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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나 Nov 10. 2024

나는 손흥민 아내다

"엄마, 엄마! 일어나요."


토요일 아침, 한창 늦잠을 자며 꿈나라에 빠져 있는 나를 깨우는 달콤 살벌한 소리가 들려온다.


"으.. 으응. 엄마 좀 더 자면 안 될까?"

"안 돼요. 엄마 배고파요. 밥 주세요!"

"얘들아 엄마 좀 더 자고 싶은데 아빠한테 달라고 하면 어때?"

"아빠 없는데요?"


"뭣이라고??"


이 인간. 또 축구하러 갔구나.

토요일 아침이면 달팽이처럼 스르륵 소리 없이 사라져 버리는 사람이 한 명 있다. 보통은 다음날 일정을 전날 밤에 말해주기 마련인데, 그분께서는 말씀을 아니해주시고 아침에 일어나면 이미 없으시다. 나의 잔소리를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 미리 말을 안 하고 아침 일찍 자고 있는 틈을 타 사라지는 그는 축데렐라다.


결국 나는 사랑스러운 우리 아이들의 밥을 위해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간신히 1차 일으켜 앉고, 침대 다리를 잡고 2차 일어나서 부엌으로 향한다. 느리지만 정성스럽게 아이들 밥을 차려주고 번개맨을 틀어주고는 먹도록 한다.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안방의 한 뭉태기 이불덩어리. 그는 없다.




남편은 축구사랑이 유별나다.

결혼 전, 결혼 후 신혼시절, 출산 후, 애가 둘이 되고 난 뒤까지 그 어느 시절에도 축구를 포기한 적이 없었다. 한 번은 주말의 육아가 너무 고단하고 힘들어서


"축구를 하러 꼭 가야 해?

주말 아침에 아이들 밥 챙겨주는 게 너무 힘이 드니까 당분간 축구를 쉬면 어때?"

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남편은,


"네가 나의 축구에 대한 진심을 알아?

나는 축구 없으면 살 수 없어. 이건 나의 유일한 운동이야."

라며 펄쩍 뛰었었다.


그래 축구를 하는 건 좋다고 치자. 주말 아침 오전, 이른 시간 축구를 하고 들어오면 그는 기분은 좋아 보이나 몸은 많이 지쳐있는 티가 났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한다. 많이 뛰어서 다리 근육을 많이 썼으니까 이제 근육들이 쉬는 시간을 줘야 한다고. 그때부터 침대로 다이빙하여 그만의 달콤한 낮잠에 빠져든다.


고단한 평일을 보내고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외출해서 맛있는 것도 먹고 알콩달콩 재미있게 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나는 그 모습을 보면 속에서 천불이 날 때가 많았다.


아이들은 아빠가 주말마다 축구를 하러 가니 직업이 축구 선수인 줄 안다. 한 번은 첫째 아이의 유치원에서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었다. 부모의 직업에 대해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있었는데 첫째가 아빠가 축구하는 모습을 그려서 제출했다. 마침 선생님께서 축구 광팬이셔서 아빠가 축구선수 셔? 성함이 어떻게 되시니? 어느 축구단 소속이셔? 하며 아이에게 물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가 머뭇거리자 오후에 나에게 전화가 왔다.


"어머니~ 알콩이 아버님이 축구선수라고 하시던데 유명한 분이신가요?"

나는 그 전화를 받자마자,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하며 당황스러웠다.


"아닌데요. 회사 다녀요."

"아 전 프로 축구선수이신 줄 알았어요."


하하하.

주말에 남편이 없으니 좋은 점도 있다. 나의 강제적 자기 계발이 수행된달까. 금요일 밤, 아이들의 밥을 챙겨주기 위해 불금을 즐기지 않고 일찍 잔다. 그리고 회사 출근 때보다는 조금 더 늦게, 늦잠 잘 때보다는 조금 일찍 일어난다. 이걸 나의 루틴으로 만들고 아이들의 밥을 챙겨준다. 첫째는 아침밥을 먹지 않으면 예민해져서 동생에게 더 화를 내고 괴롭힌다. 얼른 밥을 주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아이들이 TV시청을 하며 밥을 먹을 동안 나만의 독서시간을 가진다. 물론, 오래가지는 않고 책에 집중하려 하면 꼭 엄마봇들이 나를 부르기는 하지만 말이다.


"엄마! 물!"

"엄마 먹여주세요."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커피 향을 느끼며 책을 보는 그 짧은 찰나의 시간이 행복할 때도 많다. 아마 남편이 일찍 나가지 않았다면 이런 시간을 가지기도 어려웠을지 모른다. 인생을 길게 보았을 때 '행운과 불운은 종이 한 장 차이'이고 생각을 바꾸는 것도 손바닥을 뒤집듯 쉬운 거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그의 심정을 이해해 볼 수 있고 나의 마음 또한 바꿀 수 있다. 회사에서 자주 쓰는 말 중 '위기를 기회로' 바꾸라는 슬로건이 있었는데 이것도 같은 맥락인 것 같다.


그가 축구를 사랑하는 게 처음에는 그만을 위한 이기적인 행동이라 생각했다. 나도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지만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주말에 엄마 따로, 아빠 따로의 시간을 보내면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사라지지 않을까? 하며 걱정스럽기도 했다. 아직도 일이 많아 몸이 지친 한 주의 토요일 아침엔 남편에 대한 불만이 올라오고는 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가 많이 달라졌다. 최대한 일찍 집에 돌아와 아이들과 내가 먹은 밥의 설거지와 뒤처리를 빠르게 담당해 준다. 그리고 근육을 위해 쉬는 시간을 포기하고 가족을 위해 오후 시간을 보낸다.


그도 나름대로 본인의 취미와 가족과의 시간의 균형을 잡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거다. 축구에 진심인 이 남자, 이쯤 되니 그만의 축구 사랑을 받아주자 싶다. 이렇게 된 거 아마츄어 손흥민이라도 되보는거다. 아자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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