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속물인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삼일팔 Feb 14. 2016

남을 의식하지 않음으로써
남을 의식한다

눈치보는 인간






우리는 대체로 ‘스스로 자신을 보는 것’보다 ‘타인이 우리를 보는 방식’에
따라 자신을 보는 것에 더 익숙해져 있다.

- 정지우, <청춘 인문학>, 209쪽






한적한 공간은 늘 좋다. 게다가 그 공간이 평소엔 모두를 위한 공공의 공간일 경우엔 더욱 그렇다. 늘 북적거리고 붐비는 공간을, 그곳이 잠시 한적해진 틈에 전유할 수 있다는 것은 퍽 매력적인 일니까. 추석 당일, 그래서 엄니를 모시고 동네의 호수공원에 찾아갔다. 마음 같아선 일산의 호수공원에 가고 싶었지만, 여유를 즐기자고 나선 나들이에 굳이 번거로움을 더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일산은 다리를 건너야 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김밥까지 싸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오후 두 시쯤 김포의 호수공원으로 향했다.



명절을 맞아 김포의 큰집을 찾은 외지인들, 그리고 우리처럼 명절임에도 어디로도 가지 않고 원래의 거주지에 남아 여유를 찾고 있는 김포 시민들이 공원을 산책하며 한가한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그늘이 져 돗자리를 펴기 알맞은 공간은 그런 사람들이 이미 선점한 상태였지만, 좀 더 걸어가자 다행히 적당한 벤치가 눈에 보였다. 등을 기댈 수 있는 벤치와 넓은 영역에 걸쳐 형성된 그늘이 있는 공간이었다. 근처엔 지나가는 사람들 외엔 우리 공간을 침범할 것 같은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행복한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얼마 뒤 자전거를 탄 일단의 무리가 우리 옆 벤치에 소란스럽게 정착했다. 리더는 그들의 아버지로 보이는 한 중년 남성이었고 그 아래로 10세 미만의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자전거를 끌고 모였다. 아버지의 손에 아이스크림 봉지가 있어서, 저것만 먹고 잠시 머물렀다 가겠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버지는 세 통의 통화를 시끌벅적하게 했고 아이들은 우리 돗자리 바로 옆으로 자전거를 끌고 다니며 연신 떠들었다. 



햇살과 바람 가득한 공원의 여유로운 오후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그 뒤로 또 한 팀의 돗자리가 우리 그늘 공간 바로 옆에 입주함으로써 엄니와 나는 이제 이곳을 떠날 때가 되었다고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서둘러 짐을 정리해 탈출을 감행했다. 자리를 잡은 지 한 시간이 조금 넘은 뒤의 일이었다. 사실 여기까지만 읽으면 흡사 무례하고 난폭한 유목민이 정착민을 탄압해 주객이 뒤집힌 억울한 사연처럼 읽힐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정주민인 나와 엄니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아버지와 일단의 무리가 온 뒤 엄니는 조금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셨는데, 그중 하나가 그때까지 듣고 있던 라디오의 볼륨을 세 칸 높힘으로써 상대방의 소음에 맞불을 놓는 것이었다. 사실 그보다는 불청객의 침입 따위 아무렇지 않다, 우린 이곳에 계속 있을 것이며 추호도 나갈 의사가 없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리라. 


나 역시 천연덕스럽게 책을 읽거나 정말 편한 자세로 누워 조는 등 엄니의 전략(?)에 동조했다. 나는 그 아버지의 무리를 의식하지 않음을 최대한 자연스럽고 확고하게 보여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지만 상대방이 우리를 ‘어라? 이것들 봐라. 만만한 상대가 아닌 걸?’ 하고 다른 곳으로 가지 않겠는가! 나는 상대방을 의식하지 않음으로써 상대방을 의식했다. 







엄니와 나는 부단히 그들을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 자체가 상대방을 의식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마 이런 나의 역설적인 행동에는 어떤 감정도 깔려 있을 것이다. 분노라는 감정 말이다. 분명 공원이라는 공간은 공중의 이익을 위한, 즉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공간이자 시민 누구나 와서 떠들든 자전거를 타든 술을 마시든 문제가 되지 않는 자유로운 공간이다. 하지만 나와 나의 엄니는 단순히 그 공간에 먼저 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뒤이어 우리 공간 바로 옆에 입주한 무리 또는 이웃에 대해 알 수 없는 적개감과 반발심으로 분노에 휩싸였으며, 라디오를 듣고 과도한 반응을 한다든가 상대방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든가 하는 식의 비정상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는 첫째, 더 큰 소음을 냄으로써 상대방의 귀를 자극해 다른 곳으로 축출시키려는 의도이자 둘째, 주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더욱 뻔뻔하게 행동함으로써 우리의 건재를 과시하고자 하는 의도가 빚어낸 결과였다. 어쩌면 그 아버지는, 혹은 뒤이어 돗자리를 편 가족들은 우리가 갑자기 자리를 떠난 이유를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들에게 투쟁했다는 사실을 포함해서 말이다.




우리는 왜 일어나지 일을 상상하며 괴로워하는가?



그렇다. 오늘 엄니와 나는 일어나지 않을 일, 즉 그들이 우리의 영역을 침범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과민한 반응을 보였다. 사실 오늘 공원에서의 일은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공간에서 날마다 자주 이런 일을 겪는가? 출근길 버스에서, 회식 자리에서, 캠핑을 가서, 동사무소에서 우리는 늘 나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남을 의식하고 눈치를 본다. 



남을 의식하는 것,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는 것. 어쩌면 그 둘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즉 타인을 향한 신경은, 원초적으로 말해서, 그가 나에게 어떤 위협을 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기인하는 것이며, 그 두려움의 근원은 바로 그 타인과 나 사이에 벌어질지도 모르는 어떤 사건—폭력, 분쟁, 갈등, 불화 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평생 겪어야 할 불필요한 행동들이자,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일 것이다. 이것이 내가 오늘 공원에서 눈치를 본 이유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