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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니 Mar 15. 2023

렛츠 한인회

21세기에 사는 교민들을 위하여

한인회가 왜 있어야 돼?


교민 친구가 물었다. 교민 생활을 오래 하고, 사업을 하면서 좋은 일도 많이 하는 친구다. 그렇다... 사실, 한인회 하면 떠오르는 그림은 이거다. 현지 물정 잘 모르는 할아버지들이 칙칙한 양복이나 잠바를 입고 서로 한 자리하겠다고 소리 지르는 모습, 고리타분한 우리가 남이냐 강요, 80년대 색동저고리를 입은 인형이 앉혀진 한인회관...


요즘은 교민 카페나 오픈 카톡 같은 게 있어서, 한인회나 교회에 나가지 않더라도 개인, 가족 레벨에서 궁금한 점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 한국과도 인터넷을 통해 얼마든지 연결된다. 그러니 굳이 매년 한인 회비까지 내고 참여할 필요가 있나? 대면 만남이란 게 점점 부담스러워지는 이 시대에?


그런데... 교민이란 참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다. 전에 워킹홀리데이의 다양함에 대해 쓴 적이 있는데, 교민들은 더욱더 다양하다. 그리고 그들이 필요한 것도 다양하다. 어린이들은 이 나라와 고국의 복수 정체성이 필요하고, 성인은 취업, 사업, 그리고 현업에서 더 인정받고 나아갈 기회가 필요하다. 범죄나 사고 등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은 그에 맞는 법적, 금전적 도움이 필요하고, 영어를 잘 못하시는 분들, 새로 오신 분들은 현지 적응의 기회가, 가족들에게는 어르신들과 아이들을 위한 각종 캐어가 필요하다. 요즘은 외국인들이 현지에서 한국인과 한국 문화 교류를 하고 싶어 하기도 한다. 그것을 넷상의 개인적 관계망만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나는 삼십 대 초반이란 젊디 젊은(?) 나이에 한인회에 6년 정도 몸 담았었다. 쉬웠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굉장한 경험이었고 보람도 많이 느꼈다. 내가 한인회에 있을 때 참여하거나 주도했던 일들은 대략 이런 것들이었다.


매년 한인의 날 개최, 한인회관 개관/운영, 순회 영사 활성화, 한인 경로회 설치, 법률/교육/영사/재외선거/워킹홀리데이 안전 등 세미나 운영, 호주 현충일에 한국전 참전 군인 접대, 정당과 정부 행사참가한인 주요 어젠다 전달- 공립학교 한국어 교육 상황 개선, 한국인 경찰 연락 담당자 신설, 보조금 신청/ 정산 보고와 기타 잡일...


당연히 이 일들을 나 혼자 한 건 아니었다. 학생, 유학생, 현지인, 엄청난 부자, 사업가, 정치인, 소설 같은 인생을 산 사람, 유명한 사람, 똑똑한 사람, 신념이 있는 사람과 용기가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흔쾌히 금전과 시간과 재능을 내어 주셨다. 이 세상이 생각보다 많은 선의로 차 있는 걸 확인한 것은 해냈던 일들보다 더 놀라운 경험이었다.


해외에서 한국 사람 조심해라.


나 역시 처음엔 영어를 배운다고 한국인들을 피하거나, 한국 사람들과 영어로 대화하곤 했다. 비한국인과 결혼한 후엔, 다른 한국 부부들과 교류할 때 느껴지는 은근한 불편함과 언어 장벽에 더욱더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교민 커뮤니티에서 세 발짝 쯤 떨어져 지냈다. 한인 교회나 골프 모임에서 편 갈라 세력 싸움을 했다는 이야기, 한인회장 선거를 하는데 돈을 뿌려 부정 선거를 했단 이야기 같은 것도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그러다 우연히 어느 단체 대표로 참석했던 교민 간담회에서 당시 한인회 임원분들을 만나 한인회에 영입됐다. 내가 가장 어리긴 했지만, 평균 연령이 40대쯤일 정도로 젊은 한인회였다. 모두 현업을 성실히 하고 계신 합리적인 분들이셨고, 야망과 비전이 있었다. 당시 회장단은 우리 주 15만 명의 교민들이 인구에 걸맞은 정부 자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며, 이 점을 개선하기 위해 몇 년이나 영사관과 대사관에 편지를 보내셨던 분들이었다. 또 중국 커뮤니티들이 현지 정부에서 받는 다문화 예산의 규모에 비해, 한국 커뮤니티가 턱없이 적은 금액을 받고 있다는 점도 말씀하셨다. 그런 실리적인 부분을 말씀하신 것이 맘에 들었다. 선행을 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이 돈 얘기를 피하는데, 예산이야말로 모든 사업의 알파와 오메가가 아닌가.


나는 당시 미디어 계통의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홍보를 맡았다. 홍보 담당이자 막내로서 나는, 먼저 한인회의 이미지부터 획기적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아까 말한 그 구닥다리 이미지 말이다. 내가 제안한 방법은 한인회 원로님들- 50대 후반의 회장단과 80년대 이민하신 60대 원로님이 당시 최고 인기였던 크레용 팝의 샛노란 티셔츠를 입고 (헬멧은 구하지 못해서 합성했다.) 점핑! 댄스를 하는 사진을 한인 신문에 게재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 아마 6년이나 한인회를 하지 못했겠지.


재미있었다. 일본 대사관에서 초대한 천황 생일 파티에 참석했다. 대사관 셰프가 만든 초밥은 정말 맛있었다. 노동당과 자유당의 행사에 얼굴을 비췄다. 노동당의 바비큐는 항상 질겼다. 시청의 다문화 대표 행사에 참석했다. 종종 한복을 입고 갔다. 명함을 모으고 주소록을 만들었다. 우리 행사의 홍보 자료를 보내고 초대장을 보냈다. 그러길 몇 년째, 한 번도 한인 행사에 오지 않았던 시장이 처음으로 한인의 날 행사에 왔다. 주 총리 비서가 전화해서 한인 회장님 성함을 어떻게 발음하는지 물었다. 그녀도 한인들을 보러 왔다. 그날을 위해서 시티 한복판 광장에 삼만 명을 모다. 미디어 홍보는 물론, 전전날부터 한인 단체들에 전화를 돌려서 꼭 아침에 와 주십사, 한인들이 광장에 꽉 찬 걸 보여줘야 정치인들이 한인들에게 관심을 가진다고 읍소를 한다. 이 정도의 행사는 1년 내내 준비해야 하는 일인데 자기 생일 파티도 안 하는 사람이 이러고 있다.


당일 아침 6시. 광장에 전기를 연결하고, 자원봉사 친구들이 출근하고, 단체 사진을 찍는다. 짐이 들어오고, 무대를 설치하고, 음식 부스가 들어온다. 음향과 조명 담당이 리허설을 한다. 출연자들이 옷을 갈아입는다. 내빈들이 도착하기 시작한다. 행사일은 광복절에서 가장 가까운 토요일. 그곳의 8월은 쾌청하고, 덥다. 10시 10분 전. 사회자가 올라간다.  10시 정각. 행사 시작. 새하얀 윗도리를 입은 한글학교 아이들이 무대에 올라간다. 모두 일어서 주시기 바랍니다. 플리즈 스탠드 업. 모두 일어선다. 영사도, 시장도, 시의원도, 주의원도, 88세의 6.25 참전용사 부부도, 그 해의 자랑스러운 한인상 수상자도 일어선다. 익숙한 관현악이 울리고 꼬마들이 국가와 호주 국가를 부른다.


나는 한숨 돌리며 무대 뒤에서 그 아이들을 지켜본다. 9살 전후의 아이들이 꼬물거리며 어색해하는 모습을. 우리는 성인 합창단을 부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이 거기 서 있다는 게 참 좋았다. 이후 계속될 정치인들의 연설, 한국에서 초청한 공연단, 현지 도장의 태권도 시범, 케이팝 공연 등이 계속해서 SNS를 장식할 예정이었지만, 나의 하이라이트는 그것이었다. 엄마가 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이었다. 이민자, 특히 서양권에서 생활하는 많은 한국 이민자에게 조국은 얼마나 복잡한 의미인지. 혹시라도 불이익받을 까봐 현지의 생활양식과 말투를 모방하면서도, 한국에 관심 없는 친한 친구에게 실망하고, 평일에 김치 먹으면 냄새날까 조심하면서도, 하모니 데이엔 부득불 비싼 고기로 손 많이 가는 불고기를 해 가는, 항상 모자란 언어에 좌절하고 한국어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을 그리워하면서도, 어떤 한국 소식에는 실망하고 부끄러워지고 마는.


이 아이들이 커서 언젠가 이 날을 기억할 것. 아무런 설움이나 환상 없이 내가, 우리 가족이 온 곳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생각했다. 그래, 나 한국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모두에게 조금 더 담담한 느낌일 수 있길 바랐다. 메인 스트림에 한국이 더 익숙한 느낌이길 바랐다. 그때의 한국은 아직도 "노스냐, 사우스냐?" "베트남 전쟁이냐, 한국 전쟁이냐?"라는 정도였으므로. 한인회를 위해 일하는 것엔 큰 경제적 보상도, 명예도 주어지지 않았지만- 오히려 혹시 내가 밉보이면 우리 사업이 잘못 보일까 싶어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 했지만- 희망은 마치 뽕처럼(?) 강력하게 나를 일하게 했다. 


또 하나 보람 있었던 일을 꼽자면, 한인 경찰 연락 담당자 자리 신설이다. 이 조용한 동네에 워킹 홀리데이 살인 사건이 두 건이나 일어났다. 한국과는 제도도, 일처리 속도도 다른 나라에서 경찰을 찾아갔다가 억울한 마음만 갖고 귀국하는 일도 많았다. 재로 만났던 한인 경찰들은 경찰 내에 민원인들을 담당할 한인 담당이 없는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런 사람을 뽑으려면 새로 정부 예산이 편성돼야 하기 때문에 인구뿐 아니라 커뮤니티의 강한 요구가 받춰져야 한다고 했다.


마침 얼마 후 한인이 많은 지역구의 주 의원이 한국에서 새로 부임한 대사를 초대하며 커뮤니티 대표들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이런 자리에 참석하고 싶어 하시는 분들은 항상 많지만, 바쁜 경찰분들을 설득하여 한 분을 어렵게 모셨다. 경찰들은 직업상 빠르고 정확한 의사소통 능력이 필수로, 그날도 효과적으로 한인 경찰 연락 담당자의 필요성을 어필해 주셨다. 다른 행사에서 마주친 경찰 간부, 당 행사에서 만난 시 의원에게도 이 문제를 이야기했고 그 해 말, 운때가 맞았는지 결국 새로운 자리가 만들어졌다. 이제 우리 도시의 한인들은 험한 사건을 당하고도 영어로 말하며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기뻤다.


마무리 짓지 못해 아쉬운 일도 있다. 우리 도시의 이민 인구가 점점 노령화되고, 한국의 부모님을 모셔 오는 가족들이 늘어 한국어로, 한국식으로 노인을 보살펴 드릴 수 있는 기관이 필요했다. 교민 인구가 큰 시드니에서는 벌써 예전에 노인 데이 케어를 설립해 80대 이상의 노인분들을 아침에 픽업, 레크리에이션을 제공하고 점심을 드리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정부 지원금을 받아 운영하며 한국인들도 고용하고 있었다. 이런 곳이 있으면 가족의 부양 부담이 많이 덜어진다. 치매로 영어를 잃어버리시거나 노년에 부모 초청으로 오신 분들이 타국에서 얼마나 심심하고 외로우실지. 호주 노인 시설에서 일할 때 거기 입원한 중국 할아버지께서 생활하시는 걸 봤는데, 아침부터 시리얼이나 베이컨 앤 에그 같은 음식도 입에 안 맞고, 텔레비전도 다 영어고, 가족들이 가끔 중국 음식을 가져다주면 그날은 기저귀 냄새가 심해져서, 간호사들이 말도 잘 못하는 할아버지(치매가 좀 진행된 상태셨다)를 기피하는 게 안쓰러웠다. 노인들도 애랑 같아서 돌봐 드리면 피어나고 방치하면 시드는 건 같은데, 집에 계실 수 있는 동안이라도 부양가족의 어려움을 덜어 드리면 좀 더 집에서 여생을 즐겁게 보내실 수도 있을 텐데. 멍하니 하루 종일 방에 계시는 할아버지를 보며 한 생각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 도시에 한인 회관을 개관한 것도 장기적으론 그런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포석이었는데, 거기까진 보지 못하고 지역을 옮겨 이사하게 됐다.


그래도 정말 운이 좋았다. 한국과 호주에서 다양한 집단에 속해 봤지만, 집단과 맞기란 쉽지 않다. 집단과 맞는다는 건 집단의 모든 멤버를 모두 좋아한단 의미는 아니다. 모든 멤버가 똑같이 참여했단 의미도 아니다. 뜻을 가진 사람이 있고, 그 뜻을 실행하기로 동의했고, 각자의 자리에서 애썼다는 의미일 거다. 덕택에 우리는 함께 모두를 위한 일을 해 낼 수 있었고, 나는 새로운 적성을 발견했다. 그리고 선한 일을 하고 싶어 하는 많은 의지도.


애국심은 그 선한 의지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스폰서들이 한인의 날에, 또 다른 여러 행사들에  몇십 불에서 몇 만 불까지 내는 것은, 또 임원 님들과 자원 봉사자들이 보수 없이도 항상 최선을 다해 준 것은 우리가 한 핏줄 단일민족이라서도 아니고, 우리 문화가 다른 민족보다 우월해서도 아니며, 한국 정치를 지지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냥 우리 안에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는데, 한인이다 보니, 비슷한 처지의 한인들의 어려움이 잘 보이는 것뿐이다. 치매나 중풍으로 영어를 잃어버린 분을 안타까워하고, 한글을 배우려는 어린이를 돕고 싶다. 성공한 한인 얘기를 들으면 얼마나 고생했을까 싶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한인 얘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이라도 돕고 싶다.


우리의 조국은 천신과 곰의 후손이 사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아니다. 그곳은 그냥 내가 나고 자란 동네, 추억의 떡볶이 집이 있는 곳, 또는 나의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곳. 내가 쓰는 말을 쓰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주로 먹는 곳. 그곳은 우리에게 좋은 기억도, 쓰린 기억도 주었다. 사연 없는 이민자가 어디 있으랴. 성깔 없는 이민자도 없다. 가끔 들려오는 소식에 화가 날 때가 있고, 나와 맞지 않는 한인들을 마주쳐 실망할 때도 있다. 하지만 어쩌랴, 그곳은 어쩔 수 없는 내 일부인 걸. 그리운 것이 당연하고, 마음 가는 대로 좋아하게 두는 편이 건강에 이롭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끔은 그 그리움을, 인터넷과 개인적 연결 이상의 장소로 가져왔으면 한다. 한인회가 언제까지 구식일 필요는 없다. 한인들은 구식이 아니므로. 애국심도 마찬가지. 한인들을 피하거나, 무조건 우리가 남이가를 외칠 필요는 없다. 영원히 함께 한 마음일 필요도 없고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 할 필요도 없다. 좋지 않은 소문? 맞지 않는 사람? 그런 거 없는 곳은 지구상에 없다. 그저 각자 삶의 방식을 존중하며, 아무리 다른 우리라도 서로가 필요하단 걸 인정하고, 자기 자리에서 오래 관심을 가지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금씩 도우면 좋을 것 같다. 그래야 우리 동네에 한인 슈퍼라도 하나 더 생기고, 관공서에 한글 안내문이라도 하나 더 생길 것 아닌가.


그러니 새해에는 교민 여러분, 렛츠 한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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