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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J in Wonderland Jun 16. 2017

나의 성공적인 도쿄 달리기

무라카미 하루키의 [더 스크랩] 추천사


회사의 연수 프로그램 대상자로 선정돼 2016년 봄부터 가을까지 6개월 동안을 일본 도쿄에서 살았다. 한 대학의 방문연구원이라는 신분이었지만, 마침 방문 기간이 1학기 중간부터 2학기 중간에 어정쩡하게 걸쳐 있어(중간에 여름방학도 있다) 대학의 담당 교수는 이 인간을 어찌하면 좋을까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사실 그 덕분에 기숙사와 도서관, 연구실을 쳇바퀴처럼 오가는 대신 미술관과 박물관, 공원을 잇는 삼각형을 생활의 중심에 둘 수 있었다. 비자에는 ‘문화 활동(Cultural Activity)'이라는 목적이 떡하니 적혀 있었으니 명목상으로 보면 오히려 이쪽이 방문 목적에 부합되는 생활이 아니냐는 것이 고심 끝에 결정한 ’변명‘이었다. 아니, 변명 끝에 내린 ’결론‘이라고 해야 맞을지도. 


 미술관과 박물관이 낮의 공간이었다면, 공원은 주로 밤의 공간이었다. 몇몇 공원을 답사한 끝에 기숙사에서 가까운 시바공원(芝公園) 주변을 두 바퀴 크게 돌아오는 7km 길이의 코스를 정해 놓고 일주일에 서너 번, 한밤중에 묵묵히 달렸다. 운동부족으로 망가진 건강을 되찾겠다는 것이 표면적인 목표였지만, 속내는 따로 있었다. 나에게 일본은 대학 시절부터 시작해 20년이 넘게 ‘팬질’을 계속해 온 무라카미 하루키의 나라였고, 하루키로 연상되는 수많은 행위 가운데 혼자서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것은 달리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랑할 것까지는 아니지만, 시간이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물론 세상에는 달리는 데 음악 따위는 필요없다는 하드코어 러너들이 수두룩하지만, 땀을 뚝뚝 흘리며(종종 자기혐오에 빠진다) 밤중에 조용한 공원을 달리는 데에는 음악이 필요했다. 그 ‘달리기용’ 음악을 고르는 데 좋은 참고가 된 것이 바로 하루키의 <더 스크랩>이다. 


 <더 스크랩>은 하루키가 잡지 <스포츠 그래픽 넘버>에 1982년부터 1986년까지 기고한 글을 모은 책이다. 당시 30대 중반이었던 젊은 하루키가 미국의 유명 잡지와 신문을 <넘버>로부터 제공받아 그 가운데 눈길이 머문 기사를 ‘스크랩’해서 옮기고 두런두런 감상을 더한 짧은 글들이 여든 한 편이나 실려 있다. 책의 서문에서 하루키는 이 책을 ‘이삿짐 싸다 벽장에서 나온 오래된 졸업앨범을 무심코 넘겨보는 기분으로 읽어달라’고 주문했지만, 사실 이 시기의 하루키는 수면 위 우아한 자태 아래로 열심히 발길질을 하는 물새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재즈 카페 주방에서 쓴 소설로 등단한 뒤 후속작을 내고 내친 김에 본격적인 전업 작가로 나서기 시작했을 때로, 본업인 소설 외에도 이런 저런 잡지 기고로 생활을 이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담배를 끊고 규칙적으로 달리기를 하며, 일찍 일어나 시간을 정해 하루치의 글을 쓰고 오후에는 문화생활로 스스로를 재충전하는 하루키 식의 ‘성실한 작업 패턴’이 모습을 갖춘 것도 이 때다. 한 편 한 편이 작가적 호기심을 제대로 세상에 드러내기 시작한 하루키의 밉지 않은 투덜거림으로 가득해 독자는 미소를 짓게 되지만, 겉으로는 넉살을 부리는 것처럼 보이는 하루키도 책상 앞에서 펜을 잡을 때는 꽤나 필사적이 아니었을까. 


 1980년대 미국 팝 컬쳐의 주요 장면들과, 그 주변에서 가지각색의 소용돌이를 만들었던 화제(가십)들이 다른 사람도 아닌 ‘30대 하루키’를 거쳐 2010년대의 한국 독자에게 다가오는 느낌은 상당히 독특하다. 읽다 보면 머릿속에 <록키>니 <ET>니 하는 그리운 영화의 장면들이 흐르기도 하고, 당대의 메가톤급 슈퍼스타 마이클 잭슨의 하이톤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마이클 잭슨이 무대 위를 미끄러지며 문워크를 하고, 전 세계 어린이들이 ET에게 손편지를 쓰던 그 시절에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반추하는 시간은 독자에게 주어지는 덤이다. (나의 경우는, 친구들과 동네 골목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테니스공으로 야구를 했다.)  


 하루키가 소개해 준 경쾌하고 무해(無害)한 올드팝 덕분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도쿄 달리기’는 성공적이었다. 몸무게가 정상 범위에 들어와 여름을 지날 무렵부터는 치수를 전보다 줄여 옷을 사게 되었다.(다시 늘어나면 큰일이다.) 얼마 전 일본 신문과의 인터뷰 기사를 보니 하루키는 작년 말에도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했다고 한다. 나이가 몇 살이더라도 뛰는 건 자유겠지만 <더 스크랩>에서 30년이 지나고, 이제 60대 후반이 된 하루키가 보는 요즘 세상의 ‘팝 컬쳐’는 어떤 모습인지도 조만간 들어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적당히 좀 달리시라는 말씀이다.

*이 글은 [더 스크랩]을 국내에서 출판한 출판사 [비채]의 최근 소식지에 기고한 글로, 지난 4월 초에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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