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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그널 G May 06. 2024

옥천에서 자전거 탄 이야기

[향수100리길 50.6㎞ &] 조급한 세상에 대한 위로

풍경 즐기며 천천히 달린다

  옛 이야기 지줄대는 풍류행

    대청호는 봄날 꿈결 속으로

      금강변엔 휘파람 부는 여름

        짧은 듯 긴 듯 달린 62.3㎞

          신록예찬 자전거 탄 풍경은

            지쳐있는 그대를 위한 위로

              안분지족 나에게 쓰는 편지


시간을 놓고 싶었다. 일상의 프레임을 벗어나고 싶었다. 시각시각 시계 안 보면서 그냥 즐기고 싶었다. 우린 얼마나 시간에 쫓기며 살아가는가. 유유자적 느린 유람이 당기는 계절이다. ‘비옥한 물줄기’ 옥천(沃川)에 왔다. 게으른 유람으로 딱 어울리는 향수100리길. 금강·대청호가 동행하고 옛 이야기 지줄대는 풍류행. 그날의 오후햇살 속으로 들어간다. 


#1. 김현식

아직 출발 전. 자전거를 빌린 뒤 향수100리길 시점이자 종점인 정지용생가로 향하는 길. 횡단보도 신호 대기 중이다. 옆에 계신 여성 두 분에게 물어본다. “죽향초등학교 방향이….” “네, 맞아요. 쭉 가시면 돼요.” 1909년에 개교한 학교, 근대문화유산인 학교, 교정에 문화재 석탑이 있는 학교다. 정지용 시인과 육영수 여사가 나온 학교로 유명하다. 또 한 명, 옥천을 ‘마음의 고향’이라 입버릇처럼 말하던 김현식 가객이 떠오른다. 그는 1965년 2학년 때 서울서 전학 와서 5학년까지 이 학교를 다녔다. 1996년 9월 발매된 7집 '셀프포트레이트(Self Portrait)'에 생전 목소리가 그대로 담겼다. 육성의 첫 시작은 과거 기억으로부터 시작된다. “서울 삼청국민학교로 전학을 올 때까지 지금 생각하면 참 시골생활이 너무너무 좋았던 것 같다. 파란 하늘, 아주 깜깜했던 밤, 별이 유난히도 많았던 밤. 정말 아름답던 추억이다.” 그가 말한 ‘시골’은 외가가 있던 옥천이다. 그의 노래 ‘어둠 그 별빛’을 흥얼거린다. 금세 정지용 시인 생가다.



#2. 정지용

먼저 눈에 띄는 건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된 시인의 생가. 단아한 초가 마당으로 발을 들이면 안채와 사랑채를 만난다. 생가 옆에는 문학관이 있다. 다시 길가로 나오면 '향수'의 그 실개천도 만난다. 물론 지금은 현대식으로 정비돼 있다. ‘향수100리길 시점’ 표지를 보며 출발한다. 곧 오른쪽에 보이는 지용문학공원을 통과한다. 초록으로 채색한 교동저수지 자전거길을 달려 성왕로로 접어든다. 길가 큰 벚나무들이 맞이한다. 벚꽃시즌엔 날리는 꽃잎이 아주 치명적인 곳이다. ‘썸’ 타는 그대들에겐 더욱 그렇다. 경험담이다. 정지용 시인의 짧은 시 한 편.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푹 가리지만, 보고픈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밖에.’ 옛 기억 떠올릴 찰나 오르막이다. 한 차례 크게 업-다운힐. 5㎞쯤 달렸을까, 갈림길이 나온다. 원래 코스는 직진인데 왼쪽길로 접어든다. 대청호오백리길 유람 때 만났었던 청풍정(淸風亭)에 가보고 싶었다. 2㎞쯤 석호리 방향으로 10여 분 들어가면 대청호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청풍정의 맑은 바람이 불어온다. 조선 후기에 참봉 김종경이 세운 정자, 청풍정엔 슬픈 러브 스토리가 전해진다.



#3. 김옥균

갑신정변 3일천하 주인공 김옥균 이야기다. 조국의 근대화를 염원한 한 사나이, 그 열망은 정변으로 이어졌지만 3일 만에 실패로 끝난다. 피신길에 오른 그는 이곳에 기거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런 그의 곁을 지킨 이가 있었다. 그를 흠모했던 기생 명월이었다. 명월에겐 그와 함께한 시간이 행복이었겠지만 정치적 야망의 좌절과 그에 따른 생사의 기로에서 그의 마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짧지만 달콤한 행복에 점차 암운이 깔리고 있다는 걸 감지해서였을까. 명월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다. 어느 날 그의 눈앞에 놓인 편지 한 장. 명월이 남긴 것이었다. 천천히 글을 읽어 내려가는 그의 눈가엔 눈물이 흘러내렸다. 명월의 최후를 직감한 듯 말이다. 다급히 그녀를 찾아 뛰쳐나간 그의 손에서 떨어진 편지, 거기엔 이렇게 써 있었다. ‘선생님과 함께한 이 짧은 시간이 일생에 영화를 누릴 것처럼 행복했지만 저로 말미암아 선생님이 품은 큰뜻에 누를 끼칠까 몹시 송구합니다.’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 명월을 수습한 그는 청풍정 바로 옆 바위에 ‘명월암(明月岩)’이라 새기면서 그녀를 가슴에 새겼다. 



#4. 장계관광지로

출발한 지 10㎞. 장계관광지로 향한다. 완만한 오르내리막을 달린 뒤 장쾌한 대청호 풍광이 보이는 호반자전거길에 들어선다. 시원하다. 시각도 촉각도 후각도 청각도 짜릿하다. 초록물결이 끝없이 이어진다. 느리게 지나가는 풍경 속에 새들이 쉼없이 지저귄다. 이문세 가객이 노래했던가, ‘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 훅-, 달려든다. 상쾌한 비누향이다. 길가 등나무 군락이 꽃을 피웠다. 향기도 향기지만 키 큰 나무마다 꽃을 품은 모습이 장관이다. 아까시꽃 매혹적인 향기도 설렘처럼 마음에 머문다. 덱(deck) 길이 끝나고 농로 오프로드를 달린다. 군데군데 차량이 서있는 호반숲길로 이어진다. 물 한 모금 마시며 지도 어플을 본다. 장계관광지 턱밑이다. 아, 이렇게 이어지는구나. 큰길로 올라타니 장계관광지로 들어가는 오르막이다. 다시 숨이 가빠지고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짧지만 긴 오르막, 자전거 스피커에서 나오는 god 노래. ‘나는 왜 이 길에 서 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나는 무엇을 꿈꾸는가, 그건 누굴 위한 꿈일까. 그 꿈을 이루면 난 웃을 수 있을까.’ 화려한 옷을 입은 장계관광지가 안아준다.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잦아들지 않는다. 유튜브 영상 속 그들은 잘만 올라가던데…. 먼저 도착한 K와 만나 숨돌리는 시간. 벌써 발갛게 상기된 얼굴을 보며 서로 웃는다. 17㎞, 1시간 20분 지점이다. 아기자기하게 정원이 조성된 장계관광지. 리뉴얼사업으로 출렁다리·전망타워도 추진하고 있다. 예전에 옥천~보은 오가는 길에 보이는 커다란 대관람차가 있던 곳이다.



#5. 안남 가는 길

다시 안장에 앉았다. 솔직히 이때부터 조바심이 났다. 시간이 계획보다 많이 걸렸기 때문. 인위적으로 조바심을 누른다. 장쾌한 장계교를 건넌다. 자동차 한 대 없는 다리를 건너면서 여유가 되살아났다. 아스팔트를 달린다. 아스팔트지만 안전하다. 도로 건너편엔 점잖은 대청호 풍광이 이어진다. 곧바로 안남면으로 빠지는 이정표. 안내중학교 앞을 통과한다. 길 건너편의 '화인산림욕장 700m' 이정표를 패싱한다. 곧바로 이날의 최고 난코스 오르막을 만난다. 마음을 비운다. 천천히 가자. 기어를 저속으로 풀어서 살랑살랑 오르막을 오른다. 그리고 '보상', 시원한 다운힐을 달려 안남면사무소가 있는 배바우마을에 다다른다. 한반도 (반전)지형을 볼 수 있는 둔주봉 전망대로 유명한 마을 되시겠다. 점심을 즐기며 쉬어간다. 식당 담벼락에 예쁜 글씨체로 쓰여있는 시 한 편이 눈에 들어온다. 이 마을 올 때마다 쳐다보게 되는 시.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흔하디 흔한 것 동시에 최고의 것. 가로되, 사랑이더라.' 맛난 점심과 커피 한 잔 즐기고 길을 나선다. 면사무소와 멀지 않은 곳에서 또 한번 고의 코스이탈. 대청호오백리길 13구간(한반도길) 올 때마다 감탄했던 그 길과 하이파이브 하러 간다. 한반도 지형과 전망대 사이, 물과 뭍 경계의 길. 평화로운 길을 달린다. 1630년 초계 주씨 주몽득이 세웠다는 독락정을 지나면 비포장길이다. 빠르게 달릴 수 없다. 풍광 즐기며 느릿느릿 달린다. 먼 길 내달려온 금강이 이곳 앞에서 U턴 한다. 한껏 풍류와 여유를 즐긴 뒤, 우리도 U턴. 안남초등학교 앞에서 원래 코스 길로 갈아탄다.


#6. 강변 풍류행

안남면 종미리마을 경율당 앞에 멈춰선 자전거. 경율당(景栗堂)은 조선 영조 11년(1735)에 전후증이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서당이다. 율곡 선생의 학덕을 흠모했던 그는 자신의 호를 경율이라 하고 서당 이름도 경율당이라 했다. 툇마루에 앉아 사진 한 컷, 포즈는 여전히 어색하다. 출발 32㎞ 지점. 경율당을 지나면 금강변 풍류라이딩 참맛을 보게 된다. 어느 순간 오픈 조망. 금강 물길과 함께 달린다. 강변 초록샤워를 즐긴다. 산과 물과 하나 되어 달린다. 나도 저들처럼 푸를까, 저리 맑았던 적이 있을까. 자전거는 청마대교(35㎞ 지점)를 지나고 있다. 향수100리길 코스는 청마대교에서 다리 건너 달리는 아스팔트길이다. 비포장길 느낌이 나쁘지 않아 직진을 택했다. 그런데 진입로 앞에 '낙석위험' 표식이 있다. 대수롭게 생각지 않고 통과, 신나게 비포장길을 달렸다. 이런 걸 낭만이라고 하는 건가, 체인소리가 휘파람을 분다. 한껏 업된 자전거도 신바람이다. 한참 달리는데 앞쪽 길 가운데 커다란 돌(바위라고 하기엔 작은)이 시야에 들어왔다. 산에서 굴러 떨어진 돌로 추정. 별 일 있겠어, 역시 신경 안 쓰고 고고. 그러고나서 만난 막힌 길. 무너진 바위와 꺾인 나무들이 길을 막아섰다. 우리 키높이만큼 높아서 길이 보이지도 않았다. 돌아서야 하나. 낙석 위로 올라가봤다. 생각보다 긴 구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불현듯 '위험구간이다.' 겁이 났다. 자전거를 업고 넘어선 뒤 후다닥 가덕교까지 달렸다. 이 구간은 꼭 삼가고 원래 코스 아스팔트길 달리시길. 가덕교 1㎞ 앞둔 지점이다.


#7. 가덕교

그 다리다. 몇 해 전 후배들과 왔던 기억이 났다. 석양에 비친 강물과 윤슬이 아름다웠던 기억. 노을에 기대어 찍었던 사진, 낭만포인트 기억도 한 스푼 머금는다. 준비한 드론촬영 제1 포인트도 여기로 잡았다. 우리 삶이 그렇듯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도 많다. 상황이 그때와 많이 달랐다. 어쩌랴, 드론 허가 신청(신고)한 곳이 이곳인 걸. 드론이 떴다. 드론이 보여준 길과 산과 금강의 조화는 명불허전 멋진 신세계였다. 물론 모델 2명이 션찮아서 작품을 완성하진 못했다. 가덕교를 건너 안전한 길을 달린다. 차량이 많지 않을뿐더러 지나가는 차량들도 배려를 한다. 향수100리길에서 만난 차량들은 대부분 라이딩족들을 배려해준다. 그래도 서로 조심해야 한다. 장난치거나 무리한 주행은 금물이다. 가덕교부턴 속도가 붙는다. 오르막 거의 없는 평지길, 로드용 자전거라면 속도가 꽤 붙을 구간이다. 합금교와 청마교(아까는 청마대교)를 지난다. 오후 햇살이 눈부시다. 눈부신 윤슬 위로 민물가마우지(로 추정되는 새)들이 모여있다. 어떤 시그널이었을까, 일제히 날갯짓을 한다. 푸드드드득~. 저 높이 경부고속도로가 눈에 들어온다. 금강4교 고가다리 아래를 통과한다. 금강유원지(금강휴게소)가 멀지 않았단 얘기다.



#8. 49㎞ 지점 통과

금강휴게소다. 댐 옆에 난 길을 따라 강을 건넌다. 둥근 통 고무 속에 공기를 넣어 팽팽한 압력으로 댐 역할을 한다고. 주위를 둘러본다. 휴게소 위쪽에서 구경하는 사람들, 산책하는 사람들, 낚시하는 사람들…. 금강휴게소는 오늘도 분주했다. 어릴 적 만난 나의 첫 고속도로 휴게소는 금강휴게소다. 그때 어린 아이의 출출함을 달래준 어묵과 우동 맛은 잊지 못한다. 금강휴게소 벗어나는 길도 압권이다. 초록 데칼코마니가 강물 위에 펼쳐진다. 오후햇살 받으며 그 옆을 달리는 기분이란….  이제 오늘의 기대주 유채꽃단지 차례다. 멀지 않은 옥천금강수변친수공원을 향해 페달을 밟는다. 유채꽃단지도 향수100리길 코스에 포함된 곳은 아니다. 코스와 가까워서 다녀오면 좋겠다, 생각했다. 해가 많이 기울었다. 빛이 더 줄어들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 사진 욕심에 마음이 급해졌다. 먼저 도착한 K 전화가 왔다. "유채꽃이… 거의 안 보인다, 아직 안 핀 것 같다." (4월 26일 상황) 아 누가 그 소리를 내었던가, 유채꽃이 난리난 것처럼 피었다고.


#9.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막바지 구간이다. 금암1리 압구정마을을 지나 더 달리면 안터마을에 닿는다. 안터선사공원과 옥천선사공원이 안터교 다리 하나 사이를 두고 조성돼있다. 옥천선사공원은 수몰된 마을에 남아있던 선사시대 유물과 모형들을 한 자리에 모아 전시한 야외공원이다. 고인돌과 선돌, 원탑(제신탑) 등이 전시돼 있다. 솟대와 장승도 새로 제작해 세워놓았다. 옥천선사공원 맞은편 길 건너엔 향수호수길 시작점이 있다. 안터교 다리 위에서 보면 멀지 않은 곳에 물비늘전망대가 서 있다. 물비늘전망대는 과거 옥천읍에 수돗물을 공급하던 취수탑 시설을 재활용했다. 향수호수길 안쪽으로 계속 걸어가면 감입곡류 진수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서쪽 마성산(408.7m) 너머로 해가 떨어지는 시간. 홈 베이스가 멀지 않았다. 마지막 업-다운힐을 오르내린다. 길 안쪽에 육영수 여사 생가가 보인다. 휴~. 잔디광장 바람이 참 시원하다. 그믐달 옆에 토끼 몇 마리. 함께 쉬다가 마지막 페달을 밟는다. 정지용 생가 도착. 62.3㎞. 휘파람 불며 마무리한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경로보기 http://www.everytrail.co.kr/fulldetailgps.trail?gps_id=99961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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