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 북풍과 함께 들려온 전설 같은 이야기
제16화 ― 북풍과 함께 들려온 전설 같은 이야기
드디어 구시대가 저물고 신시대가 열리려는 순간이었다.
귀성군과 남이는 북으로 향했다.
남이장군은 붉은 깃을 단 창을 세웠고 그 뒤를 유자광이 따랐다.
눈 위를 밟을 때마다 군화 밑에서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가 낮게 깔렸다.
“유 부장.”
남이가 말을 걸었다.
“이번 출정 같이 동행하게 해 주라고 주상께 상소까지 올렸다 들었네. 내게 말했었도 충분했을 일을 굳이 왕에게 상소까지 할 이유가 있었나?”
유자광은 잠시 말을 고르더니 담담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에는 묘한 결기가 있었다.
“장군께는 송구하지만… 이번만은 제 손으로 제 길을 열고 싶었습니다. 저는 얼자출신 입니다. 주상에게 저를 각인시켜 제 이름으로 공을 세워야 합니다. 공신이 되어 얼자출신 굴레를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남이는 그 말을 듣고 짧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엔 비웃음도 연민도 없었다. 단지 ‘그 마음을 안다’는 고요한 수긍이 담겨 있었다.
함길도 경성 근처, 눈 덮인 평야.
이시애 군사는 정규군이라 부르기 어려운 무리였다. 농민, 도적, 그리고 굶주린 자들. 그러나 그 수는 파도처럼 많았다.
남이는 정면 돌파를 택했고 유자광은 우익 기습대를 맡았다.
“기습은 밤 셋 시. 적의 우측 산줄기에서 공격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유자광은 고개를 숙였다.
그날 밤, 유자광은 예정된 시간보다 조금 일찍 산을 넘었다.
유자광은 조급했다.
‘조금이라도 먼저 피를 본 자가 역사를 쓴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횃불이 타오르고 눈 위로 화살이 스쳤다. 병사들이 함성을 지를 때, 유자광은 누구보다 앞에 서 있었다.
“조정을 거스른 죄, 목으로 갚아라!”
유자광의 칼끝이 불빛을 가르며 날았다. 그 순간 적장의 눈이 번쩍 뜨이고 다음 순간 그 목은 눈 위에 떨어졌다.
핏물이 눈에 스며들며 붉은 꽃잎처럼 퍼졌다. 그 밤, 반란군의 진은 허물어졌다.
계유년 초겨울, 함길도 북방의 한 산성 앞.
서리가 내린 흙바닥에는 이미 피가 스며 검붉게 얼어붙어 있었다. 짧은 비명, 갑옷과 칼들이 부딪히는 금속성 울림, 그리고 얼어붙은 공기의 무게.
모든 것이 전쟁이었다.
유자광은 산성 입구 좌측에 무릎을 붙이고 있었다.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으나,
그 속에서는 끊임없는 계산이 흐르고 있었다.
오른쪽 창병 셋, 왼쪽 돌출부 사수 둘, 아직 뒤는 공격 안 들어왔다…
그리고 그때, 산 아래서 들려온 절규가 공기를 찢었다.
“남이 대장이 포위됐다!”
그 한마디에 유자광의 시야가 번개처럼 흔들렸다. 돌무더기 너머 붉은 깃발이 쓰러지는 게 보였다. 그 아래 남이 부하들이 무너지고 있었다.
유자광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의 질주는 전투가 아니라 한 사람을 향한 도약이었다.
화살이 유자광 관자놀이를 스쳤고 살결이 찢겼다.
피가 흘렀으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유 부장—!”
남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움이 아니라 경고였다.
“뒤쪽—!”
유자광은 곧장 감지했다. 적 심장 고동이 도둑고양이 발걸음처럼 다가오는 것을.
적이 짧은 도검을 들고 옆구리를 노렸지만 유자광은 이미 그 움직임을 알고 있었다. 유자광은 반 발 물러서며 칼을 비틀어 올렸다. 피와 함께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다섯… 여섯… 열 명이 포위하고 있다.’
그 순간, 남이가 보였다.
피범벅이 된 얼굴, 무릎은 꺾이고 방패는 부서져 있었다.
그리고 남이 등 뒤로 적 창병 하나가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유자광은 모든 감각을 닫았다.
오직 한 방향만 남았다
‘남이를 살린다.’
“장군! 고개 숙이십시오!”
남이는 본능적으로 몸을 낮췄다.
그 찰나, 유자광 몸이 창병 눈앞을 스쳐 지나가며 무릎으로 적의 복부를 찍었다. 창이 튕겨 나갔고 적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곧이어 도끼가 뒤에서 날아들었다.
유자광은 남이를 끌어당기며 몸을 틀었다. 도끼는 옆 바위에 박히고 유자광은 적의 팔을 잡아 어깨 관절을 비틀어 꺾었다.
유자광이 숨을 내쉴 때 눈발이 흩날리며 그 위로 고요가 내려앉았다.
“괜찮으십니까?”
“젠장… 다리가 좀…”
남이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남이의 피는 눈 위로 천천히 번졌다.
유자광은 허리를 굽혀 남이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지금 나가야 합니다. 저에게 기대십시오.”
그때, 적들이 멈췄다.
그들은 싸움을 멈추고 유자광을 바라보았다.
한 거친 짐승이 눈에 불을 켠 채 그들 앞에 서 있었다.
그들 시선 속엔 공포와 경외가 섞여 있었다.
‘저 자, 감히 저 틈을 뚫고 나왔다.’
그러나 유자광의 눈빛엔 오직 하나의 명령만 남아 있었다.
‘살려야 한다. 그것이 이 전투의 이유다.’
유자광은 눈빛으로만 적의 중심을 무너뜨렸다. 한 발 내딛자 핏방울 이 튀고, 길이 열렸다.
유자광을 뒤늦게 따라온 병사들 이 그 틈을 뚫고 들어올 때쯤, 유자광은 이미 남이를 안전한 곳까지 이끌고 있었다.
남이는 자광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내가 유 부장 덕에 산 것을 잊지 않겠다.”
유자광은 고개를 숙였다.
눈발 사이에서 그의 목소리가 낮게 흩어졌다.
“저는 늘, 언젠가 목숨을 맡길 전우가 있길 바랐습니다. 오늘 알았습니다. 그 이름이 장군이었음을.”
남이는 말없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손끝은 차가웠지만 그 안엔 살아 있는 열이 있었다.
멀리서 북풍이 불어왔다.
하늘은 잿빛으로 흐리고 눈발이 조용히 흩날렸다.
그러나 그 속에서 두 사람 그림자는 또렷했다. 전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나, 그들의 믿음은 이미 한 시대의 서막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