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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일팔 Mar 05. 2017

아침에 할 수 있는 일


아침에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다. 


매주 일요일(혹자에게는 주일엄니가 교회에 가면서부터 내 일요일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물론 언뜻 보기엔 큰 변화는 없다. 8시쯤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고 간단한 집안일을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밀린 글을 쓰고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들여보다 엄니가 오면 함께 아점을 먹고 또 같은 일들을 반복한다이것이 내 일요일이었고 지금도 비슷하다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엄니라는 관찰자가그러니까 TV를 보시면서도 내가 하는 일을 관찰하고그러다가 종종 참견도 하고종종 잔소리도 하던 엄니가 집에 없음으로 인해뭐랄까마음이 좀 더 편해지고 좀 더 다양하고 참신한 시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 엄니가 없는 오전은 일주일 중 유일하게 내가 집에서 나 혼자 오롯이 내가 하고 싶고할 수 있는 일들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이건 분명 좋은 일이다.

오늘은 9시에 눈을 떴다. 8시 45분쯤 엄니가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를 잠결에 들었다부스스 일어나 내 방 창문을 열었다방문을 닫고 자면 그렇잖아도 구리구리한 남자냄새(라고 적고 홀아비냄새라고 읽는다)가 방 안에 진동한다내친김에 베란다 문도 활짝 열고 대문도 활짝 연다우리 집은 베란다와 현관이 마주보고 있는데이렇게 두 문을 열면 바람이 오가며 안에 있던 공기를 싹 몰아낸다. 엄니 몰래 삼겹살을 구워먹을 때도 이렇게 문을 활짝 열면 냄새가 싹 사라진다대신 손과 발이 꽁꽁 언다





한 번 켜고 빨래할 것들을 빨래통에 집어넣는다일주일 내내 입었던 후드티화장실에 걸려 있던 수건한 번 더 신으려고 짱박아뒀던 양말찾다보면 끝도 없다일주일 동안 내가 이렇게나 많은 옷에 내 체취를 묻혔다니방문에 아무렇게 걸어놓은 외투들도 정리한다식탁 의자에는 어제 과감하게 구입한 패딩과 이번 겨울 내내 입던 패딩이 아무렇게나 걸쳐져 있다탁탁 털어 장에 넣는다식탁을 서성거리니 시야에 먹다 남은 온갖 주전부리가 눈에 들어온다먹던 건 입에 넣고 그나마 포장해 보관할 수 있는 건 따로 덜어내 냉장고에 넣는다냉장고에 먹나 남은 배가 있다세 조각입에 물고 역시 통은 설거지통으로

식탁 위에 쓸데없는 것이 사라지자 이번엔 꾀죄죄한 유리의 몰골이 들러난다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행주를 예쁘게 접어 싹싹 문지른다윤기 없던 유리가 쨍 하고 밝아진다기분이 좋다다시 장을 연다걸려 있던 겨울옷들을 꺼내 다시 옷걸이에 걸어둔다. 옷걸이 틀과 옷의 어깨선이 정확히 일치하도록. 세상에, 올 겨울에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이 이렇게 많았다니이걸 다 정리하려면 한 세월이다몇 년 전 첫 회사 면접 때 입으려고 구입한 양복도 걸려 있다저걸 입은 게 언제였더라괜히 심술이 나 츄리닝 잠옷바람에 정장을 걸쳐 거울 앞에 선다그때보단 살이 조금 빠져 옷이 살짝 크지만 그래도 운신이 편해 다행이다검정색 양복이니 저거 하나면 어디서든 소화 가능하다

대문도 연 김에 내 방 침대에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는 이불을 가져 나와 아파트 복도에서 탈탈 턴다눈에 보이진 않지만 묵은 먼지가 찬 공기에 다 날아가버렸으면 좋겠다베개에 깔아둔 수건도 빨래통에 던진다작년에 그렇게 뻔질나게 들고다녔으나 올해 한 번도 매지 않은 가방에도 뽀얗게 먼지가 쌓여 있어 역시 털어준다집안일을 하다보면 좁아터진 집구석에 쌓여 있는 수많은 잡동사니와 불편한 대면을 하게 된다고역이다내 돈 주고 산 것들인데 왜 이렇게 미워 보일까빨빨거리며 움직였더니 배에서 신호가 온다장 운동에 도움이 되었나기분 좋은 신호다이런 배변은 금방 끝난다마음의 짐을 덜어낸 뒤 빨래통에 있던 빨래감을 세탁기에 집어넣는다티슈로 된 세재를 쓰는데지난번 세탁 때 한 장만 넣으니 깨끗한 냄새가 나지 않아 이번엔 과감하게 두 장을 넣는다




이제 다 했나아니다설거지도 해야지안 신는 신발도 신발장에 넣자달력은 왜 아직도 1월인가기분 좋은 소리가 정신을 깨운다. 찢은 종이는 접어 신발장 위에 올려둔다이따 나갈 때 버려야 할 재활용 쓰레기가 제법 모였다분명 어제 분리수거 했는데

이제 베란다 문과 현관문을 닫고 거실에 서서 스트레칭을 한다두 다리를 벌리고 앉아서 허리를 굽혀 손끝을 발 끝에 갖다 댄다물론 무리다손 끝에 발목 부근에 이르자 입에서 곡소리가 나온다몸이 왜 이렇게 뻣뻣할까. 내 건강함이 어느 정도인지 직감할 때가 몇 있는데바로 이렇게 스트레칭을 하며 안 쓰던 근육을 쓰고 안 굽히던 곳을 굽히고 안 피던 곳을 필 때가 바로 그때다고작 이까짓 동작에 몸이 고통스러워 몸부림친다는 사실이 참담하다이럴 때면 내가 목각 인형 같고 이대로 몸을 방치했다간 언젠가 몸이 송장처럼 굳어질까봐 두렵다어서 여름이 와서 뙤양볕 아래에서 땀을 흘리고 싶다

대충 스트레칭을 마치고 집 안을 둘러본다약 1시간 전 침대에서 나와 바라본 풍경과 그리 달라진 것은 없다식탁 유리가 좀 더 반짝일 뿐이고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공기의 파장을 규칙적으로 흔들고 있을 뿐이다집안일이란 이런 것인가신경 써서 보지 않으면 잘 안 보이지만굳이 찾아내 끄집어내면 끝도 없는 것들나는 일요일 아침에 그중 아주 일부를 해치웠을 뿐이다엄니가 돌아와 내가 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을까아마 그럴 것이다그녀는 평생 이런 일을 해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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