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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기영 Aug 24. 2020

너의 이름은

한국식 호칭(직함)에 관한 짧은 생각

18년의 직장생활 끝에 비로소 내 이름을 찾았다.


황 대표님, 황 과장님, 황 차장님, 황 부장님, 황 이사님, 황 본부장님. 회사생활을 시작한 2000년부터 이 회사로 이직하기 전인 2018년 초까지 사람들이 나를 부르던 이름들이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는 한국식으로 부르는 호칭, 즉 직함이 없다. 인턴사원부터 지사장까지 다 이름 뒤에 님을 붙여서 부른다. 나 역시 깔끔하게 기영님으로 불리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 기업은 직함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국내에 진출한 외국계 회사도 상황은 비슷하다. 외국 회사이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대부분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늘 그래 왔기에 어느 관계에서나 상대방의 직함을 파악하고 서열을 정리하려 든다. 직함은 곧 나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나보다 직위가 낮은 사람들은 나를 존중해야 하고, 그들이 내 지시를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다 보니 회사에서 내 의견에 반대하는 것은 곧 나를, 내 직위를 부정당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상황이 오면 감정적이 될 수밖에 없고 위력으로 그들을 제압하려고 한다. 몇 번 그렇게 하다 보면 기가 질린 '부하' 직원들이 나의 말에 고분고분 따른다. 치열하게 승진을 위해 노력하는 것도 그것을 통해 더 높은 직함을 받기 위함이다. 직함이 바뀌면 성취감을 느끼고 자신감도 충만해진다. 물론 그에 따르는 금전적인 이득과, 더 큰 일을 하게 된다는 기대감도 한몫을 하겠지만, 승진을 했는데 직함이 변함이 없다면 누가 승진을 하고 싶어 하겠는가.


그러고 보면 한국인처럼 서열 정리를 좋아하는 국민도 없는 것 같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어도 나이가 많다면 언니, 형, 누나, 오빠라 부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첫 만남에 나이를 물어보는 것이 실례가 아니고 또 어색하지도 않다. 나이를 확인하고 서열을 정하기 위함이다. 심지어 이제 갓 말문이 터진 네다섯 살 아이들이 만나도 첫 번째 질문이 "너 몇 살이야?"이다. 그다음 나오는 말은 당연하게, "그럼 내가 언니/형이네"이다. 아이들이 날 때부터 그랬을 리는 없고 다 엄마 아빠 하는 것을 보고 배운 것일 터이다.


매일 같이 얼굴 보며 일하는 사이가 아니면 상대의 직함이 무엇인지 헛갈릴 때가 많다. 이 사람의 직함이 뭐였는지, 이번에 승진을 해서 직함이 바뀌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 사람을 불러야 할 일이 생길 때면 정말 곤란하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그냥 차장으로 높여서 불렀는데, "저 아직 과장인데요"라는 겸연쩍은 대답이 돌아오기라도 하면 좀 민망해진다. 실수로 높여 부르는 것은 그나마 낫다. 승진한 지 한참 되었는 데 그 전 호칭을 사용하게 되면 상대도 불편해하고, 나도 어쩔 줄을 모르게 된다.


그동안 몇 차례 회사를 옮겼으니, 내가 차장일 때 마지막으로 본 이들은 아직도 나를 차장님이라 부르고 이사일 때 마지막으로 본 이들은 이사님으로 부른다. 새로 받은 직함이 적혀있는 명함을 건네지 않는 이상 나는 그들에게 영원히 차장이고 이사이다. 지금은 직함이 뭐냐고 물어보는 전 직장 동료한테, 우리 회사는 한국식 직함이 없어요 그냥 이름 불러요 라고 하면 다들 적잖이 당황해한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 난감한 것이다.


photo by Austin Distel | unsplash.com


서로 이름을 부르는 문화는 편리하다.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는 모두가 이름에 '님'을 붙여 부르는데, 이 사람의 직함이 무엇인지 생각할 필요가 없다. 지난번에 승진을 했는지 안 했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그냥 이름을 부르면 되니까. 20년이 넘는 나이 차이가 나는 경우에도 님으로 부르다 보니 자연스레 서로 존중하게 된다. 직급이 높은 직원이 낮은 직원을 함부로 대하지 않으니 강한 위계질서가 생기지도 않는다. 나이가 많건 적건, 직책이 높건 낮건, 자유로운 의견교환이 가능해지고, 서로 수평하게 대하는 문화가 자연스레 형성이 된다. 물론 맡은 직책에 따라 결재 혹은 결정에 대한 권한 등이 주어지지만 필요한 업무에 최소한으로만 사용이 될 뿐이다.


이런 문화가 형성이 될 때 가장 이득을 보는 것은 회사이다. 직원들이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자기의 의견을 얘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좀 무리하다 싶은 획기적인 아이디어도 내놓을 수 있고, 불편한 것은 불편하다 얘기할 수 있다. 아닌 것은 아니라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자리 잡으면 직원들의 솔직한 피드백을 들을 수 있으니 그에 맞는 프로세스나 시스템을 설계하는 것이 용이하다. 의사결정을 위해 토론을 할 때도 서로의 입장에서 할 말을 한다. 자유로운 의견 교환 후에는 합리적인 결정을 하게 될 확률이 높아진다.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직원들의 참여도가 높아지고 소속감도 함께 올라가게 된다.


최근에 알게 된 국회의원 중에 조정훈이라는 이가 있다. 시대 전환이라는 신생정당 소속인 조 의원은 지난 국회 대 정부 질문에서 차분하고 정중하게 원하는 바를 이끌어 내서 화제가 되었다. 대정부 질문은 으레 국회의원이 장관한테 소리 지르고 면박을 주는 것이 당연시되어 왔으므로 조 의원의 매너는 꽤 큰 반향을 일으켰다. 나는 그 영상을 보지는 못했고, 조 의원이 라디오 인터뷰하는 것만 유튜브로 보았다. 참 논리적으로 조곤조곤 말 잘하는 사람이구나 하면서 보다가 재미있는 내용을 발견했다. 조정훈 의원실에서는 20대 인턴부터 50대 보좌관까지, 그리고 '의원님' 한테도 모두 이름 뒤에 님을 붙여서 부른다고 한다. 이것을 자기들끼리 있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심지어 동료 의원들 앞에서도 이렇게 한다고도 했다. 그는 "그게 이상한 게 저는 이상합니다... 호칭을 통해서 수직적 관계가 형성되면 가장 손해 보는 거는 저라고 생각합니다...'의원님' 앞에서 반대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더라고요..." 라며 호칭을 없앤 평등한 조직문화가 주는 이점에 대해 설명을 했다.


어느 국내 대기업에서도 직함을 없애는 시도가 있었다고 들었다. 모든 사람들의 직함을 없애고 호칭을 하나로 통일하도록 규정을 바꾸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상무 이상 임원들은 그 직함을 그대로 불러주기로 했다고 한다. 한 마디로 '아랫것들'은 평준화하고 '윗 분들'은 대접을 해 드린 것이다. 코미디가 따로 없다. 평직원들만 직위를 없앤다고 수평적인 문화가 정착이 되기도 어려울뿐더러, 버젓이 상무님이나 전무님이 계시면 오히려 위화감만 조성하지 않을까 싶다. 한국에 진출한 외국계 회사 중에는 영어 닉네임을 사용하는 것을 권장하더라도 한국식 호칭은 그대로 유지하는 회사들이 더러 있다. 해외 직원들과 영어로 일 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한국인들끼리도 종종 영어로 이메일을 주고받는데, 사람 이름 옆에 SJN, SMN, ISN 같은 것들을 붙이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Peter라는 닉네임을 가진 한국 사람이라면 Peter SJN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알고 보니 SJN은 사장님, SMN은 상무님, ISN은 이사님이었다. 영어로 이메일을 쓰더라도 직함을 붙이지 않으면 불손해 보일까 봐 그렇게 한다고들 했다. 그럴 거면 그냥 한국어로 이메일을 보내라고 권해주고 싶다.


이름을 부르고 서로 존댓말을 한다고 해서 그냥 저절로 수평한 문화가 생기는 것은 물론 아니다. 서로 님으로 부르면서도 얼마든지 위계질서를 강하게 만들 수 있다. 호칭을 없애는 것을 시작으로 상호 존중하는 문화를 만드는 것은 리더의 강력한 의지가 필요하다. 그다음에는 구성원들의 지속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 수평하고 서로 존중하는 문화를 해치는 행위들이 보이면 목소리를 높여 이를 제지하는 다수가 있어야만 이 문화는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회사에서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지 2년 반이 지났다. 이제는 누군가에게 호칭을 붙여 사용하는 것이 매우 어색하다. 전 직장 동료들을 만나도 직위로 부르는 것이 낯설다. 안 본 사이에 다들 승진도 해서 바뀐 직위가 입에 붙지 않아 더 그렇다. 듣자 하니 어느 스타트업 회사는 서로 이름을 부르며 반말을 한다고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말 웃픈 상황이 발생할 수 있을 것도 같지만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어쨌든 서로 '평등하게' 하대할 수 있으니 말이다.




*cover image from kiminonawa.fando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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