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제일 두려운 게 뭐냐?"
"아마, 나를 정말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는 거겠지."
-테이웨인, '아파트먼트' 중
소설가지망생인 주인공, 쓰는 사람 간의 사귐, 90년대 뉴욕의 아파트먼트, 상실을 통한 자기 인식
이런 것들이 적힌 소개글과 타자기가 그려진 차분한 색감의 표지를 본 나는 1초의 고민도 하지 않고 이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이 소설에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껍질이 지나치게 견고해서 사람을 사귀기 어려워하는 주인공이 나온다. 소설가를 꿈꾸며 컬럼비아 대학에서 문예창작 워크숍을 듣고 있는 '나'는 합평 시간에 유일하게 자신의 소설을 지지해 준 '빌리'와 가까워진다. 중상위 계층인 ‘나’와 달리 바텐더 일로 겨우 학비를 조달하는 중서부 출신의 ‘빌리’. 합평 시간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혹평을 받는 ‘나’와 달리 교수에게까지 자주 칭찬을 받는 ‘빌리’.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신과 '빌리'의 영혼이 닮았을 거라는 환상에 취해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비슷한 어떤 것을 꿈꾸며 '빌리'에게 많은 것을 아낌없이 내어 준다. '나'의 호의를 젠틀하게 받아들인 '빌리'는 '나'의 불법 전대 아파트에서 거의 '공짜로' 같이 지내게 된다.
훈훈한 브로맨스로 끝날 것 같은 이 이야기의 끝은 처참하다. 둘의 관계는 아주 작은 것('나'가 전혀 문제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들, 이를테면 둘의 경제적 상황의 차이나 정치 성향 같은 것들)에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금전적 손해를 감수하고 오로지 빌리와 함께하고픈 마음에서 따라간 일리노이 여행 이후로 '나'를 대하는 '빌리'의 태도는 눈에 띄게 냉담해진다. 그런 빌리와 달리 '나'는 관계를 회복해 보려 애쓰지만, '빌리'는 나에게 메울 수 없는 '구멍'만을 남긴 채 아파트먼트를 떠난다. 결국 '나'는 '피츠제럴드'도 되지 못하고, '헤밍웨이'같은 친구도 잃는다.
뭔가 좋은 관계를 맺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잔잔한 전반부보다, 노력과 애씀과는 별개로 자꾸만 어긋나고 결국은 어둡게 끝나버리는 후반부가 개인적으로 이 소설의 백미라 여겨진다. 우리가 대부분의 관계에서 맛보았던 '환상 끝의 씁쓸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게 되었던 '나 자신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을 적나라하게 그려내기 때문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대부분의 관계는 서로의 영혼에 가 닿지 못한 채 실망만을 남기고 흐지부지 끝나 버리거나, 실망이 두려워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한 채 지지부진하고 가늘게 (대개의 경우 끊어지는 것보다 좋지 않게) 이어진다. 극소수의 사귐만이 '견고한 우정'이나 '단단한 사랑'에 이르게 된다. 이 소설은 우리가 너무 많이 겪어 익히 알고 있는 '흐지부지 끝나거나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관계의 과정'을 소설가 지망생의 입을 빌려 섬세하게 짚어준다. 동시에 한때는 인생을 걸 정도로 매료되었던 꿈이 사실 자신이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프게 인정하고 조금씩 내려놓는 '상실의 과정'을 담담히 그려낸다. 그러한 과정을 따라가며, 우리 삶의 본질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상실'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무언가를 잃어간다는 것이며, 우리가 한때 무언가를 꿈꾸었다가 잃어갔던 그 과정이 결국 우리 자신을 구성하는 무엇이 된다는 것.
이 소설은 이러한 진실에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나는 곧 마흔이 될 것이고, 지금은 완연한 가을이다. 마흔때문인지 가을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어째 살수록 얻는 것보다 잃는 것들이 많다는 느낌에 조금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었다. 하릴없이 잃어가는 것들과 그래서 더 견고해져만가는 나의 껍질. 그래서 더 쓸쓸해질 수밖에 없는 가을과 마흔을, 그래도 좀 담담하게 맞고 싶은 바람으로 이 소설을 읽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떠나가버리고 무너져내리는 것들을 땀을 뻘뻘 흘리며 보고만 있어야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한 톨도 남기지 않고 촘촘히 그려 넣은 문장이 큰 위로가 되었다.
p.26-27
빌리의 미소는 산탄총이 난사된 듯 확 타오를 듯하고, 영화배우나 상원의원의 무기나 다름없는 매력이 느껴지는, 방 안을 환하게 밝히는 종류의 미소는 아니었다. 아랫니는 뾰족한 창을 박아 만든 던전의 함정처럼 제멋대로였지만, 윗니는 가지런했고, 한가운데 앞니 하나는 살짝 깨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 이미 알 수 있었는데, 그 미소는 좀 더 미묘한 무언가를 전해주었다. 그건 그와 미소의 수신자, 그렇게 오직 두 사람만이 이 세상을 희비극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메시지였다. 인생이 언제나 원하는 대로 풀려나가지는 않거든, 그 미소는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지만, 어쩌면 그게 핵심인지도 몰랐다.
p.98
"미친, 우리 지금 뉴욕에서 춤추고 있다고!"하고 소리쳤을 때도 그랬는데, 비록 그 말이 지나치게 몰입해서 없어 보이는 관광객다운 감상이긴 했지만, 우리 모두가 경험하고 있던 보드카처럼 맑은 통찰의 순간을 구체화하고 있어서였다. 그 통찰이란, 우리 삶의 거의 모든 시간은 뉴욕에서 춤추는 데 쓰이지 않고, 대신 일하는 데, 출퇴근하는 데, 샴푸로 머리를 감고 치실질을 하고 냄비에서 음식물을 긁어내는 데 낭비되며, 우리 삶의 봄날에 단 한 시간 동안만이라도 뉴욕과 춤이라는 그 두 가지 변수를 결합한다는 건 추앙할 만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p. 250
나는 괴짜였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전형적인' 괴짜조차도 못 되었다. 아니, 나는 스스로 괴짜가 되기로 선택한, 그래서 다른 괴짜들과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낸 괴짜를 사이에서도 괴짜였으며, 주류 사회의 바깥에서 지내는 것은 감탄스러울 만큼 영웅적인 투쟁이었지만, 이미 소외된 하위문화 속에서 또 변두리에 머무르는 것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데다 그냥 외로웠다.
p. 287
하지만 내가 그를 영원히 잃었음을 나는 알았고, 그의 문가에 서 있는 동안 내 손에 들린 전화번호부는 갑작스럽게도 닻처럼 무겁게 느겨졌으며, 나는 내가 젊기는 하지만, 그리고 사람의 마음이라는 저수지가 끝없이 다시 채워 넣을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나라는 인간의 껍질에서 가장 뚫고 들어가기 힘든 층은 여전히 늘어나고 있으며, 빌리는 내가 그 안으로 들어오게 허락하는 일에 가까이 갔던 마지막 사람이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