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이 넘쳤던 한국 차 그것은,
물론 94년식 씨엘로도 저런 문짝이었기 때문에 운전하다가 창문을 열고 싶으면 왼손은 운전대를 잡고 오른손은 열심히 핸들을 돌려야 했다.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으니까요.) 하하하. 게다가 이 차는 수동이어서, 백만년만에 스틱을 잡았다. 1종 보통 면허를 여기서 써먹을 줄이야. 브리즈번 같은 지방 도시에선 특히, 남자라면 픽업트럭! 캠핑은 사륜 구동! SUV는 엄마들의 로망! 이런 식이라 수동 운전 능력이 의외로 요긴했는데, 요즘은 트럭이든 SUV든 다 자동이라 좀비 아포칼립스가 와도 자동 면허로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을 듯하다. 라디오에서도 "수동 운전은 대장장이 같이 인간 문화재로 보존돼야 할 스킬"이란 말이 나오고... (거 말씀이 좀 심하신 거 아닌가요.)
수동 운전의 꽃은 역시 클러치다. 오래된 차다 보니 클러치도 얼마나 무거운지 오른쪽 허벅지에 근육이 생길 정도였다. 특히 차가 막힐 때 클러치를 밟다 보면, 스타킹 왼발에 구멍이 날 정도가 된다. 하지만 수동 차는 싼 걸. 이 차 역시 저렴하기에 우리의 손에 들어온 차였고, 약간의 잔기술을 익혀 비용을 절감하는 게 어찌 보면 호주식 생활 능력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차의 진가는 아직이다. 그것은 문짝도 스틱도 아니었다. 이 차의 탑 시크릿 히든 거시기는 바로바로... 파워 스티어링 핸들이 아닌 것! 응? 무슨 말이냐면요. 이건 정말 모르시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는데, 원래 핸들을 움직여서 타이어를 돌리는 건 꽤 힘든 일이다. 파워 핸들이란 모종의 장치를 통해 살짝만 핸들을 움직여도 타이어가 돌아갈 수 있게 보조 장치가 된 핸들이다. 굉장히 보편적이기 때문에 나도 이 차 전엔 파워 핸들이 아닌 핸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파워 핸들이 아닌 핸들은 꽤 묵직하다. 핸들에 4-5 킬로 정도 무게가 달린듯한 느낌?한 손으로 조종하기 수월치 않다.
자동차도 급속 노화?
이 차는 할머니답게 이 차를 몰았던 5년여 간 점점 기능이 퇴화하셔서 어느 날 밤, 디스플레이가 안 켜지기 시작하더니, 테일 라이트가 나가고 (밤에 운전할 때마다 경찰 만날까봐 심장이 쫄깃했다), 운전하는데 룸미러가 갑자기 뚝 떨어지고 (진짜 깜짝 놀랐다), 마지막엔 에어컨이 고장 났다. 딴 건 몰라도 에어컨 고장은 정말 힘들었는데, 이 동네는 차를 밖에 세워 놓으면 운전대가 뜨거워져서 잡을 수가 없는 동네다. 한여름에 아이폰을 깜빡 놓고 내리면 한 시간 안에 과열로 전원이 꺼지는 정도. 아침에 차를 타고 부동산 뭐시기를 보러 가는데, 진짜 무슨 철 도시락에서 구워지는 느낌이라 그냥 집에 온 적도 있었다. 주차 한 번 하려고 무거운 핸들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낑낑대며 돌리다 보면, 정말 헬스장이 따로 없었다. 땀이 쫙 빠지는 게... 그런데 인건비가 비싼 이 쪽 사정상 (부품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고치는 게 사는 거보다 비싸서... 결국, 이 차와의 인연은 600불에 마무리 됐다. (구) 남편의 말로는 갓 면허 딴 십대들이 와~ 싸다 하고 히죽히죽 웃으며 모셔 갔다고 한다.
어쨌든 집에 차가 한 대 였던 시절, 나는 이 차를 몰고 드디어 호주 무대에 진출(?)하게 되는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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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옛날엔 자동차는 식인종 도시락, 만원버스는 식인종 종합 선물세트라는 유머가 있었더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