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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Hwang 황선연 Jan 19. 2017

2. 카할 캐이브

2. 카할 캐이브

2. 카할  카할 캐

“어젯밤에 세어봤는데 금화가 아직 15닢이나 남았더라고. 그래서 말인데, 캠프 등록하기 전에 미할 아저씨 아들을 한번 만나보는 게 어때?”


 딥언더니아의 원형광장을 걸으며 이안이 물었다. 수진의 표정이 환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야. 이왕이면 같이 캠프에 참가했으면 좋겠어. 세 명이면 금화 9닢이면 되니까. 사실 그분 아들이 왠지 마음에 걸렸었거든. 근데 말이야, 미할 아저씨가 적어준 이 주소, 어째 좀 이상한데.”


그녀가 심각한 눈초리로 말하며 내려다보는 메모지에는 삐뚤삐뚤한 파란 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

     


‘제5번 회전하는 철판, 꼭대기 70층, 왼쪽 벽으로 8번째 집 노란색 문’   



 그녀는 소리 내어 주소를 읽은 후 도저히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쪽지를 건네었다. 그 역시 눈을 찡그린 채 열심히 쳐다보고 또 쳐다보았지만 당최 무슨 소리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 눈치였다. 


‘회전하는 철판은 도대체 뭐야?’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원형광장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중이었다. 그는 달팽이관처럼 광장 벽을 따라 빙빙 둘린 좁은 길을 눈으로 좇으며 꼭대기 층을 쓱 올려다보았다. 걸어서 저기 위까지 오르기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리고 각 층마다 적어도 수십 개의 노란 문이 보이는 것으로 추측컨대 70층에 도착한다 한들 정확한 주소의 문을 찾기란 결코 쉽지 않을 듯했다. 


 그는 계속해서 헤매었고 넓은 광장을 자꾸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점점 다리는 아파오고 힘들어진 그녀가 뾰롱한 표정으로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러지 말고 지나가는 분에게 한번 물어봐."


 그러나 쑥스러워서 그런지 자존심이 상해서 그런지, 그는 스스로 찾겠다며 또 길을 나서는 것이었다. 


‘차라리 파란총알을 타고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제5번 회전하는 철판을 찾아볼까?’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말해보려고 옆으로 몸을 돌렸는데 아뿔싸, 그녀가 없었다. 깜짝 놀란 그가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좀 떨어진 곳에서 길을 묻고 있는 그녀를 찾을 수 있었다. 그녀 옆에서 험악한 죄수처럼 생긴 딥언더니아 아저씨가 어딘가를 손으로 가리켰고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 역시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데 앞니 두 개가 쑥 빠져있었다.


  이안에게 다가오면서 이렇게 쉬운 걸 갖고 왜 그 헛고생을 시켰냐며 그녀가 사납게 쏘아보았다. 그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남자는 알다가도 참 모를 종이다.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히 인정하고 물으면 될 걸 굳이 혼자서 찾겠다고 저리 황소고집을 피우니 말이다. 이 어렵고 복잡한 세상을 좀 쉽게 살아도 되련만 여자가 보기에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우리 이안도 이번 기회에 소중한 교훈을 배웠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래어본다. 



 딥언더니아인이 가리킨 1층의 그곳은 척 보기에도 옆으로 쭉 늘어서 있는 다른 문들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아니, 다른 것보다 너비가 아주 조금 더 넓고 문이 활짝 열려있어 계속해서 군중이 들락날락하는 점이 달랐다면 달랐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문 위로 ‘5’라고 새겨진 석판이 걸려있었다. 그곳이 맞는 것 같았다. 그들은 딥언더니아 군중에 섞이어 안으로 꾸역꾸역 밀려들어갔다.     


 그들을 먼저 맞이한 것은 시끄럽게 돌아가고 있는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였다. 타원형으로 걸쳐진 컨베이어 벨트 위에는 동그랗고 납작한 철판들이 한 줄로 나란히 얹어있는데 딥언더니아인이 각각 의자 삼아 그 위에 앉아있었다. 멀리서 보면 꼭 저울 위에 타고 가는 것만 같았다. 말 그대로 ‘회전하는 철판’의 오른쪽 줄은 1층부터 꼭대기 층까지 올라가는 방향이고, 반대편 줄은 꼭대기에서 1층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오른쪽에 마구잡이로 서 있는 줄 맨 앞의 적당한 위치에 다가가 섰다.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다들 줄을 서고 있었지만 먼저 달려가 앉는 자가 임자라는 걸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마침 비어 있던 철판들을 먼저 발견한 그들은 얼른 그 위로 몸을 던져 잽싸게 앉아버렸다. 철판은 딥언더니아인의 엉덩이 사이즈에 맞춰져 조금 작았지만 그럭저럭 앉을 만했다. 


 그들을 태운 철판은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높은 층으로 올라갔다. 목적지 층에 다다르면 딥언더니아인은 엉덩이를 살짝 앞으로 내밀어 뛰어내릴 준비를 하다가 층수가 적힌 깃발이 걸린 통로가 보이면 바로 뛰어내렸다. 컨베이어의 속도가 빠르지 않았기에 적절한 타이밍에 뛰어내리기는 그리 어렵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벨트 설비 아래로 그물망이나 그 어떠한 안전장치도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벨트에서 잘못 삐끗 만해도 바로 추락이라는 공포가 이안과 수진을 계속 긴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현지인들은 아주 능숙하게 타고 내려서 안전에 별문제가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비록 난쟁이의 작은 체구이지만 유난히 탁월한 균형 감각과 민첩성이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40층, 50층, 63층, 65층, 66층, 67층, 68층, 69층, 70층이라고 적힌 깃발이 저 위로 나타났다. 이안과 수진은 엉덩이를 살짝 내밀고 쭈그린 채 바로 뛰어내릴 준비를 했다. 


 이윽고 70층에 다다르자 그들은 몸을 날려 깃발 걸린 통로 안으로 뛰어내렸다. 가볍게 내린 이안과 달리 수진은 온몸에 너무 힘이 들어가 하마터면 앞으로 꼬꾸라질 뻔했다.

      

 어쨌든 무사히 70층에 도착한 그들은 출구로 나가 쪽지에 적힌 대로 왼쪽 벽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다행히 그들이 세기 시작해서 단 한 집의 노란색 문도 발견하지 못했기에 미할의 집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수진은 걸어가면서, 유독 이 층의 나무문들이 다른 층보다 더 낡았고 여기저기 금이 가 있는 등 상태가 썩 좋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또한 북적거리는 아래층들과 달리 매우 한적해서 멀리서 걸어오는 한 딥언더니아인과 그들만이 길 위에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제멋대로 페인트칠이 된 노란 문 앞으로 다가섰다. 이안이 힘차게 노크를 했다. 안에서 전혀 반응이 없었다. 그는 아까보다 더 세게 노크하려고 손을 들었다. 그때 그들 쪽으로 걸어오던 딥언더니아 소년이 멀리서 큰 소리로 외쳤다.


“그곳은 우리 집인데 어떻게 오셨지요?” 


“여기가 미할 아저씨 집인가요?”


 수진의 물음에 딥언더니아 소년은 문득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재빨리 이쪽으로 뛰어왔다. 


“저의 아버지이신데, 무슨 일로?”


“그럼 네가 카할?”


 수염자국 없이 매끈한 입가를 가진 소년은 깜짝 놀라며 자신의 이름을 부른 수진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그의 외양은 이랬다. 주근깨가 잔뜩 뿌려진 두 뺨, 통통한 몸집, 빨간 곱슬머리, 귀엽고 선한 인상, 120센티가 좀 안 되는 키. 그의 얼굴에 불안이 사라지더니 대신 호기심과 쾌활함을 드러내며 똑 부러지게 대답했다.


“제가 카할 캐이브인데요. 근데 실례지만 어떤 일이시죠? 아버지는 지금 출장 중이세요.”


 이안은 그의 아버지와 만나게 된 배경을 그에게 설명해주었다. 특히 무시무시한 부분은 제외하고 우연한 만남이었음을 강조했다.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카할은 배시시 웃으며 차례로 정중히 악수를 건넨 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집 안으로 들어가 보니 그리 넓진 않지만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고 꽤나 아늑했다. 다만 가구나 살림살이가 많이 낡고 오래되어 보였다.


“딥언더니아에는 어떻게 오게 된 거니?”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카할이 먼저 편안히 말을 놓았다. 그리고 식탁 위의 어질러진 물건들을 바삐 치우고 벽난로에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카할, 우린 며칠 후에 열리는 메리슨 폰데 캠프에 참가할 거야.”


“정말? 진짜로 좋겠다. 나도 꼭 가보고 싶었는데...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너희들이 정말 부럽다.”


 수진의 들뜬 대답에 그의 눈이 순간 별처럼 반짝거리다가 애잔한 아쉬움으로 바뀌었다. 그의 눈빛은 그날 오두막에서 캠프 전단지를 바라보던 미할의 것과 무척이나 닮아있었다. 그는 주방 한쪽 벽 앞에 높다랗게 쌓인 옥수수 더미로 다가가 괜스레 옥수수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고개를 강하게 내젓더니 심란한 표정을 떨쳐버리고는 (긍정적인 성격 또한 그의 아버지와 무척이나 흡사했다. 역시 부전자전.) 손님들을 향해 환하게 미소 지으며 이것저것 다른 주제로 대화를 이끌어갔다. 서로 이름을 건네고 나이도 물어보았다. 이안은 15살, 수진은 13살, 카할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나이를 밝혔다.


“나는 35살이야. 이제 한창 나이이지.”


“35살이면 어른이잖아? 겉보기에는 우리 또래로 보이는데.”


 주방 식탁의자에 앉으려다가 그녀가 화들짝 놀라 어정쩡하게 일어서며 대꾸했다. 


“수진, 딥언더니아인의 평균수명은 250살이야. 35살이면 우리 나이로 대충 14, 15살 정도로 보면 될 걸? 우리 또래야.”


 이안의 대답에 그녀의 입이 함지박처럼 크게 벌어졌다. 250살? 평균수명이 그리 길다니.


 딥언더니아에 대해 이것저것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카할은 더미에서 옥수수 몇 개를 꺼내 와서 꼬챙이에 꽂은 후 벽난로 불에다 노릇노릇 굽기 시작했다. 잘 구워진 옥수수들이 식탁 위에 올라오자 그녀는 얼른 하나를 집어 호호 입김을 불어가며 먹기 시작했다. 카할도 그녀 맞은편에서 같이 먹다가 그것에 전혀 손을 대지 않는 이안을 쓱 쳐다보았다. 그녀는 픽 웃으며 먼저 선수를 칠 겸 그 이유를 알려주었다.


“얘는 뱀파이어여서 옥수수를 먹지 못해. 근데 이거 정말 꿀맛이다.”


 카할은 별거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미 알고 있었어.”


“어떻게 여기 있는 자들은 내가 뱀파이어인 걸 알 수 있는 거지? 그렇게 티가 나나?”


 이안은 자신의 뺨을 손으로 매만지며 멋쩍게 물었다. 카할은 반쯤 먹은 옥수수를 손가락 사이에 낀 채 그 끝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자랑스레 말했다.


“딥언더니아인은 마법이나 신비로운 힘에 대해 아주 민감해서 보는 순간 딱 알아챌 수 있어. 그래서 나도 바로 알 수 있었던 거고. 그나저나 너한테 대접할 것이 없어서 어떡하니?”

 

“아니 뭘, 괜찮아.”


“대신 내가 그의 몫까지 다 먹어 줄게.”


 그녀는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마치자마자 또 다른 옥수수를 양손으로 집어 들어 이빨로 아구아구 떼어먹었다. 이안은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다 카할에게 물었다.


“근데 집에 다른 식구는 없네?”


“어머니는 지금 밭에서 옥수수를 수확하고 계셔. 나는 아직 옥수수 따기엔 법적으로 어려서 이렇게 집을 보고 있는 거지. 가끔 아버지 대장간 청소를 하거나 일감 찾는 걸 도와드려. 5년 후면 나도 바깥으로 옥수수 따러 나갈 수 있을 거야.”


“옥수수 따는 일에도 법적 나이가 있니? 혹시 키 때문에 그러는 거야? 아님 아동의 노동력 착취를 방지하기 위해서?”


“하하하, 아동의 노동력 착취? 그런 어려운 말은 내 평생 처음 들어봐. 나중 어머니가 돌아오시면 한번 물어봐야지. 왜냐면 이안, 옥수수 따는 일은 무척 위험하거든.”


“위험하다니 뭐가? 그냥 나무에서 뽑으면 되는 거잖아?”


“그건 부수적인 일이고, 옥수수 따기는 생명을 내걸고 해야 하는 일이야.”


“뭐, 생명을 내걸고 해야 한다고?”


 말을 내뱉은 수진의 입에서 씹다 만 옥수수 몇 알이 튀어나와 카할의 어깨너머로 날아갔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은 채 당최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아직도 모르고 있는 그들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여겼는지 ‘당연하지’를 무척 강조하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옥수수 따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데. 그걸 모르다니 의외인걸.”



 그들은 더 이상 대화 나누기를 포기했다. 처음 만난 사이에 조목조목 따지는 것은 서로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카할이 아버지의 대장간으로 다시 가볼 거라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들도 엉거주춤 일어나 같이 문밖으로 나갔다. 다정히 악수로 작별인사를 한 후 그들은 서로 반대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카할이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리더니 그들의 등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캠프가 끝난 후에 꼭 다시 방문해줄래? 캠프가 어땠는지 무척 듣고 싶거든.”


 이안은 이 집을 방문한 주목적을 까먹고 그냥 갈 뻔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지금이라도 안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이안은 그를 부르며 달려가 원래의 방문 목적을 말해주었다. 갑자기 그의 눈이 두 배로 커지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기 뺨을 여러 번 꼬집기까지 했다. 그는 너무나도 감탄한 나머지 곧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수진이 있는 쪽으로 이안이 되돌아오자 그는 힘차게 손을 흔들며 기쁨에 겨워 외쳤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그럼 내일 보자.”  




 이튿날 아침 이안과 수진이 호텔에서 나오자 카할은 벌써 레스토랑 밖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밤 그녀는 거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잠금장치가 달린 호텔방에서 손도끼를 옆구리에 낀 채 잠을 청하였다. 다행히 찾아오는 밤손님은 없었다. 


 카할이 홀라당 달려와 그들에게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야. 내가 캠프 등록처를 잘 알고 있거든. 나만 따라와.” 


“캠프가 열린다는 푸다크 별궁에 가본 적 있니?”


 카할은 ‘이런 아무것도 모르는 이 같으니라고.’란 표정으로 질문을 한 이안을 한심스럽게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어휴, 거기를 나 같은 자가 어떻게 들어가? 사실 너희에게 꼭 알려주고 싶은 게 있는데, 이번 캠프는 참가자들에게 매우 영광스러운 행사야. 무척 오랜만에 다시 열리는 거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딥언더니아의 위대한 건축물인 ‘소금궁전’ 바로 옆에 위치한 ‘푸다크 별궁’에서 캠프가 열린다는 것 자체가 진짜 놀라운 일이거든. 우리는 감히 꿈도 못 꾸던 일이니까 말이야.

 소금궁전은 이곳에 사는 우리 딥언더니아인에게도 거의 공개되지 않은 비밀스러운 장소야. 나뿐 아니라 우리 가족, 심지어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그곳에 가봤다는 분은 한 명도 못 봤어. 그러니 이번 캠프에 참가하면 내가 그것을 처음으로 본 유명인사가 된다는 말이지. 그 유명한 궁전을 매일 본 후에 가족들에게 실컷 자랑할 거야, 하하하. 근데 아마 궁전 내부도 한 번쯤은 견학할 거야, 그렇겠지? 꼭 그래야 하는데.”


“도대체 캠프가 얼마 만에 다시 열리는 건데 그렇게 흥분하는 거야, 기껏해야 몇 년 정도 가지고?”


 그녀의 시큰둥한 반응에 이안이 “흥.” 코웃음을 치며 낄낄거렸다. 카할은 ‘쟤 진짜 대책 안 선다.’는 멍한 표정으로 더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정확히 2,900년 만에 다시 열리는 거야, 2,900년 만에 말이야. 이번이 11회 캠프니까. 그러니 얼마나 큰 의의가 있는지 잘 알아듣겠어?”


“뭐? 2,900년 만에 열린다고?”


 경악한 그녀가 입을 쫙 벌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천 단위였다. 그런데 그때 그녀보다 더 당황하고 흥분한 사람이 옆에 따로 있었다.


“아니야, 카할. 2,890년 만이 맞아. 내 계산에 따르면 분명 이번이 12회라고. 2,890년 만이야.”  


“무슨 소리야, 이안! 2,900년 만이야. 확실하다니깐.” 


 틀렸다는 말에 카할의 눈동자에 불길이 치솟았다. 그는 자신이 맞다며 이안에게 단호히 따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잠시 눈치를 보다가 열띤 토론을 벌이는 그들 뒤로 살그머니 빠져나왔다. 그녀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빠져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두 남자의 머리통을 가늘게 흘겨보며 생각했다.

 

‘2,900년이든 2,890년이든 저렇게 핏대를 올리며 따질 필요가 있나? 하여간 남자들이란 사소한 걸 가지고 목숨을 건다니까.’

 

 아마 이래서 그녀가 학교 시험에서 항상 낮은 점수를 받았는가 보다. 연도를 묻는 문제에서 숫자 2,900과 2,890은 하늘과 땅 차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여유롭게 걸으며 광장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스름한 지하에 위치한 이곳은 자신이 떠나온 환한 세상과 분명 달랐지만 롤리마을에서 보던 일상의 모습들과는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어머니, 연장을 들고 일하러 가는 남자들, 물건을 팔기 위해 목이 터져라 박박 소리 지르는 상점 주인, 무슨 장난을 꾸밀 예정인지 모여서 낄낄거리는 아이들. 어느새 그녀의 마음은 평온해지고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들은 원형광장의 왼쪽으로 뚫린 30층 높이의 반짝이는 터널 앞에 도착했다. 처음 이곳에 도착한 날 우란이 가리키던 바로 그곳 말이다. 터널 내부의 벽은 눈이 시리도록 하얀 암석으로 되어 있어 길게 뻗은 회색 돌바닥과 분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바닥표면에는 다양한 색상의 수정들이 박혀있어서 마치 하늘의 별을 무수히 쏟아놓은 듯했다. 


 터널의 흰 벽면은 수많은 이야기를 풀어놓으려 거대한 부조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생동감 있는 작품들 사이를 걸어가려니 그들은 금세 위축되어 입을 열기도 왠지 조심스러워졌다. 시끌벅적하던 광장과 달리 엄숙하고 고요함이 흘렀다. 금속 갑옷을 차려입은 경비병들이 쇠도끼를 어깨에 멘 채 터널 안을 돌아다녔다.


“이 흰 벽은 바로 소금 암석 때문이야. 그것은 아주 귀하거든. 그래서 옛날에 왕이 여기다가 궁전을 짓기로 한 거지. 저 앞에 있는 것이 소금궁전으로 들어가는 ‘황금의 문’이야. 어때? 굉장히 멋있지?”

 

 길을 가로막으며 당당히 서 있는 크고 육중한 문을 카할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의 목소리에는 가슴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한 자긍심이 가득 담겨있었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그 거대한 문 양쪽으로, 활활 타오르는 횃불이 담긴 구리 받침이 각각 놓여 있었다. 받침의 테두리 겉면에는 날아오르는 학들이 두꺼운 음각선으로 새겨져 있었다. 횃불에서 품어져 나오는 노란 불빛이 황금의 문에 반사되고 그것이 다시 소금 벽과 바닥의 수정으로 반사되면서 마치 꿈속에라도 들어온 마냥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문의 정중앙에는 황금으로 만든 뱀 휘장 (uraeus, 머리를 쳐들고 있는 코브라의 형태로 고대 이집트 왕관에 장식되었음)이 달려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쫙 벌린 그것의 입 안으로 날카로운 독니 두 개가 드러나고, 그 사이 세모꼴의 혀가 날름날름 튀어나오며 아래로 상당히 쳐져있었다. 그것의 두 타원형 눈동자는 완전히 독이 오른 상태로 만약 쳐들어오면 가만 안 두겠다는 듯 벌써부터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코브라 주위로 룬문자가 몇 줄로 돌아가며 잔뜩 적혀있는데 카할의 설명으로는 소금궁전을 수호하는 주문이란다. 

 

 한 경비병이 문 앞을 왔다 갔다 보초를 서며 그들을 째려보았다. 다른 경비병이 코브라의 혀끝을 손으로 잡아당기자 무슨 샤워기 줄처럼 쭉 따라 나왔는데 그것을 입 가까이 대고 뭐라고 떠들어댔다. 전화 수화기였던 것이다.



 황금의 문에 못 미치어 길의 가장자리 한쪽으로 수수한 나무 책상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삐뚤삐뚤한 글씨로 ‘메리슨 폰데 캠프 접수처’라고 적힌 묵직한 석판이 그것 앞에 기댄 채 비스듬히 세워져 있고, 책상 뒤로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노인이 앉아있었다. 그는 흰 수염을 바닥까지 늘어뜨렸는데, 그것이 얼마나 긴지 털실뭉치처럼 돌돌 말려진 몇 다발이 바닥에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추측컨대 그의 평생 동안 수염을 자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듯했다. 수염 한 올 한 올은 마치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매끄러워 흡사 비단 은실처럼 찰랑거렸다. 


 아이들이 자신의 수염에만 관심이 쏠려 아무 말도 못 꺼내자 접수인은 여러 번 헛기침을 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들은 시선을 조금 올려 그의 바늘구멍같이 작은 두 눈을 쳐다보았다.

 

“흠흠, 오느라 수고했네. 흠흠, 여기 신청서를 작성하고 가장 중요한 참가비는 일인 당 금화 3닢이네.”


 이안이 준비해온 금화 9닢을 바지 주머니에서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접수인은 눈으로 개수를 세더니 그것을 하나씩 자신의 풍성한 수염 속으로 집어넣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그 속에 비밀 주머니라도 달려있는지 들어간 금화는 안에서 잘 고정되어 고개를 돌리거나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수진은 그에게 미리 양해를 구한 후 수염을 한번 찍 잡아당기거나 흔들어보고 싶은 충동에 빠지었다. 그렇게 해도 금화가 안 떨어지나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처음 만난 어르신에게 그런 부탁을 하는 것은 매우 버릇없는 행동이란 걸 그녀도 잘 알았다. 대신 침을 꿀꺽 삼키어 겨우 충동을 억제시켰다. 


“흠흠, 길게 설명할 거 없겠군. 흠흠, 내일모레 오후 3시까지 여기 접수처 앞으로 오면 된다네. 흠흠, 너희들은 소금궁전 옆 푸다크 별궁에서 머무를 거야. 흠흠, 이것저것 재미나는 걸 많이 겪게 될 테야. 흠흠, 다른 보충 설명은.. 더 이상 없군. 흠흠, 그럼 모레 보자고.”


 접수인은 말하는 중에 ‘흠흠’ 헛기침이 자동적으로 튀어나왔다. 일종의 습관 같았다. 처음에는 좀 거슬렸지만 아이들은 곧 익숙해졌다. 이제 돌아가라며 그가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카할이 아주 단호한 표정으로 그에게 상체를 구부렸다. 최대한 그와 가깝게 마주 보면서 절박한 눈길로 다음과 같이 질문을 다짜고짜 던졌다.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요? 접수받으시니 잘 아실 것 같아서요. 딥언더니아에서 열리는 이번 캠프는 2,900년 만에 다시 열리는 것이지요?”


“아니에요! 2,890년 만에 열리는 거예요. 제가 맞지요?”

 

 카할에 이어 이안이 악을 쓰며 눈에 핏대를 세우고 노인의 입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마치 그의 대답에 자존심 걸린 승패가 달리기라도 한 듯 책상 사이로 팽팽한 긴장감이 흘러넘쳤다. 멀리 황금의 문 앞에 멈춰 선 경비병이 매서운 시선으로 그들을 관찰하였다. 


 노인은 조그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곧 고개를 들더니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순간 두 소년의 눈초리가 한층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먹이를 쫓는 독수리 같던 그들의 눈빛은 이내 흐리멍덩해졌다. 기대했던 그의 대답이 영 시원찮았던 것이다.


“글쎄다. 흠흠, 잘 모르겠구나. 흠흠, 근데 그게 그리 중요한 것이냐?”


“그럼요, 저희에겐 무척이나 중요해요!” 


 카할과 이안이 동시에 목청을 높이며 두 눈에 힘을 잔뜩 주었다. 멀리까지 잘 들렸는지 경비병들이 바로 도끼를 들고 달려올 듯 경계태세를 취하자 노인은 한 손을 들어 괜찮다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그는 두 눈을 깜빡이면서 긴 수염을 위에서 아래로 여러 번 쓰다듬었다. 마침내 입을 연 그의 어조에서 잔뜩 비꼬는 투와 쯧쯧 한심하다는 느낌이 뒤섞여있었다. 


“흠흠, 그럼 개막식 때 버핏에게 물어보려무나. 흠흠, 캠프 위원장이니 그런 것쯤은 잘 알고 있겠지. 흠흠, 사소한데 목숨을 걸기는. 참내 별일이군.”

이전 01화 1. 악의 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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