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나의 영혼을 숨기려 하지 않아도 나를 안아줄 사람이 있을까
중호는 대문이 삐걱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소리가 요란한 대문을 열어 둔 이유가 떠올라 정신이 맑아진다. 두어 시간 정도 잤을까. 요 며칠 계속 잠을 못 자 눈알이 따끔거리는데도 더 이상 자고 싶지도,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아서 협탁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는다. 8시 23분인 걸 확인하고 일어나 커튼은 걷는다.
"아침에 커튼을 걷으면 이렇게 해가 눈꺼풀을 만져주는 것처럼 들어오고, 손을 조금만 움직이면 오빠 손이 닿을 때가 젤 좋아. 나 죽을 때까지 여기서 이렇게 살까?"
중호는 그런 말을 하며 은수가 그의 가슴 가까이 뺨을 갖다대며 안겨오던 때를 떠올리며 잠시 옅게 웃는다. 행복한 장면을 떠올린 것에 비해 지나치게 짧은 웃음. 그것이 끝나기가 무섭게 건조한 어둠이 오랫동안 그의 얼굴에 머문다. 은수는 늘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진심을 가득 담아,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얼굴로. 처음 은수가 그런 말을 했을 때 중호는 전율했다. 하지만 은수의 그런 말이 거듭될수록 전율은 불안을 동반했다. 불안은 점차 의심이나 회의 같은 걸 불러 왔고, 끝내는 체념이 되었다. 물론 중호는 단 한 번도 은수의 그 말이 진심이 아닐 거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진심이라고 해서 모든 말이 현실이 되는 건 아닐 뿐. 은수는 현실이 되지 못할 진심을 언제나 아무렇게나 쏟아놓았고, 쏟아 놓은 진심이 다 증발되거나 꾸덕하게 굳을 때 쯤이 되면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 은수가 어디선가 다시 온다.
오빠 잘 지냈어? 나 은수야. 아직 거기 살지? 연락 줘.
라는 메시지를 시작으로 중호는 은수와 다시 연결되었다. 그는 그녀가 마지막으로 떠나던 3년 전 그 날로부터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똑같은 집에 살았고, 똑같은 일을 했고, 똑같은 핸드폰 번호를 쓰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휴가를 냈다. 은수가 온다는 날에 맞춰. 그 동안 모아뒀던 것들을 다 쓸 생각이었다.
면도도 하고 이발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중호는 욕실로 들어선다. 하나만 덩그러니 꽂힌 칫솔이 쓸쓸하다. 좀처럼 거울을 보지 않는 중호이지만, 오늘은 유심히 자기 얼굴을 쳐다본다. 은수랑 같이 살던 때에 비해 급격히 늙은 것 같아 신경이 쓰인다. 염색도 펌도 하지 않은 짧은 머리가 부석하고, 이마에는 실주름이 조금씩 보인다. 짙고 굵은 눈썹. 그 아래 엷은 쌍꺼풀의 차분한 눈. 오똑하다기보다 우뚝한 콧대와 넓은 콧망울. 테두리 선이 선명한 입술 주위를 덮고 있는 수염.
중호는 자기 몸에 남은 것들 중, 은수가 좋아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확인해 본다. 그리고 자기를 이렇게 붙박여 살게 만드는 은수가 가진 많은 것들을 떠올려 본다. 새까맣고 숱 많은 머리카락과 봉긋하게 잘생긴 이마. 옅고 가는 눈썹과 눈을 크게 떠야 다 보이는 큼직한 눈동자. 갖가지 표정이 통통 뛰어노는 그 눈동자는 언제나 중호의 눈을 멈추게 하고 오래 머물게 했다. 짧고 작지만 도도한 콧대와 웃을때면 그 위에 생기는 잔주름. 먹고 떠드느라 오물거리는 입과 가느다란 목. 또렷한 쇄골과 자그만 가슴과 그 아래 갈비뼈. 작고 가는 선이 예쁜 허리와 엉덩이. 그런 것들이 마치 지금 자기 앞에서 은수가 같이 서 있는 것처럼 선연하다. 중호는 언제부턴가 회상만으로도 정교하게 은수를 그려낼 수 있었다. 그리운 것이 괴로워 한동안 떠올리지 않았을 뿐이었다.
면도를 하고 샤워를 해 멀끔해진 중호는 옷을 껴 입고 집을 나선다. 5년 전 그는 돌아가신 엄마가 남긴 시내의 아파트를 전세로 돌리고 2분만 걸어 나가면 바다를 볼 수 있는 이 집에 전세로 들어왔다. 회사가 좀 멀어졌지만 상관없었다. 은수가 마음에 쏙 든다며 좋아하던 집이었다. 그 때는 은수가 다시 떠날 줄 몰랐었다. 집 안에 커튼이며 가구도 모두 은수의 취향이었다. 중호는 신혼 부부처럼 은수의 어깨를 안고 가구나 소품을 사러 다니던 때를 떠올린다.
둘을 뿌듯한 눈으로 한참 보던 가구점 사장이
"두 분이 부부신가봐요?"
라고 물었을 때, 은수의 눈치를 보느라 머뭇거리는 중호를 앞질러 은수는 경쾌한 목소리로
"네! 딱 봐도 그래 보이죠?!"
하며 목소리보다 더 경쾌하게 웃었었다. 은수는 주저할 줄 몰랐다.
***다음 편에 계속
(부제는 '자우림'의 노래 가사를 인용했습니다.)
https://brunch.co.kr/@redangel619/3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