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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날 Mar 27. 2023

Q. 몸과 마음이 다르게 행동한 적?

A. 결혼, 이혼, 그리고 가스라이팅

나의 프랑스인 남자친구는 열정적이었다.


만난 지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그는 매일 집 앞에 꽃다발을 들고 찾아오기 시작했다.

간혹 내가 토라질 때가 있었는데, 그날만큼은 문을 닫고 열어주지 않았다

그럴 때면 그는 문 앞에 주저앉아 어린 소년처럼 울곤 했다.

‘나의 작은 새’, ‘나의 귀여운 초콜릿’ 같이 꽃망울 같은 사랑스러운 애칭 여러 개가 금세 생겨났다. 그리고 만난 지 두 달 만에 나는 청혼을 받았다. 비록 작을지언정, 별처럼 반짝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와 함께. 길고 외로웠던 고시 생활 끝에 찾아온 도피처이자, 안식처였다.


둑 터진 듯 쏟아지는 애정이 그 ‘개인’의 ‘변덕’스럽고 ‘감정’적인 성향에서 비롯된 한때의 열정임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프랑스인이란 원체 열정적이고 낭만적이구나, 운명적이라 믿을 수밖에 없을 만큼 뜨겁게 사랑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숙성되지 못한 눈먼 열정, 사랑의 맹아조차 틔우지 못한 금사빠의 상열지사였음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빨리 뜨거워진 것은, 대부분 빨리 식어버리기 마련이다.


잠깐, 노파심에서 말하자면.


애정, 열정, 분노, 기쁨 등 소위 ‘감정’에 쉽게 휩쓸리는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 당신의 상황, 성향, 마음에 귀 기울여 줄 틈도 없이, 제 기분대로 밀어붙이는 사람은 조심해야 한다. 그 또는 그녀의 감정은 ‘과열된 것’이자, '시한폭탄 같은 변덕'일 수도 있겠다. 남녀불문, 당신의 상대가 이런 사람이라면, 결혼은 잠시 뒤로 미뤄두고, 좀 더 오랜 시간 서로를 지켜보기를 바란다 (최소 4계절 이상은 만나봐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상호 갈등이 발생하였을 때 어떻게 조율해 나가는지,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방식은 성숙한 지, 압박을 받는 와중에도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지,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참착하게 행동할 수 있는지 등. 그리고 자신의 기분을 핑계로 당신을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는지. 써놓고 보니 신비의 동물 유니콘처럼 느껴지지만, 분명 그런 사람도 있다.


감정에 휩쓸린 상태는, 마음의 흙탕물을 마구 휘저어 둔 상태와 같다. 시간이 지나면 소용돌이도 점차 멈추어 갈 것이고, 물은 다시 맑아질 것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황금 도끼가 들어있는지, 썩은 자루 도끼가 들어 있는지. 이를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의 인내와 기다림은 꼭 필요하다.


각설하고.


나의 왕자님은 무릎을 꿇고 프러포즈를 해왔다. 결혼식을 올린 것은 그를 만난 지 4개월 만이었다. 지금의 열정과 사랑만을 굳게 확신한 채. 첫눈에 반한 아름다운 공주님과 멋진 왕자님의 해피엔딩인 것만 같았다. 꿀단지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기분이었다. 만인의 축복을 받으며 식장을 나섰다. 신혼 여행지는 발리의 풀빌라. 앞으로 꾸려갈 우리 둘만의 가정. 귀여운 아이들을 조랑조랑 낳고, 우린 천천히 함께 늙어갈 줄 알았다.


"그리고 그들은 아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노노, 로맨스는 딱 여기까지.


훌떡 일어서보니 뒤집힌 꿀단지를 머리에 인 채였다. 앞뒤좌우를 분간 못하고 비틀대기 시작했다. 꿀이 쏟아진 바닥은 미끄러워, 중심을 잡고 서있을 수가 없었다. 일용할 양식이 떨어지다니,  스푼으로 조금씩 떠먹을 걸.


그와 함께 사는 2년 동안 우리는 무던히도 싸웠다. 초반 몇 번은 맞서보려 했지만, 주로 나의 패배였다. 광기 어린 눈으로 미쳐 펄펄 날뛰는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육두문자 만발하는 욕설에 상처받아 종일 넋이 나가 있거나, 질질 끌려간 샤워실에서 물세례를 받거나, 인종 차별을 당한다거나, 아예 내 귓전에 그 주둥이를 대고 ‘닥쳐’라는 괴성을 수십 번 질러 고막이 터져 나가거나. 밀쳐지거나, 패대기쳐지 거나, 맨발로 쫓겨나거나.


싸움이 없을 때, 그는 퍽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어린 소년 같이 순수한 구석도 있었다. 우주에 흥미가 많고, 도널드덕 소리를 낼 줄도 알고, 자신의 불행했던 시절을 쭈뼛쭈뼛 털어놓기도 하는 등, 굉장히 프라이빗한 관계가 아니면 나눌 수 없는 경험과 이야기들을 제법 공유하였다.


그래서일까, 자근자근 이어지던 크고 작은 폭력은, 그의 장점 또 미운 정함께 얽어져 상쇄되고 말았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가스라이팅’인 걸까. 특별한 갈등 없는 날도 있으니 괜찮았다. 조용히 넘어가는 저녁에는 그럭저럭 평화롭게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으니까. 오늘 하루만 잘 넘기면 돼. 어쨌든 하루는 지나가고, 살아지니까. 그러니 하루만, 하루만 더 참자,라는 생각으로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어김없이 맑고 밝은 내일은 찾아왔고. 그를 어르고 달래 보자는 희망이 찾아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흘 중 하루는 서로를 물어뜯는 날이었다. 생채기 위의 딱지가 아물 시간도 없었다. ‘나의 작은 새’, ‘나의 귀여운 초콜릿’ 등의 애칭은 ‘더러운 창녀’로 변한 지 오래였다. 싸움이 잦아들면, 깨금발을 한 채 내 방으로 돌아와 조용히 ‘불멍’을 때렸다. 멍하니 초가 타는 것을 지켜보노라면 밭은 호흡도 차츰 안정되었다. 침대에 모로 돌아누워 까만 벽을 바라보았다. 자잘한 꽃무늬를 향해 한 마디씩 툭툭 던져 보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할까.

내 인생, 망했구나.


이혼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 머릿속에 있는 백지가 아주 먹지가 되도록 까맣게 적어 내려갔다. 깜지가 너덜 해져 구멍이 나면, 또 새 종이를 꺼냈다. 이혼, 이혼, 이혼. 그러나 이혼만이 정답일까? 친구들 말로는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던데. 이혼하고 나면? ‘이혼녀’ 딱지 달고 어찌 살래? 그나저나, 당장 뭐 해 먹고살아야 하나?


내년이면 여동생 결혼식인데, ‘갓 이혼한 언니’ 타이틀 달고 결혼식 장에 나타날래?


악으로, 오기로, 버텨낸 기간은 장장 2년이었다. 여동생의 결혼식이 무사히 치러짐과 동시에, 나는 내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 시절의 나는 자주 정신을 놓았다. 의식을 맑게 유지한 채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시간이었다. 스스로를 세뇌하고, 달래고, 그럭저럭 오늘 하루를 버텨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잠시 일상에 정신을 판 채 없던 일처럼 여기기도 하며. 그렇게 지냈다. 몇 번의 재수 없는 날에만 그저 이를 악물고 견딘다면… 그럭저럭 살아질 것 같았다. 더 나빠지지 않기만을 바랬다. 아래 악동 뮤지션의 노래 <낙하>의 가사가 무색하게도.


“초토화된 곳이든, 뜨거운 불구덩이든… 죄다 낭떠러지야. 예상했던 것보다 더 아플지도 모르지만. 하나, 둘, 셋. 숨 딱 참고 낙하.”


견디다 보면 혹시, 그로부터 다시 한번 꽃다발을 받게 되었을까.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어요.

바로 제 장례식 날이었거든요.

지난밤 그는 드디어 저를 죽였지요.

저를 때려서 죽음에 이르게 했지요.

제가 좀 더 용기를 갖고 힘을 내서 그를 떠났더라면

저는 아마 꽃을 받지는 않았을 거예요. “


폴레트 켈리의 시 <오늘 저는 꽃을 받았어요> 중

(폴레트 켈리는 남편에게 13년 간 맞고 살다가 탈출한 미국 여성으로, 현재 폭력 가정에서 벗어난 피해자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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