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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날 Jun 29. 2023

Q. 내 안에 있는 아이 같은 구석은?

A. 그냥 사랑해 줘. 무조건 칭찬해 줘.


요즘 ‘그룹 운동’을 하고 있다고 몇 차례 이야기 하였다. 무려 100여 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이 이 ‘온라인 운동 모임’에 동참하고 있다. 각 멤버들은 30여 명 단위로 쪼개어지고, 이들 ‘그룹’이 하나의 단톡방에 소속되게 된다. 멤버들 대부분은 소위 ‘아줌마’ 혹은 20대 후반 이후의 ‘애엄마’들이다. 이 방은 자신의 운동과 식단을 인증을 위한 방이며, 건강한 몸을 위하여 정보를 교류하는 한편, 자꾸 해이해지는 몸과 무너지는 마음을 추스르며 서로를 일으키는 방이다.


잘했다, 잘하고 있다, 좋은 생각이다, 이겨내길 바란다,라는 칭찬과 응원이 봇물처럼 쏟아진다. 살면서(특히 최근), 이만큼의 인정과 애정, 격려와 포용을 받아 본 적은 거의 전무한 것 같다. 그렇기에 칭찬 한마디의 울림은 더욱 중후하고 무겁게 다가온다. 포근한 안도감에 취해 시도 때도 없이 이 방에 들락날락한다. 가히 중독적이다.


운동 모임은 익명이자 비대면이다. 내놓기에 부끄러운 내면을 대담하게 뒤집어 보일 수 있다. 응원과 칭찬은 각 멤버 스스로의 열정처럼 순수하다. 모임의 ‘수장’ 님은 멤버들을 ‘아기’라고 부른다. 우리 모두 마음속에 ‘아기’ 하나씩 품고 살지 않냐며. 무조건 사랑받길 바라는, 인정받길 바라는, 안아주길 바라는, 그리고 칭찬받길 바라는. 미처 다 자라지 못한 내면 아이.


핸드폰을 양손에서 놓지 못한 채 나는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칭찬이 너무 인색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회사만 해도 그렇다. 칭찬은커녕, 냉소적인 농담을 던지는 편이 더 적절하다. 싫은 점들을 불평하기보다는, 유머로 승화시키는 편이 차라리 성숙하다. 쓰고 아픈 것쯤은 아닌 척 쿨하게 넘길 줄도 알아야 한다. (마음에 없는) 칭찬이라니, 하물며 진심이라니, 오글거리기 짝이 없다.


내가 처해 있는 수동적인 상황이 나를 보잘것없게 만든다. 밝고, 맑게, 긍정적으로 임하는 것은 뭔가 바보스럽다. 열정이 있어야 할 자리에 분노와 체념과 자기 비하 그리고 죄책감이 자리한다. 회사야 그렇다 쳐도, 가족 간은 어떠한가? 가족끼리 왜 이래, 다 알면서 왜 그래, 그걸 꼭 말로 해야 돼? 진짜 속내를 드러낸 게 언제였는지도 까마득하다. 민망하고, 부끄럽다.


무한하고 맹목적인 애정의 품에 와락 안기고 싶다. 연인에게, 친구에게, 부모에게 은근히 강요하는 무조건의 그것이다. 온전한 애정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장 나약한 모습, 즉 아기를 꺼내 보여야 한다. 대면이자, 실명으로. 상처조차 두려워함 없이. 그런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상호 여린 속을 모두 꺼내 보이지 않는 한, 쌍방의 칭찬은 성사되기 어렵다. 이미 자란 성인으로서, 타인에게 이유도 조건도 없는 순수한 애정을 양껏 달라고 할 수는 없다. 일방적 애정을 받아 마땅한 물리적 아기의 시기는 아쉽게 지나가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단톡방에서 칭찬 샤워 연습을 하고 있다. 이 나이에, 쏟아지는 격려를 받으며, 헤실거리며 스스로를 대견해하고 있다. 익명을 위시한 칭찬은 결국 내가 나 자신에게 하는 말 혹은 듣고 싶어 하던 말과 마찬가지이다. 결국 나도, 몸만 자란 아기였나 보다.


칭찬은 비대면 익명성 모임에서 더욱 활발하게 오가는 듯하다. 타인의 말에 기대는 것은 기초적인 연습이다. 아기가 어른으로 자라나기까지의 의존 기간이 지나면, 종국에는 평생, 성인으로서의 내가 해내야 할 일이 된다. 스스로에게 하는 칭찬을 좀 더 진지하게 마주할 필요가 있다. 자신을 향한 맹목적인 사랑이 가져오는 자존감의 변화는 무시할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내가 무엇을 어찌하였듯, 자신에게 무조건 너그러워질 필요가 있다.


오늘 한 멤버가 한 말 한마디가 생각난다. “오늘의 우리 자신이 곧 리워드이다.”


오롯이 혼자만의 칭찬으로 스스로를 견인할 힘을 기를 것이다. 삶의 시기에 따라 그 힘의 강약은 다르겠지만, 하나의 방향성을 유지하기로 다짐한다. 나는 마땅히 찬사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왜 아니겠는가? 나를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그 일환으로 매일, 주문처럼 아래 문장을 거듭 외워본다.


“자신을 맹목적으로 사랑하기로 ‘결심하기’. 이유나 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기.”

<자존감 수업>, 윤홍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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