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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니 Apr 12. 2021

88년과 시라의 꽃방

그 때 어린이었던 나와 지금 아이를 키우는 나.

우연히 1988년 11월 실제 방영된 CF 모음을 보고 깜짝 놀랐다. 스타일은 촌스러울지라도 상품은 이미 익숙한 것들이다. 현대 백화점 광고는 지금 보니 a-ha의 Take on Me 뮤직 비디오 따라했고-  빠라바라 빱, 빠빠빠 빠라바라! (고인물 인증) 이 때가 내 인생 가장 테레비 많이 봤던 시기인데 (저녁 5시부터 12시까지 항상 켜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놀랍게도 다 기억난다. 씨엠송이랑 말투랑 다 기억나.. ㄷㄷㄷ 어린이의 기억력이란 무서운 것이구나... 새삼 이래서 조기교육, 조기교육 하나 싶기도 하고. 영상에는 코보라는 어린이 장난감 로봇, 어린이 영어 교재 같은 것도 있는데, 이런 물건들을 아이들에게 사 줄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춘 중산층이 88년도에 있었다는 게 새삼 놀랍다.

http://blog.naver.com/hipard/220195841331


그 중엔 시라의 꽃방이라는 마법의 인형 화장대 광고도 있다. (영상 맨 마지막) 이건 집에 한참 물 새던 시절, 동기는 모르겠지만 어느 날 밤 갑자기 아버님이 사 오셔서 집에 한바탕 천둥번개가 몰아쳤던 물건이다. 장미 꽃봉오리를 마법봉으로 터치하면 꽃봉오리가 활짝 열리며 바로크인지 로코코인지 풍의 화장대로 변신하는 환상적인 럭셔리 아이템. 나는 예상치 못한 선물에 기쁘면서도, 어떻게 이렇게 비싼 걸 막 사 올 수가 있냐고 화를 내던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무거운 죄책감을 느꼈다.


문제는 또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인형은 한 개 뿐이었다. 인형 놀이를 안해보신 분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인형은 기본 두 개가 있어야 인형끼리 서로 대화를 하면서 혼자 놀 수가 있다. 다행히 나는 인형 놀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친구가 인형 가지고 오면 같이 놀고 그랬다. 하지만 인형 의상도 디폴트 한 벌 뿐이었기 때문에, 저 화려한 화장대 앞에 있는 내 인형이 뭔가 타워 팰리스에서 동묘에서 산 이천원 짜리 옷 걸치고 있는 것 마냥 뭔가 어색했던 기억이 있다. 마치 신데렐라가 무도회 가려고 돈을 모아 옷을 샀는데, 아차, 옷을 처음 사 보니 구두랑 핸드백도 필요한 지 몰랐다, 근데 돈은 옷 사는데 다 써 버렸네? 이런 느낌?


바로 그런 느낌이 우리 부모님의 교육 스타일이었다. 여유가 생길 때, 분위기에 따라서, 지속적이지 못한 경험이 베풀어졌다. 나는 대충 어떻게 옷을 마련해 무도회장에 끼어 들어갔지만 누가 내 구두랑 백이 옷이랑 안어울린다고 할까봐 걱정이 됐다. 노동자가 책을 읽으면 복지 국가라는데, 그 노동자가 애가 있으면 육아 책을 읽었겠지? 아니면 육아하는 노동자는 노동자라는 보통 명사에 속하지 않나 (언제나 그렇듯)? 여튼 한국은 복지국가가 아니었고, 당시 부모님은 티비 외에 다른 걸 볼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당장 먹고 살 게 문젠데, 88년 이후 한국이 어떻게 변해갈지, 자녀들이 무엇을 준비해야 할 지 무엇을 알 수 있었으랴... 그런데 해외에 나와 보니까, 88년에 그걸 알았던 부모님도 생각보다 꽤 있었더라. 뭐 어쨌든 이렁부렁 나름 잘 살고 있지만...


시라의 꽃방으로 돌아와서, 저 기억 속의 물건을 서치한 계기는 어무니가 보내주신 손녀 사진이었다. 사진 속엔 곧 3살이 되는 조카가 엄마가 사 주신 인형 집을 들고, 귀여운 핑크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엄마는 딸에게 못 해 준 거 손녀에게 해 준다며 벌써 몇 번이나 얘기한 참이었는데, 시라의 꽃방 얘기를 하니 기억을 못했다. 그냥 못해준 것만 기억 나신다고. 같은 시기 차곡차곡 돈을 모으고 정보를 좇아 강남으로 이사하신 어머니 친구 딸들은 무슨 여차저차 코스를 밟아 선을 봐서 판사랑 결혼했대나 준재벌이랑 결혼했대나... 뭐 거기엔 참으로 뭐라 드릴 말씀이 없다. 걔네들은 사실 불행할 거야, 라고 말 할 수도 없고, 육아가 문제가 아니라 애가 문제였다 라고 말하는 것도 엄마 얼굴에 침뱉기요, 그렇다고 앞으로 내가 더 잘 살게 될 거야 라는 거짓부렁도 칠 수가 없으니, 얼굴은 내가 더 예쁘다 라고 말하는 게 그나마 가장 양심에 가책이 덜 가면서 엄마가 납득할만한 이야기가 아닐까... 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얘기를 했더니, 대번에 자세를 똑바로 해라, 옷 좀 잘 입어라, 머리 좀 단정하게 하고 다녀라 라는 잔소리 3종 세트가 돌아왔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흔의 딸이 정말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쁠 것처럼.


솔직히 가정 환경이 조금 더 받쳐줬더라면 하는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다. 나이를 먹고 정말 부자인 분들을 뵙고 보니, 부모의 돈과 인맥과 지식이 참 좋더라고. 근데 또 한편, 나이를 먹고 보니, 우리 00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 언젠가는 꼭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는 말을 듣고 자란 사람이 생각보다 별로 없는 것도 알게 됐다. 우리 엄마의 경우는 아직도 그걸 믿고 계신듯 하니, 어쨌든 엄마만이 할 수 있는 일은 해 주신 게 아닌가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육아도 대략 그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 2020년의 세상은 여전히 예측불가고, 나는 노동자고, 어딘가엔 더 많은 자본과 비전을 가지고 계획적인 육아를 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어쨌든 내 아이도 이렁부렁 나름 잘 크리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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