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 북풍은 사그라들고
제17화 — 북풍은 사그라들고
함길도의 매서운 북풍이 산천을 덮을 때, 남이와 유자광이 이끄는 선발대의 승전 소식은 한양 땅과 귀성군부대 주둔지도 뒤흔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눈발이 흩날렸다.
이시애는 함흥성 성루 위에 서 있었다. 그의 어깨 위에 쌓인 눈송이는 흰 재처럼 차갑고 무거웠다.
“중앙 조정은 우리를 백성으로 여기지 않는다. 우리는 한양의 노예가 아니다!”
쇳소리 같은 그의 목소리가 눈 덮인 들판을 울렸다. 그 말에는 피보다 뜨거운 분노가 배어 있었다.
조정은 언제나 남쪽사대부를 먼저 세웠다. 변방을 지켜온 공로는 잊히고, 함길도의 백성들은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짓밟혔다.
이시애는 그 모멸의 세월을 칼날처럼 간직한 사내였다.
이시애는 칼을 굳게 쥐었다.
“내가 함길도의 이름을 되찾겠다.”
그의 뒤에는 수천 명의 병사들이 따랐다. 눈보라 속에서도 그들의 눈빛은 붉게 타올랐다. 하늘은 회색으로 무겁게 내려앉았고 깃발 위엔 눈과 피가 엉겨 붙어 있었다.
이시애의 외침은 두만강의 바람을 타고 번졌다. 함길도 전역에서 호족들이 호응했고 백성들이 모여들었다.
이시애 군세는 눈처럼 쌓여 삽시간에 수만으로 불어났다.
조정은 난을 진압하기 위해 귀성군 이준을 보냈다. 귀성군은 태종의 직계후손으로, 25살 밖에 되지 않은 젊지만 신중하고 냉철한 장수였다.
귀성군의 눈빛은 싸움보다 마음을 읽는 자의 것이었다.
귀성군은 함경도의 눈 덮인 산맥 앞에서 말을 멈췄다.
“불의가 분노를 낳고 분노가 피를 낳는구나.”
귀성군의 말은 바람에 실려 흩어졌다.
조정은 귀성군에게 무력으로 제압하라 명했으나 그는 다른 길을 택했다.
“반란군도 다 우리 백성이다. 칼로 꺾기보다 마음을 꺾는 법을 쓰자.”
귀성군은 포로가 된 이시애의 부하를 풀어주며 조용히 말했다.
“너희 대장은 너희를 위해 싸우는가, 아니면 자신의 이름을 위해 싸우는가?”
"이시애는 새 궁궐을 세우기 위해 너희들 피를 이용하는 것뿐이다. 이후 너희들은 이용당하고 버려질 것이다."
"역적 이시애에게 충성하느니 내게 오라. 너희 고향과 가족을 지키고 싶다면.”
그 말은 눈송이처럼 가볍게 떨어졌으나, 칼보다 날카롭게 이시애 부하들 가슴을 파고들었다.
이시애 진영 안에서는 귀성군 이 말들이 눈발처럼 흩날라며 서서히 녹아들며 균열을 만들었다.
밤마다 이시애 부하들은 서로의 얼굴을 의심하며 칼을 감추었다.
“귀성군이 우리 안에 첩자를 넣었다 한다!”
진영 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시애는 그 말을 듣고 천막을 박차고 나왔다.
“누가 귀성군의 말을 믿는단 말이냐! 우리가 아니면 누가 이 땅을 지키겠는가!”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그의 부하들은 눈 속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발자국은 깊게 남았으나 금세 바람에 덮였다.
귀성군은 서두르지 않았다.
조정에서 수차례 공격 명령이 내려왔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적의 칼을 꺾으려 하지 말라. 그들의 믿음을 꺾어라.”
귀성군은 겨울이 지나 봄이 오기를 기다렸다.
얼어붙은 마음은 칼이 아니라 오직 시간이 녹인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눈이 스러지고 흙냄새가 세상에 스며들며, 봄기운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귀성군은 서두르지 않았다. 봄조차 졸음에 겨운 듯 비틀거리다 어느덧 여름문턱으로 달아난 어느 날,
이시애의 진영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귀성군은 묵묵히 그 연기를 바라보다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제, 때가 되었군.”
이시애의 그날 밤은 길고 무거웠다. 후방에 보낸 전령도 답이 없었고 보급도 끊겼다. 그의 장수들은 이시애 눈을 피했다.
“왜 소식이 없느냐! 왜 침묵만이 돌아오느냐!”
그때, 불길이 성문을 뒤덮었다.
귀성군의 정예부대가 밀려들었고 진영은 혼란에 빠졌다.
이시애가 가장 믿던 장수 이흥문이 이시애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주군… 이제 그만하십시오. 더 이상은 못하겠습니다.”
이시애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시애는 분노하여 칼 끝을 이흥문을 향했다.
“내가 조정에 무릎 꿇을 바엔 이 땅에 묻히리라.”
그 순간, 주위 이시애 병사들 칼끝이 이시애를 향해 돌아섰다.
귀성군의 선발부대가 성 안으로 밀려들었고 말발굽소리가 성안을 진동시켰다.
이시애는 귀성군 앞으로 끌려갔다.
이시애는 맨 땅에 무릎을 꿇으며 웃었다.
“허허…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세상도 얻지 못하는 법이구나.”
귀성군이 다가와 말했다.
“그렇다. 네가 무너진 건 칼 때문이 아니라 사람 때문이다.”
이시애는 마지막으로 웃었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칼보다 어려운 법이지.”
그 말이 끝나자 칼날이 번쩍였고 땅 위에 붉은 피가 번졌다. 바람이 불어와 주위 나뭇잎들이 피를 함께 덮었다.
이시애의 난은 그렇게 끝났다.
귀성군은 함길도의 질서를 회복시켰고 조정은 그에게 공을 내렸다.
그러나 귀성군은 전장에 남은 폐허를 오래 바라보았다.
“반란은 언제나 마음에서 비롯되는 법이로구나.”
귀성군의 낮은 목소리가 함길도 거센 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그 바람 위로는 마치 이시애의 피가 스며든 듯한 낙엽이 느리게 흩날렸다.
북풍은 사그라들고 이윽고 여름의 열기가 천천히 세상을 덮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