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린 시절에는 책 외판원이 돌아다니면서 전집 등을 팔곤 했는데 가격이 꽤 비쌌다. 구색을 모두 갖추기엔 우리 집 형편이 넉넉지 못했다. 당시 집에 있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나 도감 등은 대부분 큰 외사촌 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백과사전의 부록으로 ‘인명사전’이 두세 권 딸려 있었는데, 9살의 나는 그 인명사전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했다. 맹랑한 그 꼬마의 꿈이 무엇이었는 줄 아는가? 무려 ‘인명사전에 내 이름 석 자 올리기’였다. 적성도 흥미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저 ‘유명’해 지는 것이 나의 장래 희망이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겉으로 매우 수줍고 얌전한 아이였지만, 의뭉스러운 그 속은 부뚜막에 올라간 고양이였다. 겸손해 보였지만 호승심이 강한 계집애였다. 내 꿈은 ‘난 년’, 대충 뭉뚱그려 남들보다 훨씬 뛰어난 자가 되고 싶었다. 국선변호사, UN 직원, 외교관, 정치인 등등 번지르르하고 있어 보이는 직업은 차례차례 나의 장래 희망이 되었다. 권력에의 야욕은 동갑내기에 비해 ‘따따상’ 급이었으리라.
‘난 년’이 되고 싶은 마음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애정에 갈급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관계에서 중요한 사람이자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었으면 했다. 궁극적으로는 나의 존재를 인정을 받고 싶었다. 그리하여 남들이 나를 사랑해 주길 바랐다.
극히 낮은 자존감을 가진 아이였고, 어른이 되었다. 진짜 나를 내보이는 일은 극도의 공포로 다가왔다. 그래서 두 가지 방법으로 가짜 나를 내보이곤 했다. 겉으로는 허세, 안으로는 자기 비하를 일삼는 것이 첫째였고, 겉으로는 겸양과 자기 축소, 속으로는 자만을 일삼는 것이 둘째였다. 두 가지 유형이 번갈아 나타나곤 했지만, 주로는 후자 쪽이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변하지 못했다. 이러면 알아줄까 저러면 알아줄까 하며 안절부절 얼쩡거린다. 그런 모습을 귀신같이 알아챈 사람들은 오히려 부담스러워한다. 흔히들 비웃는 ‘자의식과잉’이다. 자주 외롭고, 자주 아프다. 꾸준히 마음을 수련한다면, 남들의 애정에 연연하지 않고, 남들의 언행에 무심해질 수 있을까? 그러나 인간이 지닌 항상성이라는 것은 지지리도 질기니, 내 사고 회로가 쉬이 바뀔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어린 나에게 나도 이제 와서 뭘 해줄 수 없으니 가엾다. 뭐라고 명명해야 할까? 애정 결핍? 애착 장애? 분리 불안? 뭐 그러한 정신병리학적인 것들로 얽히고설킨 것일 테다. 곧게 자라지 못하고 옹이에 마디진 것일 테다.
나로서 그대로 받아들여진 적이 없다. 늘 나를 계량화하던 엄마 밑에서 자랐다. 심지어 성장이 멈춘 지금까지도 엄마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리을’을 바로 쓰는지, 시험 점수는 몇 점인지, 반에서 몇 등인지, 어느 대학에 입학했는지, 어디에 집을 마련했는지, 어떤 남편을 만났는지, 연봉은 얼마인지, 지금은 사회 어느 계층에 속해 있는지. 달성해야 할 퀘스트는 끝이 없었다. 정해진 기준을 만족시킬 때에만 엄마는 울지 않았고, 나를 때리지 않았고, 나에게 선물을 안겨 주었다. 왜 나는 여전히 엄마와의 갈등과 마찰을 못내 견디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엄마로부터 애정 스코어를 따려고 아등바등 살며 착한 딸이 되려고 하는 지금의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세상의 모든 애정은 능동이 아닌 피동형이었다. 담쟁이덩굴이 비 맞아 툭 끊기듯, 애정이 언제 끊길지 몰라 집착한다. 무서울 지경이다.
‘난 년’은 커녕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인생의 의미조차 찾지 못한 나머지 세 번의 자살을 시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꼭 사회 어딘가, 최소한 한 명의 누군가에게는 ‘난 년’이고 싶다. 내가 먼저 ‘나의 난 년’이 되어야 함을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은 진작에 마비된 줄도 모르고.
하여, 이 글도 이 바람도 모두 부질없다.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인지 나도 모르는 채 변죽만 울렸다. 그렇기에 그저 아프고 쓸쓸한 자기 고백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