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까치설 그리고 ‘이중과세’의 기억

초롱초롱 박철홍의 지금도 흐른다 902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지금도 흐른다 902


ㅡ 설날, 까치설 그리고 ‘이중과세’의 기억 ㅡ


설 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2026년 병오년 새해, 모두의 가정에 건강과 평안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설날은 단순한 휴일이 아닙니다.

한 해 첫머리에서 조상과 하늘에 안녕과 풍요를 빌던 오래된 약속입니다.


그 기원은 농경사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음력 1월 1일, 사람들은 제를 올리고 한 해의 무사를 빌었습니다. 삼국과 고려를 지나 조선에 이르러서는 유교적 질서 속에서 차례와 세배가 정착했고, 떡국 한 그릇에 한 살을 더하는 의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떡국을 나눌 때 더하는 것은 나이만이 아닙니다.

시간을 이어받는 일입니다.


설이 오면 누구나 한 번쯤 흥얼거리는 동요가 있습니다.

윤극영이 지은 ‘설날’입니다.


“까치까치설날은 어저께고요…”


왜 '까치설'은 어제일까요.


까치설은 섣달그믐, 곧 설 전날을 이르는 말입니다. ‘작은설’을 뜻하던 ‘아찬설’이 세월을 건너 ‘아치설’을 거쳐 ‘까치설’로 굳어졌다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뜻은 흐려졌지만 발음은 남아 이름이 되었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전합니다. 신라 '소지왕'이 까치 도움으로 화를 면하자, 그 은혜를 기려 설 전날을 까치 날로 삼았다는 설화입니다. 길조로 여겨지던 까치 울음처럼 한 해를 앞둔 설렘을 담은 이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설은 한때 ‘어제의 명절’로 밀려날 뻔했습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는 양력 1월 1일을 ‘신정’, 음력설을 ‘구정’이라 불렀습니다. 이름부터가 위계였습니다.

새것과 낡은 것, 앞선 것과 뒤처진 것이라는 암시였습니다.


그들이 내세운 논리는 ‘이중과세(二重過歲)’였습니다.

새해를 두 번 쇠는 것은 낭비라는 주장.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절약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시간 기준을 바꾸는 일은 삶 질서를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명절을 옮긴다는 것은 기억 축을 옮기는 일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공식달력에서 밀려난 음력 설은 사적인 풍습으로 낮춰졌습니다.

그러나 민심은 달력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음력 1월 1일에 차례를 지냈고, 세배를 올렸습니다.


금지되지는 않았지만 권장되지 않았던 명절. 그 모호한 경계 속에서도 우리 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한동안 양력설 중심 정책은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다 1985년, 전두환 정부에서 음력설은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공휴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름은 여전히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1989년, 노태우 정부에서 비로소 ‘설날’이라는 본래 명칭을 회복합니다.


관습으로는 이어져 왔지만, 공식 이름을 되찾기까지는 거의 한 세기가 걸렸습니다.


명절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사라질 뻔한 건 이름이었습니다.


‘설’의 어원은 하나로 정리되지 않습니다.


‘낯설다’에서 비롯되었다는 설,

‘선날’이 변해 새날을 뜻하게 되었다는 설,

몸가짐을 삼간다는 옛말 ‘섧다’에서 나왔다는 설.


해석은 다르지만 공통점은 분명합니다.


새해 첫날, 스스로를 새롭게 하라는 뜻.


들뜨기보다 가다듬으라는 뜻.


설 아침, 아이들 손에 쥐어지던 세뱃돈은 단순한 용돈이 아니었습니다.

‘복돈’이라 불렸습니다.

복을 나눈다는 의미였습니다. 예전에는 복주머니에 덕담을 적은 종이를 넣어 주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우리는 먼 친척집까지 세배를 다녔습니다.

세뱃돈이 목적이었을지 몰라도, 지금 돌아보면 그날 분위기는 돈보다 컸습니다. 집집마다 다른 떡국 맛, 어른들의 덕담, 그리고 묵은해를 건너 새해로 들어서는

산뜻한 기운.


설은 단절의 날이 아니라,

시간을 건너는 의식이었습니다.


이제 ‘이중과세’라는 말이 사라진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남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 고유 명절로 민족정기마저 빼앗으려 했던 일제 만행.


이제 우리는 우리 고유 전통의 시간으로 새해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달력은 바뀌어도 우리의 기억은 바뀌지 않습니다.


설날 아침, 떡국 그릇 위로 김이 오릅니다. 그 김처럼 우리 삶의 시간도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지워지지 않고, 이어지며, 다시 시작됩니다.


가족과 함께하는 설 명절,

모두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ㅡ 초롱박철홍 올림 ㅡ

월, 화, 수, 목, 금,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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