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프로젝트 50 #48-49
이 세상의 선과 악에는 적당한 균형이 있는 것일까? 악은 늘 존재했지만, 지난 몇 년간 엽기적이고 끔찍한 범죄가 늘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매체의 발달로 사건·사고에 관한 소식을 더 빠르고 자세하고 다양하게 접한 이유도 있다. 선보다 악이 더 많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저 그런 소식이 빨리 퍼지기 때문일까, 아니면 정말 악이 더 많기 때문일까?
일본 추리소설의 대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편지>과 <방황하는 칼날>을 읽었다. 분명 연결되는 소설도 아니고, 같은 주인공이 나오는 시리즈도 아니지만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의 서로 다른 면을 보여주는 이야기라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었다.
우리는 흔히 피해자와 그 주변인들에게 더 쉽게 공감한다. 내 주변인이나 내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거로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혹시 내가 저런 일을 당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과 내 주변 사람들을 잃으면 얼마나 슬프고 화가 날까 하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방황하는 칼날>은 이런 피해자의 입장을 처절하게 엿볼 수 있는 소설이다. 중학교 동창이자 고등학교를 중퇴한 아쓰야, 가이지, 마코토 세 소년은 여자를 납치해 강간하고 비디오를 찍어 협박하며 그걸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니는 불량배들이다. 불꽃축제를 보고 귀가하던 소녀 나가미네 에마는 이 세 사람에게 납치당해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아쓰야와 가이지는 본인들이 늘 하던 나쁜 짓에 약물까지 추가로 사용하게 되고, 결국 에마는 사망한다. 에마의 아버지는 딸이 살해당한 것을 발견하고 범인을 찾아 복수를 결심한다.
이 소설은 일본에서 2004년 출간되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의 흡입력은 여전했다. 나는 소설 속으로 빨려 들어가 경찰이 되기도 했다가, 에마의 아버지가 되기도 했다. 슬퍼하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잠시 희망을 보기도 했다. 소설을 읽으며 지난 몇 년간 한국에서도 큰 화두였던 소년법과 n번방 사건 같은 일들이 계속 떠올랐다. 주목받던 사건들도 법원의 판결은 늘 너무 가볍게만 느껴진다. 시간이 많이 흘러도 해결되지 않는 질문이 가득하다. 판사가 판결한 형량을 채우면 죄악은 없어지는 것인가. 소년법은 처벌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갱생을 위한 것인가. 갱생은 어떻게 완성되는가. 경찰이 수호하는 것은 정의인가 법률인가. 피해자와 남겨진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 질문을 받으면 비교적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편지>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범죄를 바라본다. 츠요시는 고등학생 때부터 이삿짐센터에서 일을 하며 어린 동생을 먹여 살렸다. 몸을 쓰는 일만 하다 몸이 망가져 돈벌이가 힘들어졌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바람처럼 동생 나오키는 꼭 대학에 보내겠다는 마음으로 돈을 구하기로 했다. 몇 년 전 이삿짐센터 일로 방문했던 집의 주인 할머니 집을 털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살인을 해 감옥에 갔다. 동생 나오키는 살인자의 동생이 되어 취직도 진학도 모두 힘들어졌다. 나오키는 본인이 잘못한 것은 없지만, 가해자의 가족이라는 낙인이 찍혀 연좌제의 피해자가 된다.
나오키가 겪는 차별은 불공평해 보인다. 안타깝고 무기력해진다. 오히려 나오키가 이런 차별의 피해자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도 소설에서는 가해자나 범죄를 옹호하지는 않는다. 사회가 죄 없는 나오키, 범죄자의 동생을 이렇게 기피하고 차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아주 차갑게 보여준다. 사람들도 이런 차별을 하면 안 된다는 사회적 인식을 가지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살인자의 가족과는 얽히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다. 가까운 사람이 연좌제로 낙인이 찍히고 차가운 대우를 받으며 고통받는 사실을 범죄자가 알아서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도 그가 치러야 할 죗값이라는 말이 나온다. 츠요시가 저지른 범죄의 피해자는 피살당한 할머니 한 사람이 아니다. 나오키가 포기해야 했던 꿈과, 나오키를 포기해야 했던 사람과, 아내와 아이들까지 모두 피해자다. 평소 들어본 적이 없던 가해자 가족이 겪는 일들, 그리고 진정한 속죄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소설보다 더 무서운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는 2023년에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하는 소설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