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의 우울의 시작점(2)
나의 우울의 시작은 어디일까? #.4
그나마 좀 친하게 지낸 몇몇 친구들은 그룹 과외를 제안하기도 했다. 우리집 경제 사정으로 할께 할 수 없고 거절을 한 후로는 더 가까워지기 어려웠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는 굉장한 속물이고 중산층적 삶에 대한 로망을 항상 (지금도 여전히) 지니고 있다. 실존과 내 욕망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었고 내 모교는 바로 그 간격을 체감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학교 바로 뒷 편에서 사는 친구 집에 놀러간 일이 있었다. 반 지하에 독립 공간이 있는, 다세대 주택이 아닌 2층 양옥집이었다. 여름이었는데 친구는 덥다며 자신의 방에 독립적으로 설치되어 있는 에어콘을 틀었다. 음악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진 터라 친구는 새로 나온 밴드의 음악이라며 은색의 리시버의 오디오 컴포넌트에 CD를 올려놓았다.
물을 좀 마시고 싶어서 주방에 있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먹을 거리는 하나도 없고 필름만 잔뜩 들어있었다. 친구한테 냉장고에 왠 필름이냐고 물었다.
"우리 엄마가 사진 작가거든, 필름은 원래 냉장고에 보관해야 해. 물은 저 옆에 있는 냉장고에 있어"
그 친구와 압구정동의 상아레코드를 종종 갔었다. 당시 나는 용돈이 충분치가 않았다. CD를 사고 싶으면 아주 가끔씩 어머니가 도시락을 거를 때 매점에서 우동 사먹으로 2천원 쯤을 주셨다. 다섯 번쯤 점심을 거르고 나면 용돈을 합쳐 딱 CD 한장을 살 수 있었다. 상아 레코드에서 나는 전심 전력으로, 한 장으로 최대의 음악적 효용과 감흥을 끌어낼 수 있는 최고의 음반을 고르기 위해 CD장을 뒤지고 또 뒤졌다. 친구 녀석은 이미 대 여섯장의 CD를 골라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CD 콜렉션은 지금 살펴 보면 형편이 없다. 내가 가진 기회는 한정적이어서 그 한 번의 기회로 특별한 음악적 경험을 해야 해서다. 다시 이야기하면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나오는 류의, 소위 타임리스라고 불리는 앨범들은 고를 수가 없었다. 내 콜렉션에는 원히트원더, 한물간 밴드, 지금은 끔찍한 자켓에 눈도 돌리고 싶지 않은 데스메탈 앨범, 베스트 앨범 같은 것들이 수두룩 하다.
<상실의 시대>에서 미도리는 "부자들은 자신이 가진 게 없다면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야"라고 말한다.. 미도리는 자신이 그들보다 가진 게 없기 때문에 없다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없었다고 했다. 번번히 자신이 빵이나 음료수 값을 내기 일쑤였다 고. 나는 그조차도 할 수 없었다. 당시의 나는 부족 그 자체 였다.
박탈감이랄까 열등감이랄까, 부러움이랄까, 질투랄까, 이런 심리들이 짬뽕이 된 채 3년을 보냈다. 난 에어컨도 없는 코딱지 만한 우리 집도 쪽팔렸고, 쇠 깍는 아버지의 직업도 쪽팔렸고, 맨날 몸빼바지 비슷한 걸 입고 뽀글뽀글하게 파마를 하고 다녔던 전혀 세련되지 못한 우리 어머니도 쪽팔렸다.
내가 굉장히 상징적이지만 재수 없게 생각하는 부류 중의 하나가 "교편을 잡고 계신 부모님(어느 한쪽 또는 둘 다) 슬하에서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게" 자랐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는 사람이다. 선생님들 월급은 생각보다 적지 않고, 지식인의 자녀로 자라면서 획득하는 문화자본은 일생에 걸쳐서 문화적 자산을 뛰어 넘어 경제적 자산이 된다. 열등감이나 아무짝에 쓸 데 없는 열패감 같은 걸 지니고 살 필요가 없다는 건 특권이다.
나란 인간의 스노비즘적인 지질함은 내 안의 우울의 삼차원에 입체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진짜 박탈이든 상대적 박탈이든 박탈의 감각은 필연적으로 우울을 자아내기 마련이고, 특히 나 같은 경우는 속물적 감수정, 중산층적 삶에 대한 이상한 동경이 다른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방식의 우울의 양상을 만든 것 같다. 물론 앞서 이야기한 대로 여전히 지속적으로 나의 우울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치고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