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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점직원 Dec 23. 2020

올해의 싱글

장(掌)편 소설 #.2

오래간만의 소개팅이었다. 남자는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유행을 타지 않는 모노톤의 깔끔한 차림. 말하면서 짧게 자른 머리를 한쪽으로 자주 쓸어 올렸다. 그가 안내한 망원동의 작은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제법 맛있는 식사를 했다. 특히 식전빵이 아주 맛있는 곳이었다. 별 말 없이 그는 식전빵을 추가해주었다.


말이 아주 통하지 않지는 않고 꽤나 눈치도 있는 쪽이어서 대화가 끊어지지는 않았다. 공통의 화제를 찾으려고 꽤 애썼는데 쉽지 않았다. 테이스트나 싼티 나지 않는 유머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저 나와 맞지 않았을 뿐. 아마 다른 자리에서는 꽤나 어필을 할 수 있을 법한 남자였다. 


그가 염두에 둔 카페가 사람이 그득했다. 그는 테이크아웃을 해서 한강에 가자고 했다. 12월의 바람이 꽤 쌀쌀했지만 따뜻한 커피 한 잔이라면 의지해서 걷기 좋은 날씨였다. 딱히 그가 마음에 들었다기 보다 그와 대화할만 했고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똑같이 따뜻한 카페라테를 주문한 그와 망원동 한강 공원으로 향하는 터널 쪽으로 걸었다. 그닥 인상적이지 않은 화제로 시덥잖은 대화를 나누었고 약간은 예의상 웃기도 했다. 사실 그역시도 내가 굉장히 마음에 든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우린 서로 나쁘지 않군을 되뇌이며 걷고 있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걸었다. 당산철교와 양화 대교가 모두 보이는 적당히 밝고 조용한 벤치를 골라 앉았다. 그는 입고 있던 두터운 오버 코트를 벗어 개켜 벤치에 걸어두었다.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맛있다는 듯이 커피를 마셨다.    



여태 대화가 끊기지 않은 것도 사실 기적같은 일이었는데 커피를 마시는 순간의 정적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얼마 전에 자른 앞머리가 자꾸 바람에 날리는 바람에 외손으로 정리를 하면서 커피를 마셨다. 테이크아웃을 해서 들고 나올만큼 훌륭한 맛있다. 맛을 음미하는 바람에 정적이 길어졌다.


"음악이나 들을까요, 이런 분위기에 잘 어울릴만한 곡이 있어요."


정적을 깬 건 역시 그였다. 내가 동의를 하기도 전에 그는 핸드폰을 꺼내서 음악을 고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를 만난 이후에 그는 단 한번도 핸드폰을 꺼내본 적이 없었다. 


"Movie라는 곡인데 요즘 제가 제일 열심히 듣고 있는 곡이에요" 

"아, 네"


스마트폰의 작은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음악이라기 보다 무슨 연극의 대사 같은 나레이션이었는데 영국식 영어같았다. 영사기의 릴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나직하게 기타소리가 이어졌다. 절대 절창이라고 할 수 없는 수수한 남자 가수의 목소리가 이른 봄바람과 함께 울려퍼졌다. 


연주며 노래 자체가 꾸밈이 없이 마치의 잘 개켜서 걸려 있는 그의 코트 같은 느낌이었다.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들어서 괜히 커피를 한모금 더 마셨다. 사실 좋았다. 이 노래 왜 이렇게 좋지? 커피는 왜 이렇게 맛있지? 


"노래가 너무 좋은데요. 진짜 마음에 들어요"

"그래요? 다행이네요. 한번 더 들을까요."


"네, 좋아요"


우리는 벤치에 좀더 느긋한 자세로 기대서 한번 더 노래를 들었다. 마침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볼륨을 약간 높였다. 우리는 별 다른 이야기 없이 음악에 집중하며 번갈아 가며 커피를 마셨다. 커피가 미지근해졌지만 여전히 맛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껴마시고 싶을 정도였고 노래는 반복버튼을 누리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겨울 바람이라고 하기엔 그리 차갑지 않은 바람에 흩어지는 기타 소리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이 노래가 몇번 재생됐는지도 감각이 없었다. 절대 추워서는 아니었다.


"너무 늦은 거 아닐까요? 들어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슬슬 추워지기도 하네요"

"네 슬슬 일어나봐야 할 거 같네요."


그는 차를 한강 주차장에 주차시켜 놓았다며 지하철역까지 바래다 주겠다고 했다. 주차장까지 걸어가며 물었다"


"아까 그 곡은 누구 곡이에요?"

"톰 미쉬라는 영국 사람이에요. 기타리스트기도 하고 정확히는 싱어송라이터죠."   


'영국 가수'라고 하지 않고 '영국 사람'이라고 표현한 부분이 어쩐지 맘에 들었다.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채우는며 벨트가 '딱'하고 체결되는 소리를 듣는데 종잡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와는 애프터로 몇번을 더 만났다. 좋은 사람이었고 친절하고 똑똑한 사람이었다. 가볍지도 않고. 그 이상은 아니었고 결국 우리의 인연은 거기까지 였다. 우리는 서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거 같다며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당신 같은 훌륭한 사람과 여사친으로 지내는 것 몸씁 짓일 거 같다'고 생각했다. 그의 모노 톤의 옷차림 같은 깔끔한 안녕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의 바람과 톰 미쉬의 음악, 그의 잘 개켜진 코트만큼은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은 선연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그 이후 나는 자주 톰 미쉬를 들었고 그 날을 떠올렸다. 잠시 동안의 설램이랄까, 12월의 훈풍처럼 마법 같은 순간이 음악을 튼 순간 불어왔다. 


나는 내 멋대로 그 날을 '톰 미쉬 데이'로 정하기로 했다. 고마워요 모노톤의 당신, 우리는 인연은 아니었지만 그날 밤만큼은 무척 특별했어요. 톰 미쉬와 올해의 싱글을 소개해준 당신과 함께 한 그날 밤은 잊지 못할 거에요.


https://www.youtube.com/watch?v=ffzbacDuaw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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