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지금도 흐른다! 825
초롱초롱 박철홍의 지금도 흐른다! 825
—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 <동양평화론> —
어제는 광복 80주년이었습니다.
얼마 전 ‘우리시대 최고 문장가’로 불리는 소설가 '김훈' 장편소설 '하얼빈'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출간 직후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 했고, 영화로도 제작되어 상영 되었습니다. 배우 '현빈'이 주연을 맡았죠. 저는 책은 읽지 않았지만 영화를 보았는데, 제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아 개인적 으로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김훈작가는 젊은 시절, 일본인 검찰관과 법관들이 '안중근'의사, 동지들을 심문하며 남긴 신문조서 ·공판기록들을 보고 엄청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후 소설가가 된 뒤 안중근에 관한 작품을 쓰고 싶었지만, 자신이 없어 미루다가 이제야 완성했다고 고백합니다.
저는 김훈 소설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을 읽었습니다.
'칼의 노래'를 처음 읽었을 때, 간결하면서도 현미경으로 들여다 본 듯 세밀한 묘사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김훈이 기자출신답게 현장과 배경 인물들을 표현하는 글들이 소설 제목처럼 ‘칼’ 같이 날카롭고, 동시에 ‘노래’처럼 능란 했습니다.
다만 '남한산성'에서는 뛰어난 문장력에도 불구하고 역사해석 에서는 저와 다른시각이 상당부분 느껴졌습니다.
'하얼빈'은 아직 책으로는 읽지 못했지만, 누군가 서평을 인용 하면 이렇습니다.
['하얼빈'은 ‘동양평화’라는 대의를 실현하기 위해 안중근을 비롯한 인물들이 선택한 길을 옳고, 그름 으로 재단하지 않는다.
'다만 스스로 신념을 지키려 한 그들 모습'은 각자가 만든 명장면 속 에서 순수하게 빛난다.]
<다만 스스로 '신념'을 지키려 한 그들 모습> 에서라는 말 속 그들 '신념'은 무엇이었을까요?
안중근이 먼 타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이하 이토)를 암살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가 바로 그들 신념인 <동양평화론>,
즉 <대동아공영론> 때문입니다.
흥미롭게도 안중근과 이토, 두 사람 모두 <동양평화론> 구호를 외쳤습니다. 겉보기에는 같았지만 속 뜻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둘 다 “밀려오는 서양 세력에 맞서기 위해 한·중·일 3국이 뭉쳐야 한다”는 주장을 했지만,
그 방향은 완전 달랐습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한중일 각 국가가 열등하거나 우월하지 않고 각자 특색을 갖고 각기 역사적으로 의존 및 투쟁을 반복하면서 성장해왔다.
그러다 어느 한 쪽이 한 쪽을 지배하는 형상을 가졌을때는 한중일 균형이 무너져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 갔다.
또한 한 쪽 힘이 증대되면 한쪽은 연합해 한 쪽을 견재하는 그런 저울같은 관계였다.
한중일 이 세 나라가 힘의 균형을 가지기 위해서는 한중일 누구도 외세에 영향 받지 않고 자존할 수 있게 힘의 균형을 가지면서 평화 를 추구해야 한다.] 것이었습니다.
안중근은 이를 위해 <조선의 영세중립국> 지위도 주장 했습니다.
사실, 이 사상은 중국 손문(쑨원) 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후 '국민당'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념에도 반영되었습니다.
이에 비해 이토의 '동양평화론'은
[한ㆍ중ㆍ일은 오랜 세월간 서로 전쟁을 반복하며 각축전으로 얼룩져 왔다.
그리고 이 3국 중 항상 패권국인 중국이 3국을 주도 해왔다.
그런데 이제는 중국이 그 힘을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그 위치를 누군가 대신해야 한다. 그리고 패권국이 서양 세력에 맞서 3국을 평화로 이끌어야 한다.
즉 중국은 한 물 갔으니 이제 일본 이 이 3국을 주도해 나가겠다.]
이토가 이 주장을 펼칠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에서 연이어 승리하며 '조선'을 장악했고, 만주 진출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이토는 겉으로는 ‘평화’를 말했지만, 실상은 일본 중심 패권구상이었습니다.
안중근은 이토 속셈을 꿰뚫어 보고,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거사를 결행했습니다.
안중근은 이토 얼굴조차 모른 채, 10미터 이상 거리에서 세 발을 정확히 명중시켰습니다.
혹시 이토를 잘못 짚었을까 봐 옆 수행원에게도 세 발을 쏘아, 여섯 발 모두 빗나감이 없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이토가 죽기 전 “누가 쏜 것이냐”고 묻자 ‘조선인’이라고 하자 “빠가야로!”(바보같은 자식)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토는 자신이 제거되면 일본 군부 강경파가 곧바로 조선을 무력 합병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거사 이듬해인 1910년 8월, 경술국치(한일합방) 단행 되었습니다.
이토는 군사적 힘만 가지고는 조선과 중국을 영원히 속국으로 만들 수 없다보고 '대동아공영론' 이라는 그럴싸한 더 큰 명분을 내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토 생각이 일본군국주의자 들 보다 훨씬 더 치밀하고 무서운 계획이었습니다.
안중근은 그런 이토 속셈을 간파 했던 것입니다.
안중근 의거가 없었더라도 합병은 어차피 불가피했을 것입니다.
시간은 조금 더 걸렸을 것이지만, 더 교묘하고 더 참담한 방식으로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한일합방은 시간이나 방법 문제 였지 일본에게는 기정사실화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이토는 '을사늑약'과 '정미7조약'을 통해 조선 통치권 을 완벽하게 가져 간 상태였기도 했습니다.
이토는 겉으로나마 조선 왕실과 백성 모두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모습을 기다리며 일본군부를 자제 시켜왔던 것입니다.
이토의 이런 마음 속을 알게 된 안중근은 나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대한제국 ‘장군’ 자격으로 일본 적장(敵將) 이토를 처단한 것이었습니다.
안중근 의거가 없었다면 조선 멸망은 더 초라하고 비참했을 것입니다.
나라를 빼앗긴 우리나라 치욕은 안중근으로 인해 자존심이나마 지킬 수 있었습니다.
안중근은 거사 성공이후 행적은 더 빛났습니다.
재판장에서 당당하게 그는 암살자 아니라 조선장군으로서 일본과 전쟁 중 적군 장수를 사살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안중근은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도 한국의용병 참모중장, 나이 31세로 자신을 밝혔습니다.
거사 동기에 대한 질문을 받자 이토가 대한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평화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관 자격으로 총살 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님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안중근은 자신을 일반 살인피고가 아닌 전쟁포로로 대우해주기를 주장했습니다.
안중근의 당당하고 논리적 태도는 일본인 재판관과 검찰조차 감탄 하게 했습니다.
변호인 미즈노는 안중근 행위가 “오해에서 비롯된 행동이라 해도, 조국에 대한 충정에서 나온 것 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변론 했습니다.
1910년 2월 14일에 안중근은 사형을 선고받았고, 한 달 뒤인 3월 26일 오전 10시, '여순감옥' 에서 순국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안중군 사형선고일 2월14일을 발렌타이 데이로만 알고 있습니다. 안중근의사가 알면 지하에서 통곡할 일입니다.
안중근 '동양평화론'은 120여 년이 지난 오늘, 한·일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바로 1년 전, 광복절 경축사 때만 해도, 전 정권에서는 독립지사들 까지 이념적으로 갈라치는 듯한 발언들을 해 속이 답답했는데, 어제 (2025년 8월 15일) 광복 80주년 경축사에서는 이재명 대통령 발언을 듣고는 마음이 한결 놓였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한일 관계라는 ‘뜨거운 감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거를 직시하되 미래로 나아가는 지혜”를 강조하며, 일본을 “경제 발전의 중요한 동반자”로 언급했습니다.
물론 “일본 정부가 과거의 아픈 역사를 직시하고 양국 간 신뢰가 훼손되지 않게 노력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요구는 빼놓지 않았습니다.
이는 안중근이 꿈꿨던 ‘상생의 동양평화’와 닮아 있습니다.
지난 날 일본이 우리에게 저지른 만행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일본을 단지 우리나라를 빼앗았던 영원한 원한 대상으로만 보지 말아야 합니다.
일본을 이웃으로 같은 마당을 함께 쓰며 미래를 함께 설계할 동반자로 인식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지하에 잠들어 있는 ‘동양평화론’을 부르짖던 안중근 의사가 흐뭇하게 미소 지을 수 있는 길일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것은 일본이 과거를 진정으로 되돌아보고, 반성하며 한일관계를 미래로 향한 새로운 길로 이끌겠다는 확실한 의지를 보여줄 때 가능한 일이 될 것 입니다.
— 초롱 박철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