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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점직원 Dec 16. 2020

중산층의 속물근성과 우울

1. 나의 우울의 시작


나는 중산층들의 속물근성을 혐오하면서 사랑한다. 


지인들은 꽤 아는 사실인데 나는 처가의 결혼 반대로 청혼 후 3년 후에 식을 올릴 수 있었다. 다행히 해피엔딩으로 끝나 양가로 부터 많은 축복을 받으며 결혼을 했다. 가장 결혼을 반대하던 분 중 하나인 처외삼촌은 웨딩 비디오에서 딴 인터뷰에서,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 결혼식이었어"


라는 말씀을 하시기도 했다.


축복은 축복이고 3년 간의 기간은 내상을 입기에 충분한 시간이 었다, 아마 아내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비장이든 췌장이든 간에 내장 어딘가에 딱지가 앉을 수 없는 상처가 남아 있을 것이다. 아내는 뭐 부모님이고 자기 집안이니 그렇다 쳐도 확실히 나는 그렇다.


당시 나는 현재 LGU+의 자회사에 다니다가 이직을 해서 SKT 사업을 주로 하는 모바일 솔류션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처가와는 걸어서 10분 거리. 매일 출퇴근을 하면서 참 아스라한 마음을 품었다. 고작 10분 거린데 말이지. 


대학 때 부터 시작해서 연애 기간이 꽤 긴 편이라 종종 아내의 부모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밥도 몇 번 얻어먹었다.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는데 한번은 경기도 외각의 한 한정식집에서 밥을 사주셨다. 그때 아버님이 내게 말씀을 건내셨다.


"자네는 앞으로 무엇을 할 생각인가?"


나는 전형적으로 문과적으로 답했다.


"네 아직 졸업 전이고 특별히 진로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아버님은 구체적인 직장이나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방향 정도는 듣기 원하셨을 것이다. 문송한 이유로 나는 구체적인 답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인생 알 수 있나 어떻게 될지. 


하지만 이게 앞서도 언급한 일이 있지만 당시 중산층들 자제들은 대체로 진로에 대한 고민이 중고등학교에 끝나 있었다. 내가 그 부분에  대해 구체적인 답을 내어 놓지 못했으니 '이 녀석은 비전도 없고 미래도 없는 그런 계획 없는 놈'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나는 극심한 반대 를 경험하면서야 이때의 내 대답에 대해 곱씹어 보게 되었다. 


어머님의 경우는 "아마도" 좋은 의도셨겠지만 궁합을 보셨다. 한번 가족 행사에 참석한 일이 있었는데 처 외할머니가 생시를 물으셨다. 올게 왔다 싶어서 솔직하게 말씀을 드렸다. 


아니나 다를까, 궁합이 최악으로 나온 것이다. 첫번째는 아내가 병이 든다고 했다고 한다. 원래 궁합은 하는 이마다 해석이 다르고 대개는 좋은 소리를 들으러 가는 것이다. 다른 곳으로 옮겼다. 두 번째도 나쁜 소리가 나왔고, 세 번째 간 곳에서는 아내가 단명한다고 그랬다고 했나? 하다못해 좋은 소리가 한 마디 쯤은 나와야 하는데 어머님 입장에서는 반대의 이유가 굳건해졌다.


뭐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었겠지만 내 생각에는 내가 그렇게 야심이나 욕심 없이 고만고만한 변변찮은 직장에 다니고 있으며 (세속적)히마리가 없어 보이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아버님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기업의 임원까지 하셨고 어머님은 교사로 퇴직하셨으니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실존적인 중산층 집안이었던 처가의 기준에서 봤을 때 나는 함량미달이었던 것이다. 


결혼을 반대하는 기간, 나는 번외인간이었다. 아내는 마치 내가 없는 존재라는 전제로 몇번 부모가 주선가 선을 보러가기도 했다. 대개 나오는 사람들은 강남을 근거지로 한 환경에서 자라나서 삼성에 다니거나 박사 학위를 받아서 연구원으로 근무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유학을 다녀와서 막 교수 자리를 알아보던 사람들이었다. 스펙으로 싸우자면 나는 백전백패였다. 장인 장모님이 생각하는 사위감의 어떤 사회적 지위랄까, 그런 구체적인 상이 그려지는 자리였다. 


나뿐만 아니라 아내로서도 상당히 모멸적인 그 자리를 잘 견뎌주었다. 우리가 결혼으로 가족을 이루는데 8할은 진짜 아내의 몫이다. 


결혼을 한 후에는 변두리긴 하지만 서울에 대출 끼고 분양받은 작은 20평대 아파트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회사도 결혼 직후에 지금의 회사로 옮겨 10년 이상 다니고 있고. 친구들 대부분은 전세 대출 6천만원 받아서 신혼살림 시작하고 여전히 집한채 없이 떠도는 녀석들도 많은데. 


요사이도 자주 장인 장모님의 못마땅한 기운이 느껴진다.대출은 좀 없었으면 좋겠다, 좀 더 큰 집이 좋지 않겠지, 좀 더 강남 쪽으로 이사하는 것은 어떠니, More, More.... ...


결혼반대라는 게 일종의 근원적인 거절이다. 번복되어 허락된다고 해도 근원적 상처는 남아서 아물지 않는다, 임시로 반창고 같은 거 붙이고  참는 거지. 이젠 법적으로 가족이 됐으니 과거는 잊자? 차라리 이런 류의 말이라도 들었으면 좋았겠지만 들은 바 없다. 그냥 그 감정들과 역동들은 삶의 어딘가에 뭉개져 있다. 어떤 말이나 상황, 맥락에서 젤리괴물처럼 형태와 부피를 갖추어 나타나겠지.


그토록 바라던 중산층적 삶과 결혼을 했지만 그 대가는 혹독하고 톡톡하다. 나는 영원히 이 상처를 끌어 안은 채 살게 될 것이다. 잠시 잊고 있더라도 특정한 버튼이 눌러지면 다시 피가 흐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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