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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니 Nov 30. 2021

이태리에서 축구 본 얘기

이태리의 종교는 가톨릭, 축구,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175년 전, 농담이고 십몇 년 전, 밀라노에 갔었다. 친분이 있는 현지인의 안내였다. 처음 가는 밀라노는 파리보다 아름답고 깨끗했다. 밀라노의 두오모를 처음 봤을 때가 아직 생생하다. 그렇게 장식이 다닥다닥 많이 붙어 있으면 좀 조잡하고 정신없어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아니었다. 그 건물은 아름다움을 떠나, 아, 이게 바로 원조구나, 하는 깨달음을 주는 데가 있었다. 내가 여태까지 보아 온 유럽 풍이란 것들은 모두 이곳을 가리키는 나침반에 불과했느낌이랄까. 안 쪽은 뭐 말해 뭐하랴,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며 바닥의 모자이크며 감탄하며 구경하고 있는데, 신기한 게 보였다. 안내인(남)이 아, 이건 성수대라고 하면서 성수를 찍어 성호를 긋는 걸 보여줬는데, 앗... 밀라노 원조 성수 덕일까? 후줄근한 유럽인이 갑자기 후광을 두른 듯 엄청나게 멋있어 보여서 깜짝 놀랐다. 그 자연스럽고 군더더기 없는 우아함... 그의 손가락과 손목, 이마와 코가 그 여상한 손짓 하나를 위해 천오백여 년 동안 진화해 온 듯, 엘레강쓰하고 빤따스띡하고 홀리에 몰리한 로마의 무언가를 본 느낌이었다. 역시 대한 사람 대한으로, 이태리 인은 이태리에서 가장 멋진 법인가 보다.


또 이태리하면 뭐다? 축구. 이태리 두 번째의 국교. 밀라노의 산 시로 구장은 현지인의 말에 따르면 축구장의 "라 스깔라". 고품격 럭셔리 문화 공간이란다. 그는 표를 구하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생색을 내며 이태리 특유의 작은 차에 우리를 밀어 넣고 천몇 년쯤 된 가도를 곡예하듯 달렸다. 밀라노의 노 매너 운전자들에게 끊이지 않는 욕을 중얼거리며 (밀라노 옆 동네 사람이었다). 이태리어는 참 욕도 뭐랄까, 모차렐라 치즈처럼 찰지게 쭉쭉 늘어지더라고. 첨엔 욕인 줄 몰랐잖아.


드디어 발(로 하는) 예술 공연장 도착. 그러나 방금 너네 나라 최고 건축 예술 중 1을 보고 온 우리는 좀 이해가 안 되는데? 왜냐면 외관은 그냥 고층 건물 같고... 내 눈엔 상암 월드컵 경기장이 더 멋있는 거 같은데... 그런데 들어가 보니 그곳은... 축구장이 아니었다. 그곳은 퀴디치 경기장이었다! 쏟아질 듯한 팔만의 관중석이 절벽처럼 둘러싼, 빛나는 녹색의 직사각형, 인테 밀란과 AC 밀란의 홈구장. 현대의 콜로세움. 라 스깔라는 못 가봤지만 왜 여기가 축구장의 라 스깔라인지 스포츠의 ㅅ도 모르는 나조차도 알 수 있었다. 아주 직관적인 이태리 미감, 칭~찬~해~. 그날은 홈 팀과 원정 유럽 팀의 경기로 심상치 않은 긴장감이 벌써부터 구장을 맴돌고 있었다. 사실 난 오프 사이드도 이해 못 하는 사람이고, 축구장은 한두 번 가 본 게 전부인데, 심상치 않다는 걸 어떻게 알았냐면....


1. 꽉 찬 홈 팀 응원석 VS 두 줄로 앉은 타국 팀 서포터들을 두 줄로 완전히 둘러싼 무장 경찰. (다시 말해 원정팀 두 배 인원의 무장 경찰이 동원됐단 얘기)

2. 홈 팀 골대 뒷자리는... 살아 숨쉬드만 아주 그냥. 경기 진행이고 뭐고 계속 사람들이 일어나서 몸을 흔드는 통에 멀리서 보면 그냥 계속 파도가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3. 일반석 사람들도 의자 등받이에 기대질 않음. 종교 재판도 저렇게 심각할 수 없다 싶을 정도로 경기 시작 전의 텅 빈 운동장을 말없이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는 사람들. 더 무서운 건, 술도 안 먹고 커피 마시면서 그러고 있더라고... 왜냐, 경기장에서 알코올 금지예요... 너무 경건해... 이태리 국교 축구 맞구나...


참고로 호주에서 크리켓 구장에 가 보면 말이죠. 이게 진짜 시간제한이 없는 경긴데요... 풀타임으로 닷새를 하니까요... 사람들이 다들 느긋하게 기대앉아서 돌아가며 맥주 사 오고 화장실 가고 신문 읽고 (뭐) 같이 온 사람들끼리 시시덕거리고 있음. 일곱 시간 반 동안... 시즌이 여름이라 땡볕은 또 어찌 심한지 뒷골 땡길 정도로 시원한 맥주가 필수로, 경기 끝날 때쯤엔 저 인간들이 햇볕 때문에 벌건 건지, 맥주 때문에 벌건 건지, 경기는 본 건지... 무라카미 하루키가 시드니! 에서 축구 관중석의 화장실 접근성이 너무 좋아서 감탄했다는데... 그야 거긴 원래 크리켓 구장이니까요, 맥주가 순환하는...


다시 이태리로 돌아와서, 휘슬이 울리고, 킥 오프! 나와 동행은 안내자인 두 명의 이태리 남성들 사이에 앉아 관람을 시작했는데, 홈 팀의 이성을 갖다 버린 서포트는 놀라울 정도였다. 한 번은 홈 팀이 명백한 반칙을 해서 옐로카드를 받았는데, 우~ 하는 거친 야유가 라따뚜이 솥만치 깊은 경기장에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팬들은 모차렐라에 불닭 소스를 얹은 듯한 이태리 욕을 찰지게 뱉으며 그도 부족하다는 듯 열정적으로 허공에 손을 휘젓고 있었다. 팔만 명이 각자 오페라라도 지휘하는 듯한 그 소음에, 동행이 "아니, 좀 심한 거 아냐? 저 선수가 발로 상대 선수를 이렇게 걷어 찬 거 나 봤는데..."라고 옆 이태리인에게 영어로 말했는데, 갑자기 30대 전후의 건강한 이태리 남성들이 우리의 뒤통수를 앞 줄 의자 등받이 아래로 급히 처박으며 쉿, 쉬잇... 아까 그 성호를 그었던 손가락을 입술 앞에 대고 급박하게 쉬를 하며 주변을 살피는 것이 아닌가. 마치 갑작스레 총격을 당한 마피아처럼... 그렇다. 우리 일행은 방금 목숨이 위험했던 것이다. 축구 숭배장 한가운데에서 이성적인 발언을 하다니? 미친 거 아냐? 무장 경찰과 알코올 금지가 왜 있겠냐고요... 알코올 없이도 저렇게 미쳐 날뛰니까... 하. 하. 하. 이태리 지인들이 우리를 사이에 두고 앉은 것은 매우 용감하고 사려 깊은 행동이었던 것이다. 


아프리카 성령 교회보다 더 열정적인 이태리 종교를 맛 본 우리는 이후 이태리 교민에게서 2002 월드컵 회고를 듣게 된다. 그렇다, 한국이 이태리를 이긴 그 순간... 이태리는 식사 시간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식당엔 월드컵 중계가 나오고 있었고, 로마 시내에서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을 안내하던 그는 결정 골이 들어간 순간, 유학 생활을 거쳐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정착한 1n년간 처음으로 로마 시내가 정적에 휩싸이는 순간을 경험했다. 그 믿기지 않는 몇 초 간의 치고요. 저 멀리서, 다른 한국인 관광객 팀이 환호하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오천 몇 년 동안 온갖 침략을 겪으며 살아남은 한국인의 유전자가 속삭였다. 아... ㅇ됐다...!


들뜬 고갱님들을 추슬러 버스에 태우고, 이태리 버스 기사의 비위를 맞추며 바로 숙소 행. 아내에게 전화해 자랑스러운 월드컵 개최 국민으로서 베란다에 걸어놓은 태극기 철수. 그리고 저녁때 길을 걷다가 술 좀 마신 듯한 건장한 이태리 청년들이 자기한테 와서 괜히 "어이 형씨, 당신 어느 나라 사람이야?"라고 물으면?


 "...쓰미마셍?"


그리고 최근까지, 나는 이 이야기가 이태리 교민이 겪은 한국 월드컵 8강 진출 순간의 교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미모의 지인이 나에게 반전을 주었으니...


당시 여자 친구들끼리 이태리 관광 중이었던 그녀. 8강 진출의 순간이 지나고, 그녀와 친구들은 약간 불안했지만 어쨌든 예약해 놓은 이태리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그리고 와인을 따라 주러 온 이태리 웨이터 아저씨.


"어느 나라에서 오셨죠?"

"... 한국에서 왔어요."

"후우..."


그의 깊은 한숨에 그녀들은 긴장하고...


뒤이은 그의 한 마디.


"여러분처럼 아름다운 여성들이 태어난 나라니 우리 이태리가 지는 것도 당연하군요! 부오나 세(찡긋)."


그래요. 이태리의 종교는 가톨릭, 축구, 그리고 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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