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홍소설- 조선의 아이돌 19

제19화 남이의 불꽃, 그리고 유자광의 고뇌

by 초롱초롱 박철홍

제19화 남이의 불꽃, 그리고 유자광의 고뇌


세조의 장례가 끝난 지 한 달.

조선의 하늘은 여전히 흐렸다.

궁궐 회랑마다 검은 비단이 바람에 스치고, 그 아래로는 또 다른 그림자가 기어들고 있었다.


한명회는 이미 모든 인사권을 움켜쥐었고, 신숙주는 그의 말로 세상을 움직였다. 대신들은 그들의 눈빛을 살피며 고개를 숙였다.


젊은 피는 조정 밖으로 밀려났다.


귀성군은 고향으로 내려갔다. 정빈이 그를 따라 갔다.


남이는 병조판서에서 물러나 이름뿐인 관직을 지켰다. 더 이상 병조에는 칼의 냄새가 남아 있지 않았다.


밤마다 남이는 검을 꺼내 들었다.

달빛 아래서 칼끝을 들어 하늘을 찔렀다. 그 찰나의 빛 속에 세조가 그에게 내렸던 말이 되살아났다.


“남이야, 너는 나라의 칼이 되어라.”


이제 그 칼은 칼집 속에서 녹슬어가고 있었다.


그 무렵, 조정에는 소문이 흘렀다.

남이가 병조의 군졸들을 모아 비밀 훈련을 시킨다는 이야기였다.


한명회는 그 소문의 근원을 알고 있었다. 바로 그가 던진 한 마디가 모든 걸 시작시켰다.


“젊은 장수의 검은 언젠가 왕의 목을 겨누게 마련이지.”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소문은 물처럼 번졌다.


정월의 어느 밤, 남이는 유자광을 불렀다.


서리가 흩날리고 하늘에는 꼬리 긴 혜성이 걸려 있었다. 붉은 꼬리빛이 한양의 지붕 위를 불길하게 물들였다.


사람들은 흉조라 수군거렸고 유자광의 가슴 또한 그 붉은 불빛처럼 흔들렸다.


남이와 무과시험을 본 후 처음 남이를 만났을 때, 그는 얼자 출신의 자신을 ‘형제’라 불러주던 사람이었다. 남이는 언제나 자광을 얼자출신이라 낮추지 않았고 함께 전장을 달리던 벗이자 형이었다.


그런 남이의 집 대문 앞에서 유자광은 한참을 서 있었다. 문고리에 닿은 손끝이 차가웠다.


‘이 문을 열면 나는 누구로 남게 될까. 남이의 형제로, 아니면 이제 막 공신이 된 유자광으로.’


마당에는 남이가 서 있었다. 군인답게 꼿꼿한 자세로 혜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불빛이 남이의 검은 눈에 파고들었다.


“자광, 자네도 봤는가. 저 하늘의 별을.”


“예, 장군. 요즘 도성 사람들이 혜성 얘기를 많이 합니다.”


남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옛 기록에 그랬지. 나라의 기운이 흔들릴 때 저런 별이 나타난다더군. 지금이 바로 그렇지 않은가. 권세는 몇몇에게 쏠리고 젊은 무사들은 설 자리를 잃었어.”


유자광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한명회의 말이 울리고 있었다.


‘남이가 혜성을 말하며 나라의 운을 걱정했다더군. 그 말을 주상께 전하면 주상께서 자네의 충절을 잊지 않으실 걸세.’


“장군, 이런 말씀은 삼가시옵소서. 요즘 조정의 눈과 귀가 예민하옵니다.”


남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웃음에는 쓸쓸함이 섞여 있었다.


“그래, 자네 말이 옳지. 하나 자네라면 알잖나. 나는 내 군사들에게 거짓을 말하지 못하네. 싸움으로 나라를 세웠는데 이제는 말로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이 판을 치니… 이 나라 참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지 않은가?”


유자광은 대답하지 않았다.

남이의 등 뒤 벽에 비친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림자는 둘이었으나 흔들리는 등불 아래 세 개처럼 겹쳐져 있었다.


남이가 낮게 말했다.


“자광, 나는 자네가 변치 않길 바란다. 출신이 어떻든 자넨 곧은 자였지. 그 곧음이 나라를 지탱하는 기둥이네. 그걸 잃지 말게.”


그 말이 칼날처럼 자광의 가슴을 베었다. 유자광은 손을 움켜쥐었다. 피가 손금 사이로 스며 나왔다.


‘잃지 말라… 하지만 나는 이미 잃었는지도 모르지.’


남이가 다시 한번 하늘을 올려다봤다. 혜성의 꼬리는 더욱 붉게 번져 있었다.


“자광, 세상이 변해도… 형제의 뜻은 잊지 말게.”


남이는 다시 한번 자신에게도 다짐하듯이 나직이 말했다.


그 말이 어찌 이리 잔인하게 들릴까. 자광은 문밖으로 물러나 깊이 절했다.


“장군의 뜻,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그 절은 형제에게 바치는 절이 아니었다. 자광 스스로의 결단을 굳히기 위한 마지막 인사였다.


밖으로 나오자 찬 바람이 얼굴을 베었다. 자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혜성은 밤하늘을 가르며 피 묻은 칼처럼 붉게 타올랐다.


‘장군, 그대는 하늘을 보았지만 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하늘의 뜻은 멀고 사람의 뜻은 가까우니… 나는 그 길을 따를 뿐입니다.’


눈발이 살며시 스쳤다.

그 눈송이는 차가우면서도 어딘가 뜨겁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이 밤이 지나면 나는 어디로 가게 될까.”


자광은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힘이 없었다.


남이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그동안 자신을 따뜻하게 품어주던 한명회의 오른팔, 허종의 집으로 향했다.


하늘 위 혜성은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그러나 그 불빛은 훗날 남이가 목이 베이던 그 아침조차, 유자광의 눈앞에서 꺼지지 않고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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