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지금도 흐른다 901
초롱초롱 박철홍의
지금도 흐른다 901
ㅡ 구슬을 꿰는 시간 ㅡ
나는 오랫동안 글을 써 왔다.
돌이켜보면 내 삶의 많은 순간을 글과 함께 건너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별히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뚜렷한 보상을 기대한 적도 없었다. 다만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순간마다 나는 글을 붙잡았다.
그렇게 쌓인 글만 놓고 보면 적지 않다. 컴퓨터 속에는 수십 년에 걸쳐 써 내려간 글들이 저장되어 있다. 그러나 그 많은 글 가운데 세상 밖으로 나간 것은 드물다.
문예지에 신인수필가로 두 차례 당선된 일이 있고, 정치적 행사로 책으로 묶인 글들이 몇 권 있을 뿐이다. 이마저도 내가 써 온 글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글은 써 두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글 또한 선택되고 묶여 세상과 마주할 때 비로소 제 값을 한다.
나는 역사대하소설을 쓰는 것이 꿈이었다.
그 꿈을 안고 내가 살고 있는 담양에서 매년 열리는 ‘송순문학상’을 향해 소설 한 편을 정성껏 완성해 두었다. 오랜 시간 심혈을 기울여 공모에 특화시켜 담양출신인 <송순과 전우치>를 비롯해 담양과 얽힌 다양한 인물들이 멋진 담양풍경 속에서 살아 숨 쉬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예고도 없는 느닷없이 공모방침이 바꾸어지면서 '소설' 부문은 아예 제외되고 '시'로만 한정되었다.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나는, 써온 소설을 세상에 내놓을 기회조차 잃었다.
마치 길을 따라 묵묵히 나아가던 배가 갑자기 정박지를 잃고 허공 위에 멈춰 선 듯한 허탈함과 아쉬움이 마음 깊이 스며들었다.
그럼에도 담양의 바람과 햇살, 골목과 산자락 속 이야기들은 내 안에서 여전히 속삭이고 있다.
내놓지 못한 글자마다 아쉬움 그림자 드리우면서도, 담양풍경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조용히 그러나 끊임없이 노래처럼 번져간다.
나는 이 소설을 다시 다듬어 다른 공모전에 준비 중이다.
이후 나는 두 편의 소설을 더 완성했다. 쓰는 일은 멈추지 않았지만 완성된 작품들이 아직 갈 곳을 찾지 못한 채 머물렀다.
그러던 중 문득 깨달았다. 이제는 더 이상 글을 쌓아 두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올해 초부터 나는 이미 써 놓은 글들을 꺼내 읽고, 여러 문학상 공모요강에 맞춰 고치고 덜어내고 다시 써 내려갔다. 컴퓨터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 공모 절차 하나하나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과정 또한 글쓰기의 일부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믿는다. 어떤 글이든 세상과 마주할 때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고. 설령 혼자만을 위해 쓴 일기라도 언젠가는 세상 밖으로 나와야 진정한 기록이 된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가 그랬듯이.
지금까지 내 글쓰기가 축적의 시간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선택과 완성의 시간이다. 막연히 쓰는 데서 그치지 않고, 발표와 공모를 염두에 두고 한 편의 글을 끝까지 책임지는 시간이다.
결과를 미리 알 수는 없지만, 준비하지 않은 상태로 머무르지는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내가 이 나이에 이토록 글에 집착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 가운데 가장 많은 진정성과 노력을 투자한 일이 바로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한때는 명함에 나름 여러 화려한 직함이 적혀 있던 시절도 있었다. 이제는 그 명함들이 모두 사라졌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명함을 하나 만들고 싶다. 다른 어떤 수식도 필요 없다.
그저 <작가 박철홍>이라는 이름만 적힌 명함.
재능은 타고나는 것이고, 누구에게나 한계는 있다.
나는 글쓰기에서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살아온 시간만큼은 글로 차곡차곡 쌓아 왔다. 그 경험과 분량만큼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다.
이제 나는 내 글을 세상 앞에 내놓고 싶다. 문학상 공모라는 공식적 자리에서 내 글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 확인받고 싶다.
이 나이에 품기에는 다소 늦은 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늦었다는 이유만으로 내려놓기에는 너무 오래 이 길을 걸어왔다.
흩어진 구슬을 하나씩 꿰는 시간은 오래 걸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 일을 미루지 않기로 했다.
내 꿈은 여전히 초롱초롱하게 현실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