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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기영 Sep 10. 2021

말이 씨가 된다

대화를 하다 말고 담배를 하나 더 꺼내 불을 붙인다. 벌써 세 개 째이다. 연기를 한껏 들이마신 뒤 내가 서 있는 반대쪽으로 머리를 돌리고는 후우 하고 길게 내뿜는다.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담배연기가 쭈욱 앞으로 뻗어 나갔다가 몽글몽글 하늘을 향해 올라간다.


"담배 좀 그만 피워라, 그러다 병 걸리겠다"

"무슨 병? 폐암?"

"그런 것도 있고 많잖아"

"하하 괜찮아. 걸리면 죽지 뭐"


회사 입사동기인 J의 투병소식을 들은 것은 그가 항암치료를 시작한 지 일 년 정도 지나서였다. J와 나는 사무실에서 마주치면 인사를 나누고 가끔 커피를 같이 마시는 그런 사이였다. 차 한잔 하자고 하면 J는 자판기 커피를 뽑아 들고는 일층으로 내려가자고 했다. 회사 건물 일층의 뒤쪽 구석에 초록색 캐노피가 드리워진 작은 공간이 있었다. 군데군데 플라스틱 양동이가 놓여 있는 그 좁은 공간은 늘 흡연자들로 가득했다. 담배연기가 싫었지만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함께하고는 했다. J는 한 번 내려가면 두세 개의 담배를 연달아 피웠다. 왔다 갔다 하기 귀찮으니 내려왔을 때 한 번에 다 피우는 거라 했다.


우리가 같은 부서에서 일을 할 때는 종종 마주쳤지만, 내가 팀을 옮기고 나서는 자주 얼굴을 보지 못했다. 몇 년뒤 내가 회사를 옮기는 바람에 더욱 볼 일이 없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친하게 지내던 전 직장 선배한테서 연락이 왔다. 우리 회사 근처에 볼 일이 있어 왔다며, 커피 한잔 하자고 했다. 서로의 근황을 묻고 회사 욕을 한바탕 늘어놓은 뒤에 선배가 말했다.


"J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요?"

"암에 걸렸대. 병원에 일 년째 입원 중이라던데?"

"정말요? 어쩌다가? 어디에 암이 생겼대요?"

"폐암이라고 하던데 말기인가 봐. 친한 사람들 하고도 연락을 끊어서 그것 말고는 잘 모르겠어"


머리가 멍 해졌다. 무언가로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가 뿜어내 몽글몽글 하늘로 올라가던 담배연기, 그리고 우스갯소리로 내뱉던 말이 떠 올랐다. 담배가 직접적인 원인이었을지는 알 수가 없지만, 말이 씨가 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소식을 듣고 나서 얼마 후 그의 장례식에 다녀왔다. 아빠의 죽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어린아이 둘과 그의 아내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동료들은 회사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해장국을 먹고 소주잔을 기울였다.


J는 가까운 사람들의 병문안도 거절했다고 한다. 병마와 싸우느라 초췌해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을 거다. 소식을 들은 뒤에도 나는 그와 연락을 하지 않았다. 전화기를 꺼 놓고 누구의 연락도 받지 않는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말기 암으로 투병 중이라는 것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폐암에 걸리게 된 원인이 담배 때문인지 아니면 아니면 가족력으로 유전이 되었던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가 했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말이 씨가 된다. 정말로 내뱉은 말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늘 말하던 것이 마침내 사실로 되는 경우가 있다. 나쁜 일도 그렇지만 좋은 일도 그렇다. 지는 것이 거의 확정이던 경기에서 "할 수 있다"를 세 번 외치고 극적인 역전승을 이루어낸 펜싱선수 박상영이 그 예이다. 물론 그가 주문처럼 내뱉은 말 때문에 금메달을 딴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실력이 뛰어난 선수여서 우승을 할 수 있었던 것일 테다. 하지만 아주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을 때 할 수 있다는 말을 되뇜으로써 의지를 더 확고히 하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게 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부정적인 말을 습관적으로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늘 죽겠다 죽겠다 를 반복하는 사람이 진짜로 그다음 날 죽는 것은 아니지만, 어딘가 그늘져 보이고 그리 행복하지 않아 보이는 경우가 많다.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사람은 그렇게 자기 암시가 되어 부정적인 분위기가 그를 감싸고 있는 것도 종종 보게 된다.


화창한 어느 오후, 커다란 통유리가 돋보이는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볕이 좋은 창가에 앉아 베이스가 멋들어진 재즈를 들으며 책을 읽는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작은 도로의 저편 구석에 삼삼오오 모여 담배 피우는 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고개를 한껏 젖히고 연기로 도넛을 만들었다. 담배연기는 몽글몽글 하늘로 올라가다 짧은 여운을 남기며 산산이 흩어졌다. 그곳에서 J는 좋아하던 담배를 마음껏 피우고 있을까?




*cover image from realworkhard |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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