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백김치와 다진 양념이 넘사벽인 ‘원소닭’
솥밥·계란말이와 궁합 좋은 ‘김삼보김치찌개’
돼지고기 숯불구이 전문 ‘서교가든숯불갈비’
2000년대 들어서면서 중장년층의 역사문화에 관심이 대폭 늘어났다. 기대 수명의 연장, 은퇴와 고령화 사회가 맞물린 인구사회학적 변화가 불러온 긍정적 사회 현상이다. 중장년들의 관심 영역이 평생 교육과 더불어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야외 활동으로 변화하면서 역사와 문화에 대한 외부 답사가 인기를 얻고 있다.
필자가 햇수로 10년째 운영하고 있는 역사인문공동체 문화지평은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로 역사문화 답사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지난 10년 간 서울미래유산 도보답사·아카이빙, 2천 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 서울의 종단별 첫 건축물과 주변 근대 건축물 답사, 물길 따라 점선면으로 잇는 서울 역사, 김중업·김수근 건축기행, 옛 전찻길 따라 시공간을 잇는 서울 역사, 알고 보면 더 흥미로운 근대건축물 테마답사, 표석이 품은 소멸문화유적을 따라 걷는 서울 역사 등 서울의 역사문화자원을 저인망처럼 훑고 다녔다.
또 조선왕릉 40기 돌아보기, 인천·제물포 개항 역사답사, 나의 해방일지 배경 대야미 답사, 풍수 명당지 살둔산장 답사 등 지방답사도 이어가고 있다. 이런 답사의 특징은 해설사를 대동하면서 정확한 역사 정보를 전달하는 한편 10km 이상 걷는 것이다. 무작정 걷기보단 지식과 교양을 채우는 답사가 여러모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부터는 외부답사 활동과 더불어 문지인문아카데미라는 실내강연 프로그램을 신설했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강연자를 통해 지식과 경험, 지혜를 공유하는 프로그램이다. 지금까지 15차례 진행했으며 10일에는 최근 ‘어른을 위한 말 지식’이란 책을 펴낸 노경아 한국일보 교열팀장이 ‘유익한 우리말 책수다’란 주제로 공유창신에서 16차 아카데미를 연다.
지난달부터는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엔 문화지평 주관으로 ‘시네맛클럽’을 시작했다. 문화가 있는 날과 그 주간에는 영화관, 공연장, 박물관, 미술관, 문화재, 스포츠 시설 등 전국 2,000여 개 이상 문화시설 할인 또는 무료관람, 야간개방 등 다양한 문화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극장은 수요일 하루만 가능하며 CGV, 메가박스, 롯데시네마 등 3대 멀티플렉스가 참여한다. 지난달 31일 문화가 있는 날엔 동대문CGV에서 이날 개봉한 ‘파일럿’을 봤다. 문화가 있는 날 극장 할인혜택은 오후 5시부터 9시까지며 2D관만 된다. 1만3000원짜리를 이날은 7000원에 볼 수 있다. 문화가 있는 날 혜택을 모르는 사람들이 의뢰로 많아 적어 봤다.
시네맛클럽은 영화 ‘시네마천국’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이자 중의적 표현으로 시네마(영화)와 맛집을 합쳐 놓은 말이다. 문화가 있는 날 할인 금액으로 영화도 보고 맛있는 식사도 하잔 의미로 만들었다.
이날도 종영 후 영화관 인근 종로 5가 닭 한 마리 골목으로 스며들어 ‘시네맛클럽’을 시전 했다. 대학천책도매빌딩 뒷골목은 생선구이가게와 닭 한 마리 집이 밀집해 있다. 지금은 ‘진옥화할매닭한마리’가 가장 붐비지만 이 골목의 맹주는 ‘원소닭’(원할매소문난닭한마리)이다. 필자가 원소닭을 드나든 지도 20년이 넘는다. 그 사이 화재도 한번 나서 오랫동안 문을 닫았던 일도 있었다.
원소닭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백김치와 다진 양념 소스다. 다른 닭 한 마리 식당에서 다들 흉내 내지만 미묘한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단 생각이다. 물론 입맛은 각자의 기준이다. 닭을 모두 건져 먹고 난 후 칼국수를 끓일 때 남은 백김치와 다진 양념을 넣으면 웬만한 칼국수 전문점보다 맛있다.
불이 났을 때 인근에 손님을 좀 빼앗겼다. 골목에 동종업종도 많이 생겨났고 게다가 해외여행객 가이드들이 진옥화할매네로 관광객을 몰아주다 보니 전과 같은 영화는 없지만 여전히 단골이 많은 집이다. 진원조닭한마리, 명동닭한마리 등도 이 골목에서 선전하는 닭 한 마리 집이다. 모두 맛을 봤지만 필자 입맛에는 원소닭이 가장 잘 맞았다. 명동닭한마리는 전동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어서 이동장애인과 함께 갔던 경험이 있다. 친절하게 맞아줬던 좋은 기억이 있다.
답사 후 맛집 방문은 ‘금강산도 식후경’과 상통한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이라도 마무리 식사가 부실하면 만족도가 떨어지고 프로그램이 엉망이어도 식사가 만족스러우면 마무리가 원만하다. 그래서 요즘은 문화지평 답사를 ‘맛있는 역사 산책’이란 부제를 달았다. 답사를 끝내고 마무리하는 식사에 신경을 쓰고 있다.
지난 7월19일은 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 77주기였다. 추모답사로 ‘몽양 여운형 로드’를 진행하고 메밀국수 한판 하기 위해 ‘광화문미진’을 찾았지만 대기 인원이 너무 많아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인원이 16명이나 되는 터라 식당 구하기도 쉽지 않다. 마침 자리가 있어 찾은 곳이 근처에 있는 제주 생고기 김치찌개 전문점 ‘김삼보한국관종로점’이다. 성격상 직영이 아닌 가맹 프랜차이즈는 가급적 피하지만 이날만큼은 선택지가 불가피했다.
다만 여의도에서 처음 접한 김삼보 김치찌개는 준수한 맛이었던 기억이 있어서 거부감이 크지 않았다. 특히 계란말이와 함께 먹는 김치찌개는 한 끼 식사로 훌륭했다. 무엇보다 정갈한 솥밥의 풍미가 맛을 꽉 채웠다. 전 같으면 1차 식사를 하고 2차도 주안상을 차리는 곳으로 향했지만 이날은 커피를 마셨다. 술보다 차를 좋아하는 분들이 좋아했다. 이 또한 프로그램 만족도를 높이는 요인이란 걸 새삼 느꼈다.
실내 강연인 문지인문아카데미도 마찬가지다. 주로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두 시간 정도 진행하다 보니 마치고 점심식사를 같이하게 된다. 지난달 7일에는 문지인문아카데미는 김한겸 고대 의대 명예교수이자 현 하나로의료재단 하이랩 국제진단센터장이 ‘미라가 전해주는 조선시대 한국인의 삶’이란 주제로 강연했다.
김 명예교수는 국내서 발굴된 여러 케이스의 미라에 대한 병리학적 소견을 쉽고 재미나게 풀었다. 강연 말미에 던진 화두가 오래도록 남는다. 미라 여덟 구가 여전히 고대의대 해부학교실과 고려대 구로병원 부검실 냉장고에 누워 있다는 것이다.
발굴 당시 입고 있던 옷이나 장신구 등은 국가유산(문화재)이 되기도 했지만 미라는 그렇지 못하고 대학병원이 관리하고 있다. 관리 비용 이전에 국가유산을 바라보는 문화재위원들의 시각이 아쉬운 부분이다. 태아를 품은 임부 미라는 세계적으로 희귀하고 앞으로도 연구가치가 높은데 말이다.
씁쓸한 입맛을 달래기 위해 이날 찾은 식후경은 서교가든에서 ‘스핀오프’한 ‘서교가든숯불갈비’다. 전통의 서교가든은 2020년 7월 말일부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이제는 고기구이집만 남았다.
삼겹, 목살 원육이 좋은 데다가 칼집도 정성스럽다. 돼지갈비는 대표메뉴답게 양념 감칠맛이 좋다. 노포 서교가든의 손맛이 전해진 듯 한 맛이다. 아쉽게도 1인분에는 갈비 대신 다른 부위가 나오지만 그래도 맛있다. 밑반찬 구성도 좋다 보니 손님이 참 많다. 옛 서교가든 앞마당 넓은 주차장이 또 하나의 강점이다. 아무리 바쁘고 급해도 친절하게 손님을 응대하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금강산도 식후경, 꽃구경도 식후사, 나룻이 석 자라도 먹어야 샌님 등은 아무리 재미있는 일이라도 배가 부르고 난 뒤에야 흥이 난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포만감은 최고의 만족감이다. 모든 프로그램의 완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