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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an Lee Jun 24. 2017

고단했을 당신에게 보내는 팬레터

서평 <시대의 소음>




한동안 운명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던 시기가 있었다. 내가 걷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그곳은 어딘지부터 시작해서 붙잡고 놓지 못하고 있는 것들, 나를 붙잡은 채로 어디론가 나를 질질 끌고 가는 것들을 탓한 밤이 한동안 많았다. 그리 오래 살지도, 눈을 뜨면 다시 감아버리고 싶은 날들은 많지 않았지만 가끔 운명이란 것이 교활하게 느껴졌던 적이 있다. 나와 주변이 아닌 나와는 관련 없는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 나시간을 앗아버리는 교활함을 발휘하는 것이 운명이라고 믿었던 적이 있었다.


운명론자에, 운명에 할 말이 많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유쾌한 소재, 자극적인 소재들보다 운명과 삶을 다룬 작품(책, 영화)등을 먼저 찾곤 한다. 그렇게 이끌려 읽게 된 책이 <시대의 소음>이다. 처음 이 책을 읽기 전, 소개글을 정독하며 음악가 '쇼스타코비치'를 소재로 한 소설이라기에, 어릴 적 봤던 '아마데우스'를 떠올리며 책을 펼쳤다. 그러나 묵직한 배경과 힘 있는 스토리,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에 가볍게 읽어보자 했던 마음을 거두어야 했다. 영화관에서 팝콘 먹는 느낌으로 읽어선 안 되는 책이라고 하면 맞을는지.


사실 이 책, 초반엔 읽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뒤죽박죽 섞여서 내뱉어지듯 풀어내는 과거와 현재는 물론이거니와 세계 현대사에 그리 밝지 않은지라 구소련의 정치적 배경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수준에서 벗어난 지식을 요구하는 것 같은 느낌에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더뎠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초반부를 벗어나면, 가독성이 월등히 상승한다.  복잡한 시대상황, 비슷해서 외우기 힘든 등장인물들의 이름들을 극복하면 그때부턴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아까워지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책은 실존인물인 세계적인 구 소련의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생애를 다루고 있다. 작가는 '쇼스타코비치'의 생애 중 가장 '아이러니'했던 시기들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그의 명성에 가려져야만 했던 생에의 환멸 또는 고통을 표현한다. 창작의 고통이라던가, 경제적인 궁핍은 사실 에게는 크게 해당되는 단어는 아다. 그의 삶에 균열을 일으키고 모순을 만드는 것은 구소련의 정치적 상황에 좌지우지되는 작품에 대한 평가와 자신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주입되는 것만 같은 명성, 체제가 바뀌면 언제 모습만 바뀐 채 본질은 바뀌지 않은 더러운 손을 내미는 권력이다. 그래서 타고난 재능과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하며 자신의 삶 주변을 맴돌며 관조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이쯤되면 그의 재능은 그의 삶의 풍요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지도.


그가 아는 것은 그때가 최악의 시기였다는 것뿐이다. - <층계참에서> 중
그가 아는 것은 지금이 최악의 시기라는 것뿐이었다. - <비행기에서> 중
그가 아는 것은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도 나쁜 최악의 시기라는 것뿐이었다. -<차 안에서> 중


그래서 그의 삶은 책을 읽는 내내 고단하게만 느껴진다. 시대순으로 배열해 놓은 세 개의 연작의 첫 문장이 그러하듯, 그는 숨 쉬고 있는 시간 모두를 최악의 시기로 느낀다. 순수한 창작활동, 불순물 없는 순수한 작품을 써내고 싶지만 그의 귀에 들리는 건 맑고 청아한 악기 소리가 아닌, 모습만 바뀐 채 같은 소리만을 내뱉는 '시대의 소음'이다. 저항하고 싶었으나 누구나 그러할 수 없는 불행한 시대를 살았으며 권력이 일정 부분 기여한 명성을 선전용으로 이용당해야 하는 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평생 움켜잡고 싶은 힘이 아니라 틀어막고 듣고 싶지 않은 소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 '어용 음악가'라는 평가를 향해 쇼스타코비치를 열렬히 사랑하는 팬이 보내는 위로의 팬레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한다. 그 정도로 작가는 그의 삶을 읽는 이로 하여금 공감뿐만 아니라 연민까지 느껴지도록 섬세한 의식 흐름과 치밀한 묘사로 주인공의 삶 중 가장 최악의 시기들을 재현해낸다.


좋은 작품이 언제나 그러하듯, 이 작품 또한 한 번만 읽기에는 분명 아까운 소설이다. 1 회독에서는 그를 둘러싼 많은 것들에 함께 분노하고 언제나 최악의 생에 아이러니를 느끼는 그의 감정선을 따라가며 읽는 재미가 있다면, 2 회독에서는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예술가로 사는 그의 운명을 통해 살아가고자 하는 삶과 살아가야만 하는 삶의 괴리에 대해 약간의 고뇌를 맛보는 재미가 있다. 한 번만 읽어도 충분히 괜찮은 소설이다. 하지만 한 번도 안 읽어서는 안 되는 작품인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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