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민감한 사람으로 40년 가까이 살아왔지만, 그동안 누군가로부터 ’너 참 예민하다‘라는 말을 들은 적은 거의 없다. 물론 그렇게 대놓고 얘기할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의 가장 친한 친구들조차도 내가 예민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니, 이것은 좀 아이러니하다.
예민하다는 말 대신에 들었던 얘기는 이런 것들이다.
"넌 무던해서 좋겠다.“
“사람들한테 상처도 잘 안 받고."
"불이 나거나 큰 소리가 나도 별로 신경 안 쓸 것 같아.“
“층간소음도 잘 참는 편이지?"
우리는 결코 누군가에 대해서 100% 다 알 수가 없다. 각도를 조금만 바꿔서 보면 같은 사람이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누군가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는 일은 그 사람 살갗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서 걸어다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누군가를 정말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는 거야.
말하자면 그 사람 살갗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서 걸어다니는 거지."
- <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나의 살갗 안에는 예민함이 가득하다. 그러나 나는 이를 있는 그대로 표현한 적이 결코 없다. 친구들이 나에게 했던 얘기의 일부는 맞지만, 일부는 틀린 말이다.
내가 나의 예민함을 언제부터 숨겨온 것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냥 내 예민함을 그대로 표출하면 무리 속에서 생존할 수 없으리라는 걸 본능적으로 눈치챘던 것 같다. 그래서 예민함을 숨기고, 감추고, 구석에 고이 접어두었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나의 부모님조차도 내가 매우 둔감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나를 키웠다. 엄마는 “애가 칠칠치 못 해서.”라거나 “여자 아이가 참 섬세하지 못 해.”라는 등의 말을 하곤 했다. 그리고 나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말들이 칭찬처럼 느껴졌다. 그런 칭찬을 더 받으려고, 속으로는 온갖 생각과 감각에 압도되어 멍해지거나 당황하게 되어도 겉으로는 살짝 웃거나 멀쩡한 척을 했다.
나이가 점차 들면서는 자연스럽게 여러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정말로 무던한 사람들을 몇 명 알게 되었는데,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사사로운 일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고, 혼자 분석하거나 생각에 잠기지도 않았으며, 그래서 유쾌하고 호쾌하게 인생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진심으로 그들처럼 되고 싶었다.
심리학적으로 기질은 성격과 구분된다. 기질은 타고난 것으로 변하지 않는다. 반면 성격은 어느 정도는 바꿀 수 있다. 나는 어릴 때는 분명 소극적이고 신중한 성격이었으나 자라면서 약간은 사교적이 되었다. 반면 예민한 기질은 그대로였다. 내가 추구하는 사교적인 사람에 부합하기 위해서 나는 나의 예민함을 완강하게 부정해야 했다.
예민한 나는 자꾸만 더 쿨한 척 했고, 상처 받지 않는 척 했다. 그런 척을 하다보면 내 안의 예민함이 사라질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그러나 나의 예민한 감각과 생각과 기질은 결코 증발하지 않았고, 언제 어디서나 나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다.
결국 그동안 내가 예민해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히 내가 예민하지 않은 ‘척’을 했기 때문이다. 예민하지 않은 척, 무던한 척, 상처 받지 않는 척을 했던 것이다. 철저하게 그런 척을 하고 살았으니, 내가 초민감자라는 사실을 아는 이가 많지 않았다.
사실 초민감자들이 쉽게 예민해보이지 않는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이들은 행동을 예민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극 처리를 예민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초민감자들은 어떤 자극을 받았을 때 이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거나 행동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자극이 들어오면 곧바로 반응하기보다는 흡수를 먼저 한다.
흡수 후에는 자극 안에 감춰진 의미와 원인 등을 분석하거나 깊이 공감하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이들의 내부는 매우 어지럽게 되지만 외부에서 볼 때는 오히려 차분하고 침착하게 보일 수도 있다. 감정이 심하게 올라오는 것은 내부에서 그럴 뿐이고, 외적으로는 잠깐 멈춰있는 듯한 상태가 된다. 어쩌면 상대방은 그런 초민감자들이 여유로워 보인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우리는 결코 상대방의 살갗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각자가 먼저 자기 자신을 살갗 밖으로 내놓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살갗 밖으로 주섬주섬 꺼내놓다보면 서로를 더 이해할 수 있고, 아껴주며, 다독여주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그런 마음으로, 나는 나의 예민함을 살갗 밖으로 얘기해 본다. 더 이상 어떤 척도 하지 않겠다. 상처를 받았다면 쿨한 척 하지 않고, 그냥 이렇게 얘기하겠다.
“윽, 그건 상처야. 나 예민한데.“
살갗 속의 내 일부를 바깥으로 꺼내고, 오해와 분석과 판단과 평가들을 날려버린 후, 단순히 나와 너로, 너와 나로 관계를 잘 맺을 수 있도록 진심으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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