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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Dec 31. 2021

Going Home 2

가난한 나의 영혼을 숨기려 하지 않아도 나를 안아줄 사람이 있을까


https://brunch.co.kr/@redangel619/348






중호


  미용실로 가는 길 왼쪽으로 바다가 보인다. 따가운 가을볕이 수면에 부딪혀 눈이 부시다. 날씨가 좋다. 내일은 은수랑 이 길을 걸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중호의 눈이 보드라운 주름을 그리며 웃는다.


  "중호씨, 오늘 분위기가 좀 다른데요?"

  "그래요?"


미용실 여자는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지만 중호는 그러기가 귀찮다. 그녀의 얼굴은 좀 전형적이긴 하지만 시원하고 화려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성격도 살갑고 적극적이라 남자 손님들에게 인기가 많다. 그렇다 보니 자신감 또한 남달라서 언제 한번 중호에게 저녁을 같이 먹자 했다가 거절 당하고, 그러고도 맥주라도 한 잔 하자 했다가 또 거절 당한 전력이 있다.


"중호 씨 진짜 얼마 만에 이렇게 펌까지 하는 거예요? 좋아하는 여자 생겼죠?"


중호는 대답없이 웃고는 계산을 하고 나온다. 은수라면 자기한테 관심 없는 남자한테 절대 저런 말 안 할텐데. 라고 생각하며. 중호는 낯선 남자 앞에서 앙다물어지던 은수의 아기같은 입을 떠올리며 다시 눈으로 웃는다.


  중호는 성만이 형이 며칠 전 갖다 준, 냉동실에 있는 무늬 오징어를 생각하며 작은 마트에서 장을 본다.


  '우리 은수는 기분에 따라 마시고 싶은 술이 달라지지.'


라고 생각하며 술을 종류별로 다 담는다. 좋은 데이와 여섯개들이 호가든 병맥, 그리고 옐로우테일 까쇼. 빵도, 파스타 면도 일부러 두 가지 씩 담았다.


  '우리 은수는 선택지가 많은 걸 좋아하지.'


라고 생각하는 중호의 얼굴은 어제와는 다른 사람 같다.


오빠, 나 세 시 쯤 도착할 것 같은데,, 저녁 같이 먹으면 되겠다! 오빠 나 라면 먹고 싶어.


  꼭 며칠 전에도 봤던 애인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자연스러운 은수의 메시지. 오랫동안 그녀를 기다린 것에 대한 억울함도, 그 동안의 그녀에 대한 궁금함도 꺼내 놓고 호소할 기회는 역시나 없을 것 같아, 하지만 그래도 좋을 것 같아, 중호는 결국 웃는다.


  “오빠는 꼭 라면 끓이듯이 파스타를 만드네요?! 앞으로 이거 먹고 싶을 땐 라면 먹고 싶다고 하면 되겠다. 또 해 줄 거죠?"

 

은수가 중호 집에 처음 왔을 때 했던 말이다. 그때부터 '라면 먹고 싶다'는 건 둘 사이에서 그런 뜻이 되었다.


  중호는 '또 해 줄 거죠?'라고 말할 때의 은수를 떠올리며  꽁꽁 언 오징어를 꺼내 물에 풀고, 사 온 것들을 정리한다. 맑은 날씨가 멈출 줄 모르고 식탁 위에 볕을 쏟아낸다. 필터를 산뜻하게 바꾼 영상처럼 중호의 주방은 활기가 돈다.


  이 집에는 방이 두 개 있다. 안방이라고 할 수 있는 큰 방만 지금 중호가 쓰고 있다. 그리고 작은 방. 그곳은 은수의 방이다. 물론 둘이 이 집에 같이 살 때 은수는 중호와 함께 큰방에서 잤다. 종종 은수는 혼자 있고 싶어 했는데 그럴 때마다 작은 방에 들어가 한참 동안 나오질 않았다. 특별한 걸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요가를 하거나 낮잠을 자는 것 같았다. 중호를 데리고 그 방에 들어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중호는 은수를 닮은 그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거실과는 다른 냄새가 난다. 은수가 잘 때 다리 사이에 끼우고 자던 복숭아 인형도, 후아힌의 길거리에서 무명 화가가 그려준 그녀의 초상화도, 그녀가 좋아하던 바삭하고 무거운 이불도 깨끗하게 먼지를 벗은 채, 다 그대로 있었다. 그녀가 잔뜩 줄을 쳐 놓은 쿤데라의 소설도 그대로 있었다. 그녀 주변의 많은 것들이 그대로 있었다. 오로지 그녀만이 주기를 계산하기 어려운 미지의 위성처럼 그것들에 가까워지고 멀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중호는 은수방의 창문을 열고 있지도 않은 먼지를 다시 털고 쓸고 닦는다. 그녀의 구석구석을 떠올리며. 열린 창으로 바깥 공기가 바깥 냄새를 가지고 들어 온다.


  ‘서른 여덟이 된 은수는, 여전히 자기에겐 어딘가 추운 아이같이 보일 은수는, 이번엔 어떤 걸 가지고 이집에 들어올까.’


라고 중호는 오랫동안 은수를 상상하느라 멍해진다.


  은수방 청소를 마친 중호는, 금방 요리를 할 수 있게 해동된 오징어와 조개를 손질하고 야채를 씻어 둔다. 그리고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커피머신을 세척하려고 물만 넣어 돌린다. 마트에서 급조한 흔한 커피를 은수가 좋아할지 모르겠다고, 인터넷으로 은수가 좋아하는 에디오피아 내츄럴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하며. 미리 빨아 둔 이불과 커튼이지만 냄새에 민감한 은수를 위해, 중호는 캔들도 켜고 베이비파우더 향이 나는 룸 스프레이도 뿌린다.






***다음 편에 계속

(부제는 '자우림' 노래 가사를 인용했습니다.)


https://brunch.co.kr/@redangel619/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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