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기영 Jun 13. 2021

어금니

어금니를 뽑았다. 사랑니 아니고 어금니. 동네 치과에서 써준 의뢰서를 들고 대학병원까지 가서 치주 수술을 받았지만 완벽하게 치료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금니를 뽑았다.


생니를 뽑는 작업이므로 간호사한테 무서운 사전 주의사항을 듣고 사인을 해야 했다. 안 그래도 꼭 있어야 할 것 같은 어금니를 뽑는 것이 마뜩지 않았는데 주의사항을 들으니 공포가 밀려왔다. "저 그냥 안 뽑을래요"라고 외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는 순간 의사가 들어왔다. 꼼짝없이 마취를 당했고 무시무시한 도구들이 입속을 들락날락하는 것이 느껴졌다. 드드득하고 뿌리가 조금 들리는 느낌이 나자 매우 아팠다. 마취주사를 한 방 더 맞았다. 나는 치과 치료를 할 때마다 마취가 충분히 되지 않아 주사를 한 방씩 더 맞곤 한다. 추가 마취에도 불구하고 조금 아팠지만 참았다. 계속해서 어금니를 당기는 느낌이 났고 언제까지 참아야 하지 생각하는 찰나, "다 되었습니다 잔여물 정리 좀 할게요" 하는 의사의 말이 들렸다. 하늘에서 천사가 얘기하는 소리 같았다.


뽑힌 어금니는 뿌리 부분에 까맣게 염증이 생겨 있었다. 동네병원과 대학병원 의사  분이 진단했던 그대로였다.  사용하던 어금니를 제거하니 쓸모없는 사랑니를 뽑았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작은  조각에 불과하지만  있어야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것이어서 상실감이 컸다.  하늘의 뜻을 알게 되는 대신 몸을 조금씩 내어 주어야 하나 보다.


지천명 [知天命]
1. 하늘의 뜻을 앎  
2. '오십 세'를 달리 이르는 말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얼마 전 눈가에 깊게 파인 주름을 새삼스레 발견하긴 전까지는 - 매일 거울을 보지만 주름이 그렇게 눈에 확 들어온 적은 없었다 - 계속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만 알았다. 없던 쌍꺼풀도 생겼다. 접혔다 풀렸다를 반복하다가 어느새 자리를 잡아 버렸다. 인상이 매우 느끼해졌다. 신체의 능력도 군데군데 쇠약해지고 있다. 원래 좋지 않았던 기억력은 조금 더 나빠진 것 같다. 시력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이 나이를 먹어 가는 데도 같은 나이 때의 사람들을 만나면 대화가 잘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 마치 아버지 또래랑 대화하는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정신이 나이만큼 성숙하지 못한 내 탓일 테다. 그래서인지 한참 어린 사람들과의 얘기가 더 즐겁다. 그들이 나와의 대화를 즐기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즐겁다. 내 정신연령은 30대 시절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때로는 유치한 생각을 하기도 하고 젊은이들이 입을 법한 옷을 입고 다닌다. 심지어 토트백 - 중년의 아저씨가 들기에는 조금 어색한 - 을 들고 나타나 동창들을 기겁하게 만들 때도 있다. 정신연령이 낮은 나는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것들이 "정상"인 다른 이들에게는 이상해 보이는 것이다.


어렸을 때의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으려 하는 것은 살아가며 겪게 되는 아픔들을 잊기 위한 방어기제 일수도 있겠다. 젊었을 때의 아픔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빨리 잊혔고 빨리 그다음을 향해 나아갔다. 치유능력이 왕성했고 금방 회복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어릴 때의 탄력성을 유지하기 위한 나름의 방편으로 그 시절의 정신연령에 머물고자 하려는 것이 아닐까. 아니 어쩌면 더 큰 아픔을 경험하지 않았던, 그리고 마냥 행복했던 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지탱하기 위한 노력일 거라는 근거 없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금니를 빼고 나니 앓던 이가 빠져 속이 시원하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빼고 난 직후의 아픔이 가시고 한결 살 것 같아졌다. 새 살이 돋고 생채기가 아물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술도 마시고 맛있는 음식도 다시 마음껏 먹게 될 것이다. 늙는 것은 어쩌면 살아가며 생기는 상처가 아물어 가는 과정인가 보다. 잠시 앓고 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또 하루를 살아가게 되고 그렇게 하루하루가 켜켜이 쌓이게 되면 비로소 하늘의 뜻도 알게 되는 것이 아닐까.




사족.

어금니를 뽑기 전에 제거했던 크라운을 받아 두긴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처치곤란이었다. 찾아보니 온라인으로 금니를 매입하는 사이트가 있길래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에 문의를 했다. 요즘 시세에 따라 2만 원에서 3만 5천 원 정도 쳐 줄 수 있다고 했고 등기우편으로 보내 달라며 주소를 보내줬다. 우체국에 들를 기회를 잡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는 데 그 업체에서 리마인드 메시지가 왔다. 나는 그때 마침 금은방이 즐비한 종로에 있었고 어딘가에 금니를 매입할 곳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역시나 한 곳을 찾았다. 으슥한 종로의 뒷골목 이층 허름한 사무실로 들어갔다. 무게를 달고 이리저리 살펴보던 사장님 왈 "이거는 7만 5천 원 정도밖에 못 쳐드리겠는데요, 어떻게 하실래요?". 3만 원 보다 적게 준다고 하면 됐다 하고 나오려 했었는데 두 배가 넘는 금액이라니. 그 정도면 좋다 하고 현금으로 7만 5천 원을 받아 들고 나왔다. 기분이 좋았다. 생니를 뽑는 바람에 받게 된 것인데도 왠지 공돈이 - 그것도 예상보다 훨씬 많이 - 생긴 것 같아서 그냥 행복했다.


*cover imager from LionFive | pixabay.com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