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홍소설- 조선의 아이돌 18

제18화 신공신의 봄, 그리고 겨울의 시작

by 초롱초롱 박철홍

제18화 신공신의 봄, 그리고 겨울의 시작


세조 13년, 초여름

이시애의 난이 막 진압되었다.

전란의 먼지가 채 가시기도 전에, 궁궐은 벌써 새로운 이름들로 술렁였다.


귀성군, 남이 그리고 유자광

젊은 피의 장수들이 반역의 불길을 꺼뜨리고 돌아왔고 왕은 그들에게 공신의 녹을 내렸다.

귀성군, 남이는 일등공신, 유자광은 삼등공신에 올랐다.


세조는 그들 젊음이 좋았다.

그들에게서 한때의 자신을 보았다. 무쇠처럼 단단하고, 바람처럼 빠른 결단.


얼마 지나지 않아 스물여덟의 귀성군이 영의정이 되었고, 스물일곱의 남이는 병조판서 자리에 앉았다. 유자광은 병조 전랑 자리에 올랐다.


온 조정이 숨을 삼켰다.

조선 오백 년 역사에 이런 젊은 정승과 판서는 없었다.


백성들은 그들을 신공신이라 불렀다. 시전에서는 그들의 용맹을 노래하는 가요가 돌았고 거리의 아이들은 ‘남이 장군놀이’를 하며 웃어댔다.


조선의 거리가 젊은 피로 들썩였다. 그 셋은 조선의 아이돌로 불릴만했다.


그러나 궁궐의 공기는 달랐다.

세조의 기력은 날로 쇠해지고 있었다. 세조 온몸은 썩어갔고 기침은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피 섞인 가래가 왕의 옷깃을 적셨다.

가끔은 세조 눈빛이 멀어져 그 앞에 무릎 꿇은 신하조차 알아보지 못했다.


그 틈을 노려 원로훈구 대신들이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한명회와 신숙주가 있었다.


정희왕후는 밤마다 근심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남편 주상이 젊은 신공신들에게 지나친 총애를 보이는 것이 불안했다.


“세자가 아직 스무 살도 안 되었는데… 저 젊은 자들이 이대로 정권을 쥔다면 왕권은 어디로 가겠는가.”


왕후의 목소리는 겨울밤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소혜왕후 또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남편 의경세자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어린 아들 월산군과 자을산군만 남았다. 그녀는 귀성군과 남이의 눈빛 속에서 알 수 없는 불온함을 느꼈다. 충성이라기보다는 야망에 가까운 열기였다.


소혜왕후는 깊은 고민 끝에 시어머니 정희왕후와 상의하였다.

나라의 앞날이 불안하고 세자의 장래 또한 위태로운 시국이었다.


다음 날, 소혜왕후는 조용히 한명회를 불러 비밀리에 만났다.


얼마 전, 세자의 부인이자 한명회의 딸이 돌연 세상을 떠난 일이 있었다.

그녀는 바로 그 점에 주목하였다.


한명회는 계유정변을 주도하며 권세의 중심에 선 인물이었다. 지금의 위태로운 형세를 타개할 방책은 그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다고 소혜왕후는 판단했다. 게다가 세자비의 죽음으로 한명회 또한 새로운 왕실의 연줄이 절실할 터였다.

소혜왕후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마침 자을산군이 혼인할 나이가 되었으니, 한명회의 다른 딸과 혼인시켜 왕실과의 끈을 다시 잇는 것이 좋다고 제안했다.


한명회는 그녀의 뜻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두 집안은 다시 혼인으로 엮이며 더욱 굳은 연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불안과 계산의 기운은 결국 세자에게까지 전해지고 말았다.


세자는 지금 상황이 어지러웠다.


“귀성군이나 남이 이들만이 훗날 내 곁에 남는다면…”


세자의 손끝이 떨렸다.


“원로 대신들보다 더 큰 골칫덩이가 될 것이다.”


한명회는 정희왕후, 소혜왕후, 세자 그들의 마음속에서 오래 기다리던 냄새를 맡았다.


기회였다.


며칠 뒤, 세조의 병세가 깊어지고 정신이 흐려지자 한명회는 조용히 상왕 침소를 찾았다.


그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전하, 지난 계유정난을 기억하시옵니까.

그때 김종서와 황보인이 어린 노산군을 등에 업고 나라를 쥐락펴락하였습니다.

그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우리는 피를 흘렸고, 그리하여 지금의 전하께서 계십니다.

그러나 지금, 그때보다 더 위험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세조의 흐릿한 눈빛이 미동했다.


“귀성군과 남이… 젊고 용맹하지만, 권력이 한 곳에 모이면 불행을 부르는 법입니다.

지금 균형을 잡지 않으면 세자가 즉위한 뒤 변란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권력에는 나이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귀성군은 왕위에 가까운 혈통이고 남이는 왕실의 피와 닿아있는 외척입니다.

부디 통촉하시옵소서.”


한명회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말끝마다 독이 묻어 있었다.


세조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한명회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구나.’


그날 밤, 세조는 오랜 기침 끝에 숨을 고르며 창밖을 보았다. 하늘에 매화 한 송이가 남아 있었다. 그는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꽃이 피면, 지는 것이 도리로다…”


정희왕후가 세조의 손을 꼭 잡았다. 세조는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었고 그 미소는 피처럼 붉은 달빛 속에서 천천히 사라졌다.


다음 날, 조정에는 조용한 명이 내렸다.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정사는 한명회와 신숙주 등 원로대신들과 상의해 행하도록 하라.>


궁궐은 숨을 죽였다.

귀성군과 남이는 그 소식을 듣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결국… 우리도 토사구팽이군요.”


남이가 낮게 말했다.


귀성군은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에는 피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우리가 너무 빨랐던 거야. 세상은 아직 젊은 피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지.”


잠시 말이 끊겼다.

남이는 느릿하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잿빛 구름 사이로 타는 듯한 여름의 열기가 무겁게 쏟아졌다.


세조가 다음 날 승하했다.


“왕은 가고, 신하들은 남는다…”


귀성군의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흩어졌다.


“하지만 언젠가 또 다른 젊은 피가 조선을 흔들겠지.”


그날, 조선의 하늘은 겨울의 색이었다.


그리고 젊은 신공신들의 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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