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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기영 Apr 10. 2018

동백꽃 지다

제주 4.3을 기억하며

4월 3일. 그 날 제주에 있었다.


일부러 계획하지는 않았는데 4월 3일이 있는 주에 제주여행을 왔다. 눈을 들면 화사한 벚꽃이 만발해 있고 거리 곳곳에는 꽃 채로 떨어진 동백꽃이 흩뿌려져 있었다. 70주년 기념 추도식 뒤의 여파가 남아 있는 제주 4.3 평화기념관은 단체관람을 온 학생들로 가득했다.


제주 4.3. 민주항쟁, 폭동, 사건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 역사에 대해 나는 잘 알지 못했다. 이런 일이 왜 발생했는지 그 피해 규모는 어떠했는지 몰랐다. 제주 4.3은 아직 제대로 된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희생자 가족들조차도 빨갱이로 내몰릴까 무서워 쉬쉬하며 지내왔다고 한다.

4.3 평화 기념관에서 마주친 메모
4·3 특별법은 제주 4.3 사건을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8년의 기간 동안 불타버린 집이 4만 동에 이르고 84개의 마을이 사라졌다. 공식적으로 집계된 사망자는 1만 245명, 행방불명 3575명, 후유장애를 겪고 있는 희생자가 164명에 이른다. 이중 78%가 미군, 국방경비대, 제주경찰, 서북청년단 등으로 이루어진 토벌대에 의해 희생되었고 13%가 남로당(남조선노동당)이 주축이 된 무장대에 의해 희생되었다. 정확하게 파악된 숫자가 이 정도이고 실제 희생자 수는 3만 명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제주 주거민의 1/10 가량이 희생된 것이다. 국가권력에 의한 집단 학살과 무장대의 보복에 의해 수많은 양민이 희생되었다.


좌익도 우익도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마구잡이로 죽여 버리는, 완전히 미쳐버린 세상 - 4.3 유족의 회고中

강점기 때 일본은 청년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하고 곳곳에 자살 특공대용 잠수정을 숨겨 놓는 등 제주도를 군사요새처럼 이용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지만 우리는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했다. 38선을 경계로 북쪽에서는 소련군, 남쪽에서는 미군에 의한 군정이 시작된 것이다. 제주도에 주둔했던 6만 6천여 명의 일본군은 해방 뒤에도 한 달 동안 잔류하며 계속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군이 철수하고 미군이 들어오면 일제 부역자들을 처단해 줄거라 생각했지만 미국은 오히려 친일파 경찰을 적극 등용했다. 일본으로 끌려갔던 제주도민 6만 명이 되돌아오면서 인구가 급증하게 되자 식량과 물자도 부족해졌다. 이로 인해 미군정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불신과 불만은 쌓여만 갔다.


평화기념관 벽면. 희생자들의 절규가 들리는 듯 하다.


그러던 중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서 경찰과 민간인이 충돌했다. 기마경찰이 어린이를 치고 사과도 없이 가버리자 성난 군중이 돌을 던지며 항의한 것이다. 이를 폭동으로 오인한 경찰이 총을 쏘아 민간인 6명이 사망했다. 이때 희생자 중에는 15살 어린이와 젖먹이를 안은 여인도 있었다고 한다. 분노한 제주도민들이 경찰서로 쳐들어 가자 경찰서에서는 도민을 향해 기관총을 겨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제주신보 기자들이 양쪽을 말리며 사태를 수습했다. 하지만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9일 뒤 3.1절 발포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제주도민이 총파업을 한다. 이후 육지에서 수많은 응원 경찰과 서북청년단을 제주도에 내려보냈다. 서북청년단은 반공정신이 투철한 이북 청년들로 결성이 된 단체인데 수많은 제주도민을 잡아다가 고문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이승만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고 김구 등은 이에 반대하며 남북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한다. 남쪽의 김구, 김규식 등은 북쪽의 김일성, 김두봉 등과 통일정부 수립을 논의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1948년 5월 10일에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가 치러지게 된다.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는 "남한 단독선거"와 "공권력의 폭력"에 반대하며 무장봉기가 시작된다. 남로당이 주축인 좌익 무장대와 군경, 서북청년단 등으로 이루어진 우익 토벌대와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던 중 4월 28일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9 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이 만나서 평화적 해결을 위한 협상을 한다. 단독정부 수립 반대, 응원경찰 철수 등에 대해 합의하고 산으로 도망갔던 무장대가 귀순하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경찰은 귀순자를 향해 사격을 가한다. 이에 항의하던 김익렬 연대장은 미군정에 의해 보직해임이 되고 이후 토벌 위주의 정책이 전개되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총선거가 시작되었지만 제주 주민들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투표를 거부한다. 주민들은 강제투표를 피하기 위해 당일 산에 올랐다가 투표가 끝난 뒤에 내려온다. 이에 따라 제주도 세 개의 선거구 중 두 개 선거구가 투표율 미달로 선거무효가 되었다. 좌익 무장대에 의한 소요가 일어나고 선거마저 불발이 되자 제주도는 빨갱이 섬으로 낙인찍힌다. 같은 해 8월 15일 이승만에 의한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제주도에는 계엄령이 선포된다. 겁에 질린 제주민들은 다시 산으로 숨어 들어갔다.


이후 해안가를 제외하고 안쪽 산간 지역에 남아있는 모두를 토벌하는 작전이 전개된다. "해안선 5km 이상 지역은 적성 구역으로 간주하고 그곳에 출입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사살하겠다"는 무시무시한 포고령이 내려진 것이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이 소식을 못 듣고 산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토벌대에 의해 희생되었다. 토벌대는 좌익 무장대가 아닌 일반인도 모조리 죽이고 마을을 불태웠다.


1949년 1월 남원읍 의귀 초교에서 80여 명 학살, 북촌 주민 400명 학살, 같은 해 10월 제주비행장 인근에서 249명 총살, 1950년 7,8월 섯알오름 250여 명 학살...

4.3 당시 토벌대가 파악한 무장대는 불과 500명 정도였다고 한다. 나머지 사람들은 토벌대가 무서워서 산으로 피신한 일반 주민이었다. 군인과 경찰은 그 500명을 토벌하기 위해 무려 3만 명에 가까운 주민을 학살했다. 무장대도 양민 학살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민가로 내려가 식량을 빼앗고 여기에 대항하는 사람들을 죽였다. 토벌대를 도운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과 그 가족에게는 잔인한 보복을 했다.


4.3백비, 이름 짓지 못한 역사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4.3전시관에 있는 백비. 백비는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일컫는다. 제주 4.3은 언제쯤 제 이름을 찾고 이 백비를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하고 친일파, 서북청년단 등 공권력의 횡포에 맞서 싸웠다는 점에서 4.3을 항쟁 혹은 혁명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피해자의 수가 훨씬 적기는 하지만 당시 군경의 가족이거나 무장대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4.3을 폭도로 규정할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제주 주민들은 4.3을 기억에서 지우고 싶어 한다. 토벌대에 피해를 입은 사람과 무장대에 피해를 입은 사람이 이웃으로 살아간다. 4.3을 입에 올릴 수 조차 없다. 게다가 이 사건의 원인을 제공하고 양민 학살에 큰 책임이 있는 친일파 세력이 계속 득세를 해 왔기 때문에 모두들 침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4.3을 빨갱이들에 의한 폭도로 규정해 왔고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억눌러 왔기 때문이다. 2000년에 이르러서 특별법이 제정되고 진상보고서가 발간되었지만 책임자 및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수많은 양민이 학살되었다. 한꺼번에 마을 주민들이 희생되어서 마을 전체가 한 날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 제주에는 많다고 한다. 이 안타까운 역사를 만든 사람들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확인이 되지 않았다. 제주 4.3을 계속 이야기하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다.


강요백 화백의 4.3 연작시리즈 <동백꽃 지다>. 붉은 동백이 통 꽃으로 떨어지는 장면 뒤 좌측 상단부에는 토벌대의 모습과 하얀 눈 밭에 뿌려진 피가 보인다. 강화백은 동백을 4.3 당시의 제주민으로 표현했고 이후 겨울에 피는 동백꽃은 4.3의 상징꽃이 되었다. 그림 이미지 출처: 프레시안 https://goo.gl/xQBkkT


*cover image by Clker-Free-Vector-Images |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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