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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영 Oct 24. 2021

"골프 게임엔 심판이 없어" 이 말의 의미

이번 건은 기계 오작동이니까 선생님이 한 타 빼줄게.


무더운 여름,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함께 스크린 골프를 치던 KLPGA 프로님이 내게 말했다. 방금 화면 밖에서 친 공은 비상하며 스크린을 강하게 타격했지만, 정작 화면 안으로 들어간 골프공은 더위를 먹은 듯 바닥을 기어가며 맥을 못 췄다. 고작 티박스 앞에서 몇 미터만 꼬물꼬물 굴러갈 뿐이었다.


프로님이 보기에도 기계 오류인 것 같다며 한 타를 빼주셨지만, 조금 억울했다. 필드와 다르게 스크린 스코어 기록에는 동반자의 인정과 상관없이 오류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어쩌면 내가 잘못 친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올라왔다.   


문득 재미로 치는 스크린 게임도 이럴진대, 하물며 5년을 준비한 2020(2021) 도쿄 올림픽 대회는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올림픽 스포츠 경기에는 심판이 존재하고, 불복 시에는 비디오 판독기까지 등장한다. 그러나 골프 심판만은 두 눈을 씻고 찾아봐도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양심이 심판이 되는 골프

▲ 대부분의 스포츠 경기에는 심판이 존재하지만, 골프는 심판이 없다.


흔히 골프를 신사의 스포츠, 매너 스포츠라고 부른다. 다른 스포츠와 다르게 이런 수식어가 붙는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경기 중 심판이 없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왜냐하면, 골프는 자신의 양심이 곧 심판이 되는 유일한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아마추어 골퍼는 동반자나 캐디와 점수를 상의하고 기록하며 경기를 진행한다. 프로 골퍼의 경우에는 스코어 카드를 제출할 때 반드시 선수와 마커의 최종 서명(어테스트 : 경기 후 상대방의 스코어 카드가 틀린 점이 없는지 확인한 후 사인하는 것)을 받는다.


주최 측은 이 모든 것을 전적으로 선수에게 맡기고 책임까지 부여한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사인을 안 했거나, 잘 못 적용한 것이 적발될 경우 경고가 아닌 경기 자체를 실격 처리한다. 이러한 이유로 페어플레이 정신으로 부정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서로 간의 신뢰와 약속 이행이 무엇보다 크게 요구되는 운동이 바로 골프다. 


이는 골프룰 북(규정집) 제1장에도 명시돼 있다.


규칙- 에티켓 (게임의 기본정신)

골프는 대부분 심판원의 감독 없이 플레이된다. 골프 게임은 다른 플레이어들을 배려하고 규칙을 준수하는 사람의 성실성 여하에 달려있다. 예의를 지키며 스포츠맨십을 발휘하여야 한다. 이것이 골프 게임의 기본정신이다.


이러한 골프의 기본 정신을 모르면 그저 과시하기 좋은 스코어를 기록해야 하는 게임으로 전락한다. 하지만 골프는 그런 운동이 아니다. 이는 마치 인생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의 철학적 화두와도 닮았다.


심판은 언제나 골퍼와 동행한다

▲ 어디에도 심판이 없다는 것은 다르게 표현하면 모든 곳에 심판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가장 위대한 아마추어 골퍼, 골프의 성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바비 존스의 일화는 골프 정신을 그대로 보여준다. 1925년 US오픈 마지막 라운드에서 존스는 1타 차로 선두를 유지하고 있었다.


우승을 코앞에 두고 어드레스(스윙하기 전 두 발 사이의 폭을 정하고 클럽을 필드에 대어 공을 겨누는 자세)를 하는 사이 공이 움직였다. 자신 외에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지만, 경기위원회에 자진 신고하며 벌타 1점을 추가한 스코어카드를 제출한다(골프 규칙을 관장하는 영국왕립골프협회(R&A)가 2012년부터 어드레스 뒤 바람에 공이 움직이면 1벌타를 부과하는 조항을 수정하여 벌타를 부과하지 않는다).


결국 우승컵을 상대방에게 넘겨주었다. 바비 존스의 친구이자 기자인 O.B 킬러는 그날의 경기를 지켜보며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그가 우승하는 것보다 벌타를 스스로 부가한 것을 더욱더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 한 타가 없었더라면 플레이오프(연장전) 없이 그의 우승으로 끝났을 것이다. 이번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보다 더 멋있는 것이 바로 존스의 자진 신고였다."


기사가 나간 후 매스컴은 물론 이를 접한 모두가 바비 존스를 칭송했다. 그러자 바비 존스는 골프 정신과 자신의 신념을 담아 이렇게 답한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다. 규칙대로 경기한 사람을 칭찬하는 것은 은행에서 강도 짓을 하지 않았다고 칭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미국골프협회(USGA)는 1955년부터 매년 '골프 정신과 골프에 대한 존중 구현'의 의미를 담고 있는 바비 존스(Bobby Jones) 상을 시상한다. 2020년에는 박세리 감독이 한국인 최초로 이 상을 받았다.


남이 보든 말든 상관없이 인생 동반자를 속이지 않고(모른 척할 뿐 대부분 알고 있다), 자신의 신념이나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은 좋은 플레이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행동하는 사람은 어쩌면 인간 실격일지도 모른다. 골프 게임의 기본 에티켓 정신은 그렇게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1913년 US 오픈 사상 최초 노동자 계급의 아마추어 챔피언 '프랜시스 위멧'. 아마추어 골퍼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프랜시스 위멧 역시 이런 명언을 남겼다. 


"골프처럼 속이기 쉬운 경기도 없지만, 골프처럼 속인 사람이 경멸을 받는 경기도 없다."


인생도 그렇지 않은가.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처럼 속이기 쉬운 존재도 없다. 그 존재는 대부분 소중한 가족이나 연인, 친구나 이웃이지만, 무엇보다 가장 먼저 자신 (양심)이라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을 속인 사람만큼 경멸을 받는 인간도 없다. 


심지어 그런 삶을 살아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누군가는 그런 비열함을 매력이고 능력이라며 자랑하고 또 누군가는 그런 이들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런 어두운 세상 속에서 지혜롭고 훌륭한 인성을 갖춘 승리자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더 빛이 나는지도 모른다. 


어디에도 심판이 없다는 것은 다르게 표현하면 모든 곳에 심판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양심이 죽지 않는 한 심판은 언제나 우리와 동행한다. 이러한 삶의 통찰을 깨닫고 피, 땀, 눈물을 흘리며 꾸준히 성장하는 골퍼만이, 골프가 주는 참 기쁨을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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