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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J in Wonderland Jun 20. 2017

지나쳐 버린 사진에 대하여

1995년 1월 22일 안암동에서

(사진 : 인터넷 고대신문 사이트)


대학 합격자 발표일이었던 1995년 1월 22일은 눈발이 희끗희끗 날리는 일요일이었다. 휴일이었지만 아침부터 부산을 떨어 아버지의 차에 온 가족이 올라타고 인천 집을 출발해 서울로 향했다. 물론 당시에도 전화 ARS를 이용해서 합격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방배동에 사는 작은 외할머니를 뵈어야 할 일이 있어서 어차피 서울에 가야 한다는 어머니의 주장으로 안암동에서 합격자 발표를 확인하고 나서 방배동으로 가기로 했다. 동생이 출발 전에 전화로 확인해보자고 했지만, 내가 말렸다. 미리 알면 재미 없다고 했지만, 가슴은 내내 쿵쾅거렸다.


지금은 지상은 공원, 지하는 도서관과 편의시설, 주차장 등으로 말끔하게 정돈됐지만 당시만 해도 대운동장은 말 그대로 거대한 공터였다. 학교는 대운동장을 반으로 나눠 경영대 쪽 절반은 수험생과 가족들이 타고 온 차를 세워 놓는 주차장으로, 대강당 쪽 절반은 합격자들의 수험번호를 단과대별로 줄세워 놓은 '발표장'으로 만들어 놓았다. 차를 세워 놓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높다란 나무판 꼭대기에 적힌 단과대를 확인하며 이동했다. 의과대, 공과대, 이과대...학교측의 단과대학 분류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다가 정경대라고 안내가 붙은 나무판 앞에서 발을 멈췄다. 정치외교학과. 정원 60명 모집에 108명 지원. 그리 높은 경쟁률은 아니어서 오히려 허수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합격을 자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저 많은 수험번호들 가운데 내 번호 하나 없을까 하는 오기도 들었다.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숫자를 훑어내려갔다. 수험번호 27090은 어머니가 제일 먼저 발견했다. "야, 저기 있네. 저기 있어!" 안도의 한숨과 함께 촌스럽지만 너무도 당연하게 어머니를 끌어안았다. 아버지는 뒤늦게 번호를 확인하고 "야, 진짜네? 하하.."하며 등을 두드려 주셨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당시 그런 자리에는 꼭 사진사가 몇 명 있었다. 그들은 자기가 찍은 사진을 크게 프린트해서 몸통 앞뒤로 걸고, 팔에는 '사진'이나 '촬영'이라고 쓴 완장을 옷핀에 걸어 채우고, 길다란 삼각대 끝에 카메라를 결합해 어깨에 메고 다니다가 여기다 싶으면 달려와 '좋은 날이니 사진 한 방 찍으시죠!'를 외치곤 했다.경사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우리 가족 앞으로도 사진사가 달려왔는데 나는 '뭐 이런 (당연한) 일을 가지고...'하는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거절했다. 우리 사진 찍어요. 내가 그랬으면 부모님도 당연히 응해 주었을 텐데 바로 거절을 하니 부모님도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거절당하는 게 익숙했을 사진사도 아주 잠깐 실망스런 말투로 '사진 하나 찍는 게 뭐 그렇게...' 비슷한 말을 꼬리처럼 남기며 다른 가족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생각해 보면, 그 때 좀 남우세스럽고, 조금 촌스러워 보여도 사진을 찍었어야 했다. 나중에 우편으로 사진을 받아서 액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진첩 어딘가에 '합격기념'이라는 메모를 달아 고이 간직했어야 했다. 부모님 두 분이 함께 내가 다니는 대학에 오신 것은 합격자 발표를 하던 그 날과 그로부터 7년 뒤 졸업식날 뿐이었다. 입학식은 평일이라 그냥 혼자 가서 새로 만난 친구와 선배들과 어울렸고, 졸업식 때는 부모님과 외가 친척 어르신들까지 오셨지만 합격한 지 얼마 안된 언론사 수습기간의 한가운데라 급하게 점심만 먹고 바로 경찰서로 복귀해야 했다. 결국 무슨 변명을 하더라도 1995년 1월 22일, 내가 대학 합격을 알게 된, 가족의 역사에서는 몇 안되는 중요한 순간을 이미지로 남기는 것에는 실패한 것이다.


합격자들의 수험번호가 출력된 종이가 가득 붙어 있던 그 나무판들은 어디선가 겨울을 보내고 3월 말에 다시 내 눈 앞에 나타났다. 중앙동아리들의 신입생 모집이 시작되자 정경대와 교양관, 학생회관이 둘러싸고 있는 이른바 '민주광장'은 동아리 선배들로 시끄러웠다. 그들은 자기 동아리 이름을 적은 나무판 아래 삼삼오오 모여 신입생들을 부르거나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직은 힘이 약한 초봄 햇살이 광장을 가득 채웠고 누군가 치는 통기타와, 누군가 틀어놓은 민중가요가 어울리지 않는 소음처럼 떠돌고 있었다. 나는 당시 동아리 활동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별 수 없이 민주광장을 지나가더라도 한가운데 최단거리를 택하는 대신 광장을 둘러싼 포장도로로 우회했는데, 그렇게 그 난리통을 옆으로 스쳐 지나가다가 동아리들의 선전 포스터와 사진들이 붙어 있는 나무판의 뒷면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지저분하게 때가 타고, 일부는 이미 찢어지고 떨어져 금세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그건 분명히 합격자들의 수험번호였다.


눈발이 날리고, 거절당한 사진사의 투덜거림을 흘려 듣던 그 날로부터 불과 두 달 사이에 고등학교 졸업과 신입생 OT와 대학 입학과 첫 수업과 첫 세미나와 무시무시한 신입생 환영식과 토악질과 MT가 있었다. 시간이란 그저 기약없이 다가와 순식간에 나를 통과한 뒤 어찌할 수 없이 뒤로 멀어져 가는구나, 그리고 그 뒤에는 저렇게 너덜너덜해진 것들만 남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 땐 왠지 쓸쓸한 기분이 들었더랬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때 그 나무판이라도 찍었어야 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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