐다보았다. 그리고 멋쩍은 표정을 지은 채 수줍은 어조로 대답했다.
“아직은.. 없는 거 같아. 티앤 너는?”
“난.. 해본 적 있어. 근데 아쉽게도 케이크는 주지 못했지.”
그의 목소리가 점점 꺼지더니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었다. 잘 이해가 안 된다는 눈빛을 쏘아 보내는 그녀를 향해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스위티니아’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프러포즈나 고백을 할 때 정성을 다해 구운 케이크를 내밀어. 꽃 대신 말이야.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종류로 말이지. 그래서 그 사람이 케이크를 먹으면 허락하는 거고 먹기를 거부하면 깨지는 거야.”
“아주 로맨틱하다. 나도 나중에 꼭 하나 받아봤으면.”
“수진,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고 아름다운 케이크를 받게 될 거야. 내가 장담할게.”
그녀의 머릿속으로 빨강, 하양, 분홍 장미꽃잎으로 덮인 3단 높이의 초콜릿 케이크가 두둥실 떠올랐다.
그런데 그때였다. 앞에서 내지르는 아이들의 탄성에 그만 그녀의 장밋빛 환상이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카할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외쳤다.
“세상에나, 이게 다 뭐래?”
놀랍게도 그들이 도착한 곳은 수정 광산이었다. 벽과 천장, 바닥 여기저기에 박혀있는 다양한 크기의 수정 결정체들이 겉으로 모습을 드러낸 채 은은한 자태를 뽐내었다. 파란색 수정도 있고 보라색 수정도 있고 하얀색, 노란색 등 색깔도 가지각색이었다.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구경하거나 어루만지기도 하고 깨진 조각들을 줍는 척하며 몰래 주머니에 넣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광산 한쪽 끝에 위치한 물웅덩이 위로 잔잔한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물살이 점점 거세지고, 파도가 철썩거리며 휘몰아치고 나서야 그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하였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왕허준은 수정을 한 움큼 바지 주머니에 숨겨 넣고는 도망칠 준비를 하였다. 수진과 우란도 냉큼 이안과 카할 뒤로 몸을 숨겨 불안스레 주시했다. 안젤라와 티앤 단까오, 해마는 파란색 수정결정체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기둥 뒤로 몸을 숨긴 채 곁눈질로 수면을 바라보았다.
곧 거대한 검은 물체가 웅덩이 밖으로 후다닥 뛰어올랐다. 얼마나 세게 뛰었는지 물이 사방팔방으로 튀며 가까이 서 있던 이안과 카할, 수진과 우란에게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꺄아악, 왕자 살려!”
왕허준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검은 물체의 한 부분이 고무줄처럼 쭉 늘어나더니 달리는 그의 배를 단번에 휘감았다. 그는 잡혀있는데도 계속 헛발질을 하며 벗어나려 애를 쓰자, 공기를 빼내는 듯한 우렁찬 목소리가 검은 그림자 안에서 흘러나왔다.
“어디로 도망치려는 거냐? 이 엄마젖도 못 뗀 겁쟁이야.”
쩌렁쩌렁한 호령 소리에 막 도망치려던 아이들은 제자리에 돌처럼 굳어졌다. 하얀 대령 모자를 비스듬히 머리통에 눌러쓴 대왕문어가 웅덩이 앞에 서 있었다. 그림자에 가려졌던 진한 자주색 문어의 어마어마한 몸통과 그 옆으로 쉴 새 없이 흐느적거리는 무지막지한 빨판 다리들을 본 아이들은 다시 도망치려 했다. 그러자 긴 자주색 다리들이 사사삭 다가와 덮치며 그들을 쓱쓱 낚아채갔다. 대왕문어 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린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그가 내뱉는 시끄러운 연설을 끝까지 다 들어야만 했다.
“메리슨 폰데 캠프에 온 겁쟁이들을 환영하는 바이다. 나는 ‘옥토스대령’이다. 어릴 적, 인간들이 깊은 바다에 버리고 간 핵폐기물에서 나온 방사능에 노출되어 이렇게 몸집이 커지고 성격이 아주 더러워졌다. 그러니 내 성질을 건드리지 말도록. 오늘 내가 맡은 임무는 제군들을 딥언더니아의 숨겨진 보석섬으로 데리고 가서 무사귀환시키는 것이다. 제군들이 나의 명령을 잘 따르면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고, 만약 그렇지 않으면 이 구덩이에 처박아 물귀신으로 만들 것이다. 알겠나? 소리가 작다! 알겠나?”
“네!”
그들은 힘껏 소리쳐 대답했다. 방사능에 오염된 문어라니 그의 뇌라고 정상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돛새치처럼 빠르게 일렬로 정렬한다. 실시!"
그의 다리에서 풀려난 그들은 정말 번개 같은 속도로 일렬로 정렬했다. 해마를 제외한 나머지는 돛새치가 뭔지 알지도 못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살짝 맛이 간’ 정도가 아닌 ‘완전 돌아버린’ 상태일지도 모를 문어의 신경을 거스르지 말아야 했다.
"저 은색 바위가 있는 곳까지 발맞춰 행진한다. 실시!"
그의 다리 하나에 들린 호루라기 호령에 맞춰 그들은 행진하기 시작했다. 수진의 발이 계속 틀리자 문어의 인상이 사나워지고 눈은 매서워졌다.
“하나, 둘, 하나, 둘, 발 똑바로 맞춘다. 하나, 둘, 하나...”
잠시 후, 물의 흐름이 느려지고 강폭이 좁아졌다. 물을 푸던 해마가 부르르 떨리는 어깨를 손바닥으로 비비며 중얼거렸다.
“갑자기 추워진 것 같네.”
다른 이들의 입에서도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기온이 확 떨어져 지하 무덤에 있는 것처럼 공기가 매우 차가웠다.
“모두 정신 똑바로 차려! 곧 망자의 물길에 도착한다. 만일에 대비해 이것으로 입을 봉해. 그래야 지껄이지 못하지.”
대령이 발 하나를 들어 뒤집자 자주색 빨판에 노란 박스테이프들이 달랑달랑 붙어있었다. 그가 협박조로 다그쳤다.
“보석섬에 도착한 후에 입에서 테이프를 뗀다. 알겠나? 어이, 거기 뚱뚱이 (왕허준이 답답한 나머지 입에 붙인 테이프를 떼어내려 하자), 지금 그걸 떼었다간 배 밖으로 던져버릴 줄 알아!”
다들 테이프로 입을 단단히 봉한 후 팬 모서리에 돌아가며 얌전히 앉았다. 주위가 너무 고요했다. 그들의 심장은 공포심으로 꽁꽁 얼어붙었고 입에선 기침이 튀어나왔다.
불현듯 푸르뎅뎅한 손 하나가 수면 위로 쑥 올라왔다. 그리고 수진 앞의 모서리를 탁 잡는 것이었다. 순간 그녀의 머리칼이 쭈뼛 서고 눈동자가 두 배 이상 커졌다. 나머지 손도 따라 올라오더니 곧이어 머리 뒤통수에 칼이 박혀 이마를 관통한 남자의 얼굴이 팬 위로 불쑥 솟아올랐다. 눈구멍과 콧구멍은 시커멓게 뻥 뚫려있었다.
그때였다. 머리통이 없는 여자의 토르소(상체)가 반대쪽 모서리의 왕허준 앞으로 기어올랐다. 그런데 올라오던 그것이 갑자기 뒤로 확 젖혀지는 게 아닌가? 이어 뭉개진 얼굴에 총알구멍이 5개나 뚫린 대머리 남자가 그것을 대신해 올라오려 몸서리를 쳤다.
하나같이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 흉측한 몰골의 영혼들이 떼거지로 배 모서리에 다닥다닥 달라붙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배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하였다. 경악하여 기겁한 아이들은 급히 모서리에서 벗어나 한가운데로 몰려들더니 서로 등을 붙인 채 뭉쳐 앉았다. 허준은 대령의 말을 떠올린 나머지 급히 바닥에 이마를 대고 납작 엎드린 채 벌벌 떨었다. 평소 잘 놀라지 않던 이안 역시 지금 상황에 무척 당황한 모습이었고 안젤라는 그의 팔에 바짝 매달려 놓아주지를 않았다. 카할과 우란이 그나마 좀 나은 상태인 것 같았지만 몰려오는 저것들처럼 얼굴이 시퍼렇게 질리었다. 티앤 단까오가 그나마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수진은 여기에 세세히 쓰진 않겠지만 사람이 보통 기절하기 직전에 보이는 증상들을 두루 보여주었다는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
망자들이 그들에게 손을 내밀며 말을 꺼내었다. 목소리는 동굴 안에서 공명되는 것처럼 아주 잘 들리었다.
“나랑 이야기하지 않을래?”
“내게 다가와 줘. 우리 뭐 할까?”
“귀여운 아이야, 이름이 뭐야? 대답 좀 해봐, 응?”
대령은 침묵을 지키며 천천히 그리고 조심히 팬을 밀었다. 사방에서 모여드는 영혼들의 포위로 앞으로 나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어지는 젤리를 미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함부로 배를 몰 수도 없었다. 까닥 잘못하면 전복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이들은 이미 입을 봉한지라 말 한마디 할 수 없었고 심한 공포감에 피까지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망자들은 배 주변을 몇 겹으로 둘러싸며 텅 빈 눈으로 그들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수진과 우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아예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나머지 아이들도 어쩌지 못한 채 그냥 그렇게 견뎌야만 했다.
앞에서 한줄기의 빛이 번쩍 반사해 들어오며 프라이팬을 비추었다. 망자들이 하나둘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모서리에 매달렸던 그것들은 결국 물속으로 다 사라져 버렸다. 이안이 대령의 허락을 구해 그의 다리를 타고 머리 위의 모자 귀퉁이로 올라가 방금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았다. 그곳은 두 갈래 물길로 나뉘는데 그들이 탄 배는 왼쪽으로 건너왔고, 망자들은 물속에 잠긴 채 오른쪽으로 떠내려갔다. 그곳은 약간 과장하면 물 반 귀신 반이었고, 수면 위로 형상들이 수시로 올라왔다 내려가다를 반복하였다.
팬 주위의 기온이 확 높아졌다. 더 이상 춥지도, 하얀 입김도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