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 전 총리 서거가 남긴 질문 ㅡ공정, 세대, 그리

초롱초롱 박철홍의 지금도 흐른다 900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지금도 흐른다. 900


ㅡ 이해찬 전 총리 서거가 남긴 질문 ㅡ

(공정, 세대, 그리고 다음 개혁의 설계)


2026년 1월 25일, 이해찬 전 국무총리(이하 이해찬)가 베트남 출장 중 급작스러운 건강악화로 별세했다. 향년 73세. 상대적 젊은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 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줄 알았다. 각계에서 그의 공헌을 기리는 애도가 이어지고 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해찬은 단순한 정치인 죽음을 넘어 한국사회가 지난 30여 년간 축적해 온 '민주화'와 '공정담론'을 다시 성찰하게 만드는 상징이다.


이해찬은 1970년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운동권 학생들 선두주자로, ‘민청학련 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김대중 평민당총재 시절 영입되어 선거전략 핵심참모로 활동했다.


김대중정권 시절에는 교육부장관으로서 교육개혁을 주도했다.


노무현 대통령 대선출마를 강력 권유하고 당선전략을 진두지휘 하며 ‘친노의 좌장’으로 불렸다.


노무현정부 초기 제6공화국 역사상 최초로 실질적 책임총리 역할을 수행했다.


문재인정부 시절에는 여당대표로서 2016년 총선에서 사상 최초 180석 대승을 이끌었다.


이재명 대통령에게도 실질적 정치 멘토로 평가된다.


이재명정부에서 생전 마지막 자리 '민주평화통일자문회 수석부의장'으로 활동하며 한반도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힘썼다.


이해찬은 대통령이 되지는 못했지만, 민주정부 4명의 대통령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대통령을 제외하면 사실상 모든 정치적 역할을 경험한 점에서, 그는 JP 김종필과 비견되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 내가 쓸 이야기는 그의 정치적 업적보다 그가 남긴 사회적·세대적 질문이다.


특히 '이해찬세대'(1999년부터 2001년 사이에 고등학교에 입학한 1983년~ 1985년 생 말함)라고 불리는 교육과 관련된 문제이다.


1998~99년, 이해찬 교육부장관 시절 추진된 '교육개혁'은 <시험 중심 교육을 줄이고, 학생 성장과 과정을 평가하자>는 이상에서 출발했다.


수행평가와 생활기록부 확대는 단순암기와 점수경쟁에서 벗어나 창의적 교육을 실현하려는 시도였다.


1982년 12월,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에 연루되어 투옥 중, 이해찬이 외동딸 이현주 양 3번째 생일 직전에 보낸 편지 내용이다.


"아빠는 현주가 학교에 다니는 모습을 자주 그려보곤 한단다. 엄마 아빠가 학교 다니던 때와는 달리 현주의 학교생활은 훨씬 자유롭고 재미있을 거야. 그때쯤에는 세상도 훨씬 좋아지고 자유로워질 테니 말이야."


나 또한 내 자녀에게 보낸 편지는 아니지만 이 비슷한 생각을 칼럼으로 기고한 적이 있다.


그 내용 중 일부이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저는 미국 L.A. 의 고등학생을 다룬 드라마 '비버리 힐즈의 아이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드라마 속 학생들은 자유롭게 학교를 누비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고, 그 모습은 제게 커다란 부러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제 중·고등학교 시절은 그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답답하고 억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믿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자라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에는 저 때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다채로운 학교 생활을 누리며, 취미와 경험을 마음껏 탐색할 수 있으리라고. 당시 막 출범한 전교조가 외치던 ‘참 교육’ 이상도 저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제 자녀가 중·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저는 놀라움을 넘어 안타까움 느꼈습니다. 오히려 내 시절보다 더 억압적이었고, 자유롭게 취미 즐길 시간은 거의 없었으며, 학교 생활은 훨씬 더 힘겹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꿈꾸었던 이상과 현실 사이 간극은, 생각보다 훨씬 깊고 냉정했습니다.]


이해찬 전 총리 이름은 앞서 말했듯이 한국사회에서 여러 맥락으로 기억된다.


그중 가장 뜨거운 논쟁을 불러온 것은 1998~99년 교육부 장관 시절 추진한 '교육개혁'이었다.


나 또한 당시 이해찬을 가장 잘 기억하고 싶다. 난 당시 이해찬 나이가 많은 줄 알았는데 50이 안 된 40대 중반이었다.


당시 이해찬이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타난 바처럼, 그는 “아이들이 시험지옥에서 벗어나 더 자유롭고 다양한 경험 누리길 바랬다.”


그러나 현실은 이상과 달랐다.


현장은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고, 평가기준은 모호했으며 교사재량 커졌지만 이를 통제할 투명한 규칙과 검증장치는 부재했다.


특히 교사들은 자기들 재량을 공정하게 쓸 준비도 안 되었고 그럴만한 자질도 없었다.


당시 전교조도 학생들 구조적 교육문제보다 자기들 신분에만 더 집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학입시 구조, 사교육 시장, 지역·학교 간 격차도 동시에 조정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해찬 교육개혁은 학생과 학부모에게 혼란과 불신만 남겼다.


비록 결과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 어떤 정권도 감히 시도하지 못했던 교육개혁을 이해찬이 추진했다는 점에서 나는 큰 점수를 주고 싶다.


이 시기를 학생으로 통과한 세대, 이른바 ‘이해찬세대’는 바로 이 경험을 통해 '공정' 의미를 학습했다.


공정은 결과가 아니라 절차와 규칙의 명확성, 예외와 재량의 통제, 설명 가능성에서 출발한다.


노력과 무관하게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경험은 이후 한국사회 공정담론 핵심기억 으로 자리 잡았다.


'조국사태'가 거기에 불을 질렀고 이제 학부모가 되어있던 이해찬세대가 조국사태에 가장 분노했다.


그리고 이번 '이혜훈' 청문회가 그런 공정 상실을 또 한 번 보여주며 기획재정장관후보 에서 낙마했다.


오늘날 'Z세대'(일반적으로 1995년 이후 태어난 세대를 일컷음)는 구조적 불평등과 결과 정의를 강조하며 공정을 논한다.


반면 '이해찬세대'는 절차와 검증 가능성을 먼저 묻는다.


이런 차이는 가치관 우열이 아니라 각 세대가 처음 마주한 불공정 형태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해찬세대에게 불공정은 눈에 보이지 않는 교사재량과 모호한 기준에서 비롯되었고, Z세대에게 불공정은 구조적·사회적 격차 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공정논쟁이 수십 년 동안 표류해 온 근본 이유는 공정정의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세대마다 서로 다른 실패 경험 위에서 서로 다른 언어로 공정을 이야기해 왔기 때문이다.


각 세대 기억을 이해하지 않은 채, 공정을 단순한 도덕이나 정치구호로 환원하면 갈등은 반복된다.


이제 한국사회가 공정을 논할 때, 단순히 ‘모두에게 똑같이’라는 이상보다는 '누구도 속았다고 느끼지 않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필요한 원칙은 명확하다.


<절차의 투명성, 재량의 통제,

사전규칙 기반조정, 책임구조>


이 원칙은 교육뿐 아니라 채용, 복지, 행정전반에 적용될 수 있다.


이해찬 전 총리 교육개혁 실패는 단순한 개인실수로 볼 수 없다. 선의에 기대어 설계된 제도가 어떻게 불신을 낳았고, 그 불신이 세대를 관통해 사회적 기억으로 남는지를 보여준 사례다.


이해찬 정치경력과 세대적 유산을 함께 볼 때, 그의 삶은 한국 현대사 역동성을 압축한다.


민주화운동, 집권여당 전략, 교육개혁, 세대공정 형성까지, 모든 것이 서로 얽혀 있다.


이해찬 전 총리 죽음은 단순한 추모를 넘어, 한국사회가 공정과 개혁을 다음 세대에게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라는 질문을 남긴다.


다음 개혁은 누구의 기억 위에 설 것인가?


그 개혁은 세대별 경험을 반영하고, 절차와 책임을 설계하며, 재량과 예외를 통제하고, 누구도 속았다고 느끼지 않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이해찬 전 총리가 남긴 가장 현실적이고 날카로운 질문이 될 것이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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