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점직원 Nov 26. 2020

"개들도 천국에 가는가"에 대한 짧은 단상

우울을 벗어난 이야기들 #.1


나는 개나 고양이, 즉 반려동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털 달린 녀석들은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다소 냉정한 편에 가깝다고 해야하겠다.


아내는 반대다. 아내는 털 달린 녀석들을 사랑한다. 아이를 낳고는 좀 달라지긴 했지만 지나가는 강아지를 보면 예뻐해줘야만 했다. 둘아서만 살게 되었을 때도 아파트 단지내 길고양이들을 보면 항상 야옹이든 나비든 이름을 불러주었다. 겨울이 다가오면 길고양이들의 안부를 자주 걱정했다. 물론 행동주의자는 아니어서 동내 캣맘을  자처하지는 못하지만.


처가에서 꼬맹이라는 이름의 말티즈 한 마리를 키웠다. 이름에 맹자가 들어가서인지 몰라도 내가 보기엔 엄청 맹한 녀석이었다. 먹을 것만 밝히고 말이야. 참 이상한 일은 이 녀석이 나를 무척 좋아했다는 점이다.


아내와 나는 처가의 심한 반대로 청혼 3년만에 결혼을 '이루었다' - 이루었다는 표현이 적확하다. 결혼 승낙까지 지난한 세월을 겪어야 했다. 처가를 찾는 일이 거의 지옥의 문지방을 넘는 것보다 두려웠던 때, 달갑지 않은 사위감과 나를 거부하고 싶은 장인 장모가 마주한 매우 첨예하고 불편한 시간, 이 꼬맹이 녀석이 나만 들어가면 아주 생 난리를 피웠다. 거의 1미터 높이를 쉬지 않고 팔짝팔짝 뛰었다. 아마 성궤를 되찾은 다윗의 춤보다 열광적이었을 것이다. 꼬맹이의 맹목적인 환영은 아이러니나 역설 사이 어딘가의 지점에서 또 다른 긴장을 만들어 내었다.


항상 불청객이란 자격지심 - 이라고 쓰고 실존이라고 읽는다 - 에 빠져 있던 나에게 녀석은 대단한 골칫거리였다. 당시의 나는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는 그 열정적인 환대를 받아드릴 여유가 없었다. 내 주변을 서성대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녀석이 고까웠다. 장인 장모님 아내가 주변에 없을 때 몰래 쥐어박기도 수차례였다.


딸이 아직 뱃속에 있을 때, 불의의 사고로 녀석이 세상을 떴다. 꼬맹이가 가족이었던 아내에게 큰 충격이 될 터, 아이를 낳기 전까진 비밀에 붙였다. 다행히도 심한 입덧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아내는 잘 속아넘어가 주었다. 덕분에 건강하게 딸을 낳았다.


아내에게 했던 거짓말은 다음과 같다. 혹시 아기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  잠시 지인의 집에 맡겨 놓았다는 것이었다. 아기를 낳고 출산 휴가 중 한 달을 처가에서 보내게 되었다. 여유가 좀 생긴 아내가 "이제 꼬맹이가 집에 와도 되겠다"고 했다. 도무지 거짓말을 이어 갈 수가 없어서 실토해버렸다. 아내의 반응이 생각보다 담담했다. 마음을 놓았다.


알고 보았더니 아내는 다들 자는 밤 새 수차례 꼬맹이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담담할 수가 있나, 그리 털달린 녀석들을 좋아하는 사람이, 게다가 꼬맹이는 가족이었는데 말이다.


연애 기간 중에 서점을 자주 들렀다. 아내는 주로 그림책 코너에서 나는 종교 코너에서 시간을 보냈다. 언젠가 아내가 골라들고 온 책이 흥미로웠다. <개들도 천국에 가나요>라는 그림책이었다. 털 달린 녀석들을 사랑하고 꼬맹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무척 혹하는 제목이었을 것이다.


"오빠 개들도 천국에 가겠지? 우리 꼬맹이도 나중에 천국에서 만날 수 있겠지?"


당시에 아내가 내게 물었다.


"글쎄. 잘 모르겠네. 성경에 개들이 천국에 간다는 이야기는 없잖아. 구원의 여부는 우리한테 달린 게 아니고 신비의 영역이니까 개들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걸 기대해볼 순 있디 않을까?"


이런 정도로 대충 얼버무려 대답했던 것 같다. 아내는 그 그림 책을 사들었다.


아마도 꼬맹이가 죽는 후 아내는 그 그림책을 떠올라며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꼬맹이를 그리 달가워 하지 않던 나도 녀석의 소식을 들은 후, 아내 몰래 책장에서 그 그램책을 꺼내 보았으니까. 공교롭게도 그림책애서 묘사된 개들은 꼬맹이처럼 하얀 털을 가진 녀석이었다. 날개를 달고 하늘로 날아 오르는 모습이 제법 근사했다. 일촉즉발의 긴장 속에서 언제나 나를 가장 반겨주던 녀석이 떠올랐다. 마치 빨판 상어처럼 나를 따라 다니던 녀석을 떠올렸다. 새벽녘에 나와 자겠다고 앞발로 문을 긁어 숙면을 망치던 녀석을 떠올렸다. 잠시 녀석의 명복을 빌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털 달린 녀석들에게 내세가 있을 지 없을 지에 대한 어떤 신학적 철학적 논의가 있는지 모르겠다. 다만 예쁜 상상력으로 점철된 환상적인 그림책 한권이 그 어떤 명쾌한 신학적 논리보다 훨씬 위로가 되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생명과 체온을 가진 존재들에게 좀 더 살갑게 대하여야 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이젠 털 달린 녀석을 사랑하는 여자 하나도 아닌 둘과 같이 살고 있으니까.

작가의 이전글 私小한 우울의 시작#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