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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J in Wonderland Feb 16. 2024

Cut runs deep

[소년이 온다] 


아침에 발 뒷꿈치의 각질을 벗기다가 상처가 났다. 따뜻한 물을 대야에 받아 한동안 살을 불린 뒤, 그런 용도로 쓰라고 만든 칼로 오른발 뒷꿈치를 문지르다 어느 순간 칼날이 옆으로 엇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는 아주 살짝 피가 보여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피가 멈추지 않아 자세히 보니 새끼손가락 손톱 정도의 넓이로 살이 깎여 있었다. 선이 아닌 면에서 고르게 피가 배어나와 욕실 바닥에 방울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넌더리를 내며 샤워를 하는 동안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는 몸을 타고 내려온 온수와 섞여 선홍색 선을 그리며 수채구멍으로 흘러들어갔다. 


몸의 물기를 닦아낸 뒤 일단 화장지를 마른 오징어처럼 길게 잘라 네모로 접은 뒤 상처 위에 댔다.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이쯤되면 피가 멈췄겠지 싶어 화장지 조각을 떼고 밴드를 붙이려다보니 화장지와 함께 굳은 피딱지가 딱 상처 모양으로 생겨 있었다. 이걸 떼면 다시 피가 나겠지, 하며 화장지 조각 위에 그냥 밴드를 붙였다. 하루 반 나절 이대로 다닌 뒤에, 밤에 다시 깨끗이 씻어내고 약을 발라야지.


오른발로 방바닥을 디딜 때마다 살짝살짝 오는 통증을 느끼며 집을 나올 준비를 했다. 일주일째 가지고만 다녔지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던 책이 가방 속에서 뒹굴거리는 걸 본 순간, 갑자기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오늘은 읽고 싶은 걸 읽자. 서재에 들어가자마자 이 책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눈에 들어왔다. 언젠가는 읽어야지, 꼭 읽어야지 했다가 어제서야 서점에서 사 온 한강의 [소년이 온다]였다. 


역시 상처 때문인지 평소처럼 성큼성큼 걷기가 어려웠다. 보도블럭의 이가 빠지거나 어깨가 비스듬한 곳을 수직으로 내려밟으면 발바닥이 자기를 땅바닥에 맞추느라 발목이 틀어졌고, 그때마다 발목을 둘러싼 신발 주둥이의 가장자리가 상처 근처를 쓸어댔다. 늘 조금 크다고 생각하면서도 뭐 어때 하면서 신어 온 오래된 로퍼가 오늘만큼은 꽤나 원망스러웠다. 보통 때보다 훨씬 느린 걸음으로 조심스럽게 걸어 지하철 역으로, 다시 지하철 역에서 학원으로 갔고, 학원이 끝난 뒤에는 다시 지하철 역으로, 그리고 수업이 끝난 뒤에는 요즘 종종 가서 이제 조금은 익숙해진 북카페로 이동했다. 묽은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한자를 외우고, 독해 프린트를 해석하고, 남들이 눈치채지 않을 만큼, 아주 짧게 졸았다. 


그러니까 이 책을 펼친 건 오후 다섯 시 쯤이었을 거다. 조용히 책의 글자를 눈으로 따라가면 왠지 누군가가 그 글자들을 나에게만 들리는 소리로  읽어 주는 것처럼 느끼곤 하는데, 소설 초반에는 그게 좀처럼 잘 작동하지 않았다. 물론 과문한 탓이겠지만 좀처럼 보기 힘든 2인칭이라 그렇다는 걸 몇 페이지를 더 읽고서야 깨달았다. 글자의 덩어리가 구(句)가 되고, 구가 모여 절(節)이 되고, 그 절이 머리 속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이미지를 만들고, 서사를 이끌어내도록 내버려두다보니 어느새 밤 8시가 넘어 있었고, 더 이상 넘길 페이지도 남아있지 않았다.


읽는 중간중간 글자들이 호흡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려서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가 여러 번 있었다. 마침 손수건도 두고 나와 그럴 때는 별 수 없이 고개를 잔뜩 뒤로 젖혀 잠시 천장을 볼 수 밖에 없었다. 그걸로도 진정이 되지 않았던 때도 두 어 번 있었는데, 그럴 땐 얼음이 다 녹은 아이스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카페 뒷마당에 나가 담배를 피웠다. 소년의 어머니가 화자인 장(障)이 끝날 무렵, 그러니까 에필로그 바로 직전에서는 한동안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간신히 마지막 장을 덮고는 그 길로 가방을 챙겨,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경사진 곳을 밟아 통증을 느끼지 않으려고 주의하면서 카페를 떠났다. 


이미 완전히 밤이 된 합정역 거리는 사람들의 말소리로 시끄러웠고, 오가는 차들의 엔진 소리와 어딘가의 상점들에서 틀어놓은 음악소리들로 가득해 도무지 빈틈이 없었다. 방금 읽은 소설에 등장했던 소년과 소녀와, 청년과 여인과, 노인과 어머니들과, 경찰과 군인들의 얼굴들이 떠오를 듯 말 듯해서 가만히 생각을 해 봐야 하는데 다시 거기에 현실의 다른 얼굴들이 겹쳐지는 게 싫어 2m 앞의 길바닥만 보고 걸었다. 사람들의 다리들이 저 앞에서 다가와 곁을 스쳐지나가거나, 잠시 눈앞에 머물거나, 시야의 양 끝에서 얼핏얼핏 보이다 사라졌다. 늘 내릴 문 옆에 서는 지하철 안에서는, 열차가 당산철교를 건널 때면 무심코 보던 양화대교와 선유도 대신, 틀림없이 그 풍경을 비추고 있을 창문을 고정한 아래쪽 나사 세 개 가운데 하나에 시선을 고정했다. 고개를 들면 분명히 내 뒤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반사될 테니까. 


피가 멈추고 한 나절이 지났으니 상처에 새 살이 돋기 시작한 것일까. 오른발의 통증은 이제 목소리를 많이 잃은 듯했다. 아니면 그 사이 내 발이 통증을 최대한 줄이는 방향으로 땅을 딛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대신, 집에 오는 길에 오르자마자 이상하게 왼손 손목께가 간헐적으로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비인지 눈인지 뭔가 차가운 것이 하늘에서 내려와 가방 끈을 움켜 쥔 왼쪽 손목에 닿는 줄로만 알았다. 오늘 밤 하늘은 가만히 노려보면 별이 보일 정도로 맑은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소설에서 왼쪽 손은 두 번의 장면에서 언급된다. 물론 소설을 모조리 텍스트 파일로 만든 뒤 콘트롤+F로 '왼손'을 찾으면 훨씬 많이 나오겠지만, 내 왼손의 갑작스러운 통증과 관련된 부분은 아무래도 이 두 곳인것 같다.

 그 사내는 왼손잡이여서 왼손으로 내 오른뺨을 때렸을까. 
 하지만 탁자에 교정지를 던질 때, 볼펜을 내밀 때는 분명히 오른 손을 사용했는데. 
 누군가를 공격할 땐 본능적으로 감정에 관계된 왼손이 움직이는 건가.
 (p. 74)
평범한 볼펜이었습니다, 모나미 검정 볼펜. 그걸 손가락 사이에 교차시켜 끼우게 했습니다. 
그야 왼손이죠. 오른손으론 조서를 써야 하니까. 
예, 그렇게 비틀었습니다. 이 방향으로도 이렇게.
처음엔 견딜 만했습니다. 하지만 날마다 같은 곳에 그렇게 하니까 상처가 깊어졌어요. 피와 진물이 섞여 흘렀습니다. 나중엔 이 자리에 하얀 뼈가 들여다보였습니다. 뼈가 드러나니까 알코올에 적신 약솜을 끼워주더군요. 
(p. 104)

 

2014년 5월 19일에 초판이 나온 뒤 작년 12월 4일에 18쇄가 발행됐다. 만해문학상을 받았고, 몇몇 신문들이 '올해의 책(2014)'로 선정했다. 많은 사람들이 읽었을 것이고, 그 숫자 만큼의 감상이 있을테니 이 애매하고 산만한 독후감 때문에라도 이 소설의 내용이 궁금한 분은 꼭 읽어보시길. 가능하면 5월이 오기 전에, 꼭.  

에필로그가 '작가의 말'인지, 아니면 소설의 뒷이야기인지 읽고 나서도 헷갈리는데 이제 와서는 아무려면 어떠랴 싶다. 내가 소설 속 동호와 정대 정도의 나이였을때 알게 된 한 친구가 마침 이 작가를 연구해 몇 년 전에 문학평론가로 등단했는데, 조만간 그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 술을 마셔야겠다. 그렇지 않아도 이 친구에게는 꼭 갚아야 할 마음의 빚이 있다. 물론 혼(魂)으로도 끝내 만나지 못한 1980년 5월 광주의 동호와 정대 만큼이야 하겠느냐만.


(2016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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