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고뇌의 끝에서, 유자광의 잔인한 선택 (마지막 편)
제20화 고뇌의 끝에서, 유자광의 잔인한 선택 (마지막 편)
차가운 밤바람이 유자광의 얼굴을 스쳤다. 흔들리는 눈동자 너머로, 그의 마음은 무거운 두 갈래 길 위에 놓여 있었다.
누군가의 충신이 될 수 없는 자신 그리고 얼자출신이라는 족쇄가 그를 죽음의 문턱까지 몰아넣었다.
내면에서는 배신의 고통과 두려움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휘몰아쳤다.
“내가… 남이를 배신한다면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 되는 걸까?”
유자광은 손끝으로 턱을 어루만지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머릿속에는 남이와 함께했던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고난을 함께 견뎌내며 쌓아 올린 형제 같은 우정, 그리고 희망.
하지만 지금 남이는 역적이 될 위기에 처했다. 그를 배신하지 않는다면 둘 다 어둠 속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자광은 이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살아남고 싶었다.
다음 날, 그는 한명회의 최측근 허종을 만났다. 허종은 항상 그랬듯이 변함없는 따뜻한 미소로 자광을 맞이했다. 허종은 자광의 흔들리는 마음 이야기를 다 듣고 눈빛은 차갑고 단호해졌다.
“자광아, 네 마음이 흔들리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싸움은 이미 끝이 정해져 있다. 남이는 결국 역모죄로 몰릴 수밖에 없어. 맨 위선부터 주상까지 모두 그 길을 정해놓았단다.”
유자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를 배신해야만 하는 겁니까?”
허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남이의 역모를 고하지 않으면, 너도 함께 소용돌이에 휘말려 죽게 될 거다. 네가 직접 주상께 아뢰면 공신이 될 기회가 생기겠지. 침묵한다면 역적의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유자광의 심장은 터질 듯 요동쳤다.
도대체 왜 모두들 남이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걸까?
자광이 아는 남이는 진정한 사내대장부였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고, 자부심이 강했으며, 싫고 좋음이 분명했다. 타고난 기질이 그랬다. 누구에게도 함부로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옳다고 믿는 일이라면 그 상대가 윗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가리지 않았다.
부하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따뜻한 인물이었지만, 윗사람들에게는 거칠고 불편한 존재였다.
그래서였을까. 그에게는 늘 적이 많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훈구대신들에게 남이보다 더 눈엣가시가 되어야 할 사람은 귀성군이었다. 하지만 귀성군은 남이와 달랐다. 부드러웠고, 윗사람들과도 잘 어울렸다. 한명회나 신숙주 같은 권신들과도 허심탄회하게 웃으며 말을 섞을 줄 알았다.
그 차이일까?
아니면 남이는 귀성군과 달리 왕족이 아니라 외척이라는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 때문일까?
자광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뒤엉켰다.
의리와 생존, 정의와 권세가 뒤섞여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긴 고심 끝에 그는 결심했다.
‘이유불문 어쨌든 살아남아야 한다. 이 길이 비록 고통스럽고 외롭더라도 얼자출신 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나 내 길을 찾아야 한다.’
허종이 덧붙였다.
“철저히 해야 한다. 자광아, 너라면 남이 역모를 고하는 증인으로서 가장 신뢰받을 수 있다. 늦기 전에 결단을 내려라. 너는 공신이 될 수 있다.”
그날 밤, 유자광은 벽을 응시하며 손톱을 깨물었다. 끝없는 고뇌가 그를 삼켰다. 또 한 번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얼자출신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 하지만 이 죄책감은 견딜 수 있을까…’
며칠이 지나자, 유자광의 눈빛은 달라졌다. 흔들리던 두려움은 차갑고 냉정한 결의로 바뀌었다. 배신을 결심한 순간 그의 내면에 무서운 무언가가 깨어났다.
두려움에 휘둘리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무기로 삼아 자신을 지키려 했다.
“이제 감정을 배제하자. 철저하고 냉철하게 움직여야 한다.”
유자광은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자광은 더욱 확실하게 움직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거꾸로 무고로 더 큰 위험이 닥칠 수도 있었다.
그 순간, 문득 남이가 백두산에서 지은 시가 떠올랐다.
자광의 배신은 잔인했지만 생존을 향한 어쩔 수 없는 절박한 몸부림이었다.
白頭山石磨刀盡 (백두산석마도진)
豆滿江水飮馬無 (두만강수음마무)
男兒二十未平國 (남아 이십 미평국)
後世誰稱大丈夫 (후세수칭대장부)
백두산의 바윗돌은 칼을 갈아 소진하고,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라.
장부 인생 이십 세에 천하를 평정하지 못한다면,
후대에 누가 대장부라 칭하리오.
유자광은 시 속 ‘平’을 ‘得’으로 바꾸었다.
한 글자의 변경이었지만 남이의 시는 역모의 완벽한 증거가 되었다.
스무 살 남이가 쓴 시는 그만큼 위험했다.
자광은 시의 숨은 의미를 왜곡했고 역모 증거는 더욱 강력해졌다. 단 한 글자가 바뀌자 시 속 우국열정은 차갑고 무자비한 음모의 증거로 뒤바뀌었다.
“이것이 내가 살아남는 길이다.”
자광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왜곡된 시는 이미 배신자의 도구가 되어 있었다.
유자광의 얼굴은 굳어졌다. 한때 흔들리던 눈동자는 사라지고 오직 냉철한 결단만 남았다.
다음 날, 유자광이 남이의 역모를 고했다.
남이는 스물여덟의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순간부터 사람들은 자광을 두려워했고, 조선의 사대부들은 그를 더 이상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자광은 알았다.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얼자출신으로 살아간다는 건 외롭고 잔인한 길임을.
앞으로 더 한 어려움이 있을 거라는 것을.
그러나 그 잔혹한 배신의 선택 속에서야 비로소 죽음이 아닌 생존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남이의 배신자가 된 순간, 그의 가슴속 고뇌는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그 강철은 흔들림 없는 발걸음을 지탱했고, 자광은 다시 걸었다.
뒤돌아보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걸음으로.
어둠 속에서 스친 차가운 바람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광 스스로 단련한 냉철함의 기운이었다.
마치 얼음 밑을 흐르는 깊고 고요한 강물처럼 자광은 묵묵히 자신의 길을 냉정하게 개척해 나갔다.
역적의 굴레를 벗어나 잔혹한 시대를 살아내는 자로서.
화려했던 조선의 아이돌 봄날은 그렇게 무자비하게 저물었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새로운 서막이 조용히 시작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