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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J in Wonderland Jun 16. 2017

아버지는 숙련된 양복기술자였다


아버지는 숙련된 양복기술자였다. 1970년대 수출 산업의 대표주자였던 봉제공장에서 밑바닥부터 일을 배웠다. 외국에서 주문이 끊길 줄을 모르자 친구들끼리 돈을 모아 독립해서 따로 공장을 차렸다. 처음 몇 달은 반짝했지만 이내 2차 오일쇼크(1979)를 맞았다. 공장은 그대로 빚덩어리가 됐고, 사이좋던 친구들과도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아버지는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경기도 안양으로 피신해 가게와 월세방이 함께 붙어있는 자그마한 집을 하나 빌렸다. 수중에 남은 돈을 탈탈 털어 양복점을 차리고 아들들의 이름 앞글자를 따서 '덕성라사'라고 간판을 달았다. 


내가 스틸컷으로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바로 그 집에서 시작한다. 네 가족이 나란히 누우면 꽉 차는 방 한 칸을 나오면 나 혼자 눕기도 벅찬 좁은 마루가 있고, 기역자로 오른 쪽으로 꺾인 곳에 연탄 아궁이가 박혀 있는 주방이 있다. 주방을 나가면 뒷마당인데, 화장실은 그 집에 세든 두어 가족이 함께 썼다. 다시 마루로 돌아와 앞으로 향하면 마루에서 발을 내려 신발을 신어야 문으로 나갈 수 있는 가게가 시작되는데, 가게의 넓이는 방보다 조금 큰 정도였다. 가게의 4분의 1은 아버지가 늘상 서서 일하는 재단 테이블('다이'라고 불렀다)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 위로는 커다란 플라스틱 물통이 천장과 줄로 연결되어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었다. 거기에 투명한 호스를 연결하고 반대편에 묵직한 다리미를 결합하면 재단 테이블은 그대로 다림질판이 됐다. 테이블 반대편에는 어머니가 주로 쓰는 '미싱'이 한 대, '오바로크'가 한 대 있었다. 


이름도 모르고 어떻게 쓰는 줄도 모르는 '어른들의 기계'에 둘러싸인 내가 가장 먼저 배운 건 '웬만하면 함부로 만지지 않는 게 좋다'라는 것이었다. 식은 다리미는 너무 무거웠고, 바늘이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미싱 기계는 (물론 엄청나게 흥미가 있었지만) 가까이 가지 않는 게 모두를 위해서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끝이 날카로운 가위와 칼은 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그래서 그 시절의 내 장난감은 아버지의 손때 묻은 물건들 가운데 가장 단순한 것들이었다. 기역자로 구부러지고, 미묘한 곡선을 그리고, 짧기도 하고, 길기도 하고, 좁기도 하고, 넓기도 한 여러 개의 대나무 자(尺)와, 파랗고 빨갛고 하얗던 '초크chalk'들로 아버지가 재단을 한 뒤 잘라낸 천 조각 위에 울긋불긋 선을 긋고 색칠을 하고 놀았다. 


집 앞은 더러운 하천이었다. 지금은 복개되어 흔적도 없어졌지만, 당시에는 꽤 긴 하천이 석수동 언저리에서 내가 살던 마을을 지나 범계(로 추정된다)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세 발 자전거 뒤에 동생을 태우고 가다가 하천 둑에서 아래로 떨어졌는데, 다행히 시커먼 뻘흙이 있어서 크게 다치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건 그 중에서도 하드코어한 기억이었고, 대개는 하천 둑의 언저리에서 흙장난을 하고 놀았다. 그래서인지, 여름이면 종종 눈병에 걸리곤 했다. 


눈꼽을 닦고 안약을 넣는 것은 어머니, 다래끼는 아버지 담당이었다. 다래끼가 났다고 하면, 아버지는 나를 번쩍 안아 올려 재단 테이블에 앉혀 놓고 '그러게 놀다 들어오면 손을 깨끗이 씻어야지'하는 말을 하며 담배를 대각선으로 피워 물고는, 방금 담뱃불을 붙인 라이터로 대나무 자의 한 가운데를 살짝 달궜다. 그리고 그 자를 허공에 휙휙 휘둘러 열기를 살짝 덜어내면서 나에게 눈을 감게 하고는 눈꺼풀 위에 살짝 자를 올려 놓았다. 나는 왠지 뜨거울 것 같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피할 것 같고, 그래서 화난 아버지를 더 화나게 하는 것이 싫어서 두 팔로 아버지의 한쪽 팔을 꽉 껴안았다. 질끈 감은 눈 위로 옅은 핑크색의 둥그렇고 따뜻한 공기 덩어리가 아른아른거리다가 눈꺼풀에 와 닿는 느낌이 드는 순간에는 팔에 더 힘을 주었다. 신기하게, 그렇게 눈두덩이를 따뜻하게 하고 나면 뻑뻑했던 눈이 조금 풀리곤 했다. 아버지가 됐다고 할 때까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묘하게 열기를 머금은 대나무의 빠작빠작한 냄새와 함께 '메리야스' 밖으로 내가 꼭 끌어안고 있는 아버지 팔뚝의 옅은 땀냄새가 느껴졌다. 


지난 주 경미한 결막염을 빠져나와 다래끼에 꼼짝없이 걸린 채로 야근을 하다보니, 아버지의 노란 대나무 자가 무척이나 그리워진다. 또, 지금의 나보다도 네 살이나 어렸던, 손님이 없을 때면 당신이 만든 하얀 셔츠를 벗고 메리야스에 반바지 차림이 되어 양복 원단을 능숙하게 마루던 서른 넷의 양복가게 주인도 새삼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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