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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Dec 19. 2021

여름 도둑 5

이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이야기


https://brunch.co.kr/@redangel619/337





5.


가을


  보통 헤어진 애인을 생각하면, 얼굴이나 실루엣 같은 시각적인 게 먼저 떠오르잖아. 아님 목소리 같은 거. 근데 물개는 촉감이나 냄새 같은 게 먼저 떠올라. 옷을 다 벗고 완전히 몸을 맞댔을 때 그 애 몸에서 느껴지던 열기나 아침에 일어났을 때 옅게 나던 남자애들 특유의 기름 냄새. 내 어깨를 잡을 때 느껴지던 까슬한 손바닥의 촉감이나 씻고 나왔을 때 입에서 나던 침 냄새를 덮은 치약 냄새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이 온몸으로 떠올라. 물개와 헤어지고 나서도 아주 오랫동안 그런 것들이 나를 괴롭혔어.


   뜨거워 터질 것 같던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됐어. 가을이 오고 나서도 나는 물개와 내 관계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 가볍다고 생각했어. '서른도 안 된, 이제 갓 졸업한 꼬마를 데리고 내가 결혼을 할 수도 없고 어쩐담?'하는 생각과 '아 모르겠다 그냥 땡기는 대로 해 버리자.'라는 생각이 뒤죽박죽이 되어 있던 때. 생각만큼이나 행동도 내멋대로였어. 그래도 그때쯤엔, 그 주에 소개팅했던 남자가 이러니 저러니 요즘 연락하고 있는 남자가 이러니 저러니 하는 그런 얘기들을 물개한테 하는 건 그만뒀어.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었나봐. 걔가 나를 덜 좋아하게 되는 거에 대해서.


   지금이나 그때나 난 왜 이렇게 대책이 없을까. 너처럼 좀 인생을 야무지게 살면 참 좋을텐데. 사는 방식은 나이와 아무 상관이 없나봐. 성격대로 일관성있게 쭉 가야 했는데 괜히 나답지 않은 짓을 하다가 더 꼬였어. 그때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사람인지 지금보다 더 몰랐어.


  그 무렵 만났던 남자들 중에 너한테 얘기해 주고 싶은 사람은 딱히 없어. 그래도 물개 이야기를 맺기 위해서는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한 명 있어. 물개한테 묻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건 알 수 없지만, 그 애가 본격적으로 나를 미워하게 된 계기는 이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어. 너 현지 언니 알지? 나랑 같은 학원 다녀서 종종 만나던 키 크고 마른 언니. 그 언니가 소개해 준 남자야. 나랑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서연 씨가 소설 좋아한다는 건 현지한테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태연한 인생’ 찍어 놓은 프사 보고 깜짝 놀랐어요.”

  “헐, 은희경 좋아하세요 혹시?”

  “서연 씨만큼 팬은 아닌데, 제가 최근에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끝까지 봤던 소설이 그거였거든요.”


  준섭 씨는 당신이랑 나랑 정말 잘 통할 것 같지 않아? 라는 표정으로 나를 뚫을 듯 보면서 웃었어. 키가 크고 덩치가 큰 거, 소설을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읽는다는 거 때문에 현지 언니가 열거했던 다른 장점들과 별개로 나는 준섭 씨를 ‘나름’ 괜찮은 남자일 것 같다고 생각했어. 일단 외모가 싫지 않고, 말이 통할 것 같으니까.


  본격적인 썸 단계라 생각했는지 주말마다 데이트를 하고 싶어 하더라고? 그렇게까지는 부담스럽다고 선을 그엇지만 어쩌다보니 한 동안 제법 자주 만났어. 만나기로 한 날은 몇 시간 일찍 도착해서는 내 차를 셀프세차장에 끌고 가서 집적 세차를 싹 하고 기름을 가득 채우고 에어컨 통풍구에 방향제까지 끼워서 주고. 또 어떤 날은 내가 군것질을 좋아한다고 했더니 덩치에 안 어울리는 귀여운 포장을 한 군것질 거리를 잔뜩 들려주기도 하고. 뭐든 목표를 정해두고 전략적으로 최선을 다하는 그런 사람. 강아지처럼 신이 나서 내 방으로 쫓아 들어오는 물개랑은 많이 다른 느낌이었어.


  “서연 씨는 얼굴은 그렇게 안 생겨서 어쩜 그렇게 차를 드럽게 써요?”


라고 말할 땐, 꼭 익숙한 연인처럼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고맙다고 말하면서, 사실 속으로는 '나랑 만나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라고 생각하죠?!”


라고 말할 땐, 이 자식 눈치가 제법인데 싶기도 했어.


  나는 일단 하고 싶은 대로 실컷 하고, 미룰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이성적인 결정을 미루고 싶었어. 이기적이었지. 유치한 자신감과 뻔뻔한 합리화가 습관이었고. 태오랑 만날 때랑은 완전 다르게. 태오가 나를 가끔 믿을 수 없는 애라고 하긴 했지만, 난 태오 만날 땐 남사친도 안 만났어. (너도 잘 알겠지만) 대단한 정절의식 같은 게 있어서 그런 건 절대 아니고. 뭐랄까. 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걸 태오가 안다면, 그때 느낄 태오의 마음이 너무 내 마음처럼 생생하게 상상이 돼서 그러지를 못했어. 태오와의 끈끈함이 너무 좋아서, 그걸 잃는 게 무서워 태오랑 딱 붙어 있기만 했었어.


  태오랑 물개를 번갈아서 생각하다 보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동침의 욕구와 정사의 욕구는 별개고 오히려 상충된다던 쿤데라의 말이 떠올랐어. 토마스는 사비나랑 결국 헤어지고 테레사랑 죽을 때까지 같이 살잖아?  '나도 결국 그렇게 살게 될까.'하는 생각이 지금도 들어. 어쨌든 좋아하는 마음의 깊이와 별개로 물개를 만났던 그 여름은, 솔직히 말하면 태오의 애인이었던 때보다 더 내가 나 같았던 시간이었어. 태오가 너무 좋아서 벗을 수 없었던 걸 다 벗고, 태오와의 관계를 지키고 싶어서 보일 수 없었던 내 안 제일 깊숙한 곳에 숨은 나쁜 것들까지 스스럼 없이 다 꺼내어 놓은 상쾌한 느낌. 그래서 잘 보이는 거랑 착한 사람이 되는 거엔 관심이 없었어.


  너무 뜨거워 땀이 줄줄 흘렀지만 마음껏 옷을 벗을 수 있던 그 여름이 나는 너무 그리워. 그런 계절은 인생에서 너무 짧거든.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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