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왕마담 Jun 29. 2023

한 걸음 늦는 요즘

[마음을 담은 편지]#23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 출근길 아랫배가 슬금슬금 아팠습니다. 사무실에 갈 때까지 참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어요. 신경이 온통 거기로만 쓰였지만, 중간에 화장실 들리면 지각할 게 뻔해 일단 지하철을 탔습니다. 버틸만큼 버텨보자 싶었죠.


도착하자마자 얼굴비쳐 출근도장 찍고 바로 화장실로 향했습니다. 걸음을 재촉하는데 앞에 다른 직원분이 한 두 걸음 빨리 나오네요. '어? 화장실 가는 건 아니겠지?' 했는데, 그쪽으로 가네요? '큰 거는 아니겠지?' 불안해서 잰걸음으로 앞질러 가고 싶었지만, 치사해 보였습니다.


양변기 4개 중 1개가 비어 있는데 그곳으로 들어가더군요. 한 숨이 나왔어요. 요즘 무얼하든 이렇게 한 걸음이 늦습니다. 출근할 때 지하철역까지 걸어다니지만, 늦었다 싶으면 마을버스를 타고 가요. 횡단보도 건너기 전 눈 앞에서 타려는 버스가 지나가는 경우 닭 쫓던 개가 이런 기분일까 싶습니다.


멀리 보이는 안내 모니터에 지하철 들어오는 게 보입니다. 승강장까지 죽자사자 뛰어가면 눈 앞에서 딱 문이 닫히는 경우도 많습니다. 거기다 그런 열차는 대개 여유로워요. 고작 3분 뒤에 온 다음 차는 이미 승객들로 가득합니다.


사람들에 이리저리 채이고 내려, 비교적 큰 길을 걸어가는데 이상하게 가는 방향으로 다른 사람이 사선으로 걸어 옵니다. 둘 중 누군가 한 걸음을 늦추지 않으면 아슬아슬하게 마주치죠. 마치 씨실과 날실처럼. 지각해서 엘리베이터를 타면 급한 마음에 '문닫힘' 버튼을 부서져라 누릅니다.


문이 닫히기 직전 다시 열리네요? 그 사람도 미안했지만 늦어서 급했는지 겸연쩍게 탑니다. 더하여 하필 제가 서는 12층 바로 아래 11층에서 내리는 건 도대체 무슨 일인지..... 그 사람 뒤통수를 원망의 눈초리로 쳐다보며 닫힘 버튼을 아예 짓누릅니다.



2012년 다녀왔던 <산티아고 가는 길> 에서 만난 표지판



회사에 한 걸음만 일찍 도착했어도 양변기, 제가 차지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 분과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지 않고 중간에 멈추지 않았다면 그 만큼 일찍 올라올 수 있었죠. 혹은 횡단보도를 기다릴 때 지나간 마을 버스를 탔다면 지하철도 놓치지 않았을 겁니다.


잠을 털지 못해 뒹굴렀던 잠깐의 게으름에 모든 게 연결된 그 한 걸음을 잃었습니다. 게다가 매 순간 본인을 '재수없다'며 운없는 사람 취급하고 치미는 짜증과 정체없는 분노로 혼자 울그락불그락 감정에 취해 쓸데없이 에너지를 너무나 많이 소모했어요.


어쩔 수 없을 땐 안달복달하기보다 유유자적 느긋한 마음을 갖고 싶습니다.

혹은 일찍 일어나던가!


.

.

.

P.S: '저 살아있어요', 인사처럼 간만에 올리는 '글'입니다. 가벼워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글쓰기가 힘겨웠어요. 하나의 벽을 넘으면 또 다른 벽에 부딪치는 일상이었습니다. '글'과 멀어졌는데도 여전히 '글'에 대한 마음이 사그라들진 않더군요.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쓰지 못했을 뿐. 다시 그 마음을 꺼낼 다짐처럼 전에 써놓은 글을 손보아 올려봅니다. 게으름을 조금씩 벗어볼게요. 무엇보다 건강하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같이 죽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