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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본주 Nov 26. 2019

꿈꾸는 사람들은 모두 청춘이다

영화<변산>과 <8마일>속 청춘별곡(青春别曲)

영화 <변산>은 청춘영화다. <동주>,<박열>등으로 우리에게 잘알려진 이준익 감독 작품이다. 이 두편의 전작과 <변산>을 합쳐 이준익 감독의 청춘 3부작이라 할만 한다.  <박열>이 불덩이처럼 뜨겁게 살아간 아나키스트의 청춘을 다루었다면 <동주>는 비극적인 시대를 살아가는 문학청년의 꿈과 절망을 보여주었다. 이에 반해 <변산>은 거대 담론이 사라지고 개인의 실존이 최우선으로 떠오른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청춘은 인생의 봄이다. 봄날 청춘은 뜨거운 여름 하늘 같은 미래를 꿈꾼다.

그래서 청춘은 가장 절망하는 시기다. 큰 꿈은 현실과 간극을 더 크고 깊게 만들기 때문이다. 꿈이 높고 이상이 광대하다고 실력을 인정해 주진 않는다. 젊고 열정이 있기에 다 가능할 것 같지만 젊고 경험이 없기에 불가능하다. 청춘이 절망하는 이유는 바로 이 <청춘 역설>에 있다.

모든 청춘이 절망하지는 않는다. 꿈이 없다면 절망할 이유도 없다. 절망은 꿈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다.

"솔!  너 그럴때 있냐?, 졌다 싶을때...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 이야."  (8마일-지미) 2018년 개봉작  <변산>을 보면 자연스럽게 2003년 개봉작 미국 래퍼 에미넘의 자전적 영화<8마일>이 떠오르게 된다. 비슷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시공간과 인종을 달리 하지만 청춘이 느끼는 불행감은 비슷하다. 백인슬럼가에서 살아가는 지미에게 세상은 지옥이다. 자신과 가족을 버린 아버지, 철없는 엄마와 컨테이너에서 살아가는 그를 지탱시키는건 야근수당을 벌 수 있는 기회와 랩이다. 이 세상의 대다수는 자신을 비웃고 자신을 위해주는 친구 몇이 지미의 세상의 전부다. <변산>의 주인공 학수도 공교롭게 래퍼다. 랩은 청춘들의 현대적 주술같다. 주술처럼 현실과 세상에 독설을 던지고 비아냥거린다. 그래서 래퍼는 무당이다. 무당이 굿을 하면서 자신을 객관화하고 매개자로 소리를 전하듯 학수는 랩을 하면서 자신을 불행과 분노를 매개자인듯 전할 뿐이다. 학수는 가끔 드러나는 사투리의 흔적마저 지우고 싶어할 만큼 자기 과거를 부정한다. 랩을 통해 자기앞의 현실에 분노하지만 어디 래퍼만 그러겠는가?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 기도하거나 혹은 무당을 찾아 굿하듯 꿈과 현실의 간극을 다른 그렇게 부정하고 싶어 한다.   내 고향은 폐항, 너무나 가난해서 보여줄 것은 노을 밖에 없네.  (변산-학수) 시인이 되고 싶었던 학수는 자기 시를 교생에게 도둑질 당한다. 깡패 아버지는 불쌍한 어머니와 지신을 내팽겨쳤다. 개인적 분노는 이내 고향에 대한 분노로 바뀐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주차관리 하며 래퍼 생활을 병행하지만 늘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랩은 막히고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8마일>의 지미도 그렇다. 편한 친구들 앞에서 그의 랩은 최고이지만 무대에서면 흑인 일색의 랩세계에서 백인이라는 것이 컴플렉스로 작동한다.   <변산>의 학수는 물론 <8마일>의 지미에게도 랩을 진정 살아있는 주술로 만든 순간은 일상의 분노의 시간이 아니었다. 진짜 랩은 창작된 분노가 아니라 살아있는 슬픔과 분노의 체험뒤에 등장했다.

백인이 랩을 한다고 비웃는 흑인래퍼들, 음반 내준다던 사기꾼, 자신을 배신한 여자친구 등의 일련의 사건들을 겪고서야 지미는 백인 루저인 자기 존재에 대한 분노를 막힘없는 랩으로 쏟아낼 수 있게 된다.

학수에게 변산은 슬럼이나 마찬가지다. 자신이 아버지에 대한 분노, 변산에 대한 절망감으로 자신의 랩을 만들어 왔지만 그 랩이 진정한 분노였는지에 회의감이 생긴다. 결국 자신이 증오가 진짜 증오가 아니며, 아무리 부정해도 사랑하고 미워하는 모든 자산이 변산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현실을 인정하자 학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진정한 랩을 구사할 수 있게 된다. 무릇 슬픔, 고통과 분노의 감정이 뚝뚝 떨어지듯 생생한 언어란 절망의 바다 밑바닥에서 길어 올린 것들임이 분명하다.    값지게 살진 못해도 후지게 살지는 말어  (변산-선미) 변산을 표현 하던 ‘폐항’이라는 단어처럼  한국사회는 거대한 폐항일지도 모른다. 헬조선이라는 말은 괜히 나왔을까? 절망은 아프리카 가난한 나라 흑인이나 미국 하층민 흑인, 시카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슬럼가에 백인도 살 듯 국경을 넘은 지구상 어느 나라에도 슬럼이 있고 절망은 있다.

누구나 값진 인생을 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선택된 듯 세상을 사는 1%의 사람들도 값진 인생을 찾는데 실패하기도 한다. 현실 앞에 절망하지 않는 사람들은 몇이나 되랴.

그러므로 실패했다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 지금 현재 값진 인생을 살지 못한다고 망가질 필요는 없다. 인생에 있어 실패는 흙이고 절망은 거름이다. 첫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완성 되듯 청춘은 절망함으로써 완성된다. 실패와 절망 없이 이루어진 꿈이 있던가? 현실에서 실패와 절망감을 한 번도 겪지 않고 완성된 꿈이란 사상누각이다. 꿈꾸는 청춘은 아름답다. 단지 젊다는 이유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꿈이 있기 때문이다. 꿈이 있기에 절망도 있다. 열정의 불꽃과 절망의 눈물이 어우러져 있기에 아름다운것이다. 꿈이 없다면 청춘이아니다. 그러므로 꿈꾸는 사람은 모두 청춘이라 말 할 수 있다. 나이도 상관없다. 실패는 아프고 절망은 슬프다. 하지만 실패는 끝이 아니고 절망은 새로운 희망의 시작점이다. 그 이유는 영화 속에서 선미가 대신 답해준다.  

‘슬픈 것이 저리 고울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슬픔이 아니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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