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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안 Apr 27. 2021

드디어 알아냈다

가만 보자, 얼굴에 점이 몇 개였더라.

점이라.

가만 보자, 얼굴에 점이 몇 개였더라.      


따따따 따아-따 따 따따따. 아침 8시 30분을 알리는 알람 소리. 전날 저녁 7시쯤부터 13시간을 꼬박. 달과의 사투를 벌인 끝에 겨우 밤에서 탈출한 해가 자신을 알린다. 해가 떴다! 여기 아침이 있다!      


하아, 시간이 된 것인가. 눈을 뜨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하루의 시작은 출근. 그 전쟁의 서막이 펼쳐진다. 일단 눈을 뜨기 전, 출근 의상부터 확인한다. 셔츠는 방문 뒤 옷걸이에, 바지는 옷방 장롱, 양말과 속옷은 침대 밑 수납장에. 검정 바지에 흰 셔츠를 입을 것이니, 양말은 줄무늬로 포인트를 줄 것. 스텝 꼬이면 몇 분이 소요되고, 까먹은 시간만큼 지하철 탑승 시간이 늦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눈을 떠 곧장 화장실로 뛰어 들어간다. 짧은 머리 덕에 머리 감기에 투자하는 시간은 2분 남짓. 세수까지 마치면, 머리를 말리며 양치질에 돌입한다. 좋았어! 양손 기법이 들어가니 시간이 훨씬 단축되는군. 일어나기 전 외워두었던 스텝 그대로 옷을 찾아 입으면 약 8시 45분이 된다. 지금부턴 약간의 섬세함이 가미된 화장 시간이다. 특별히 색조 화장을 하지 않아 오랜 시간 공을 들이진 않지만, 손이 서툴러 다른 단계에 비해 시간이 좀 더 걸린다. 기초화장 후 선크림과 파운데이션을 곁들이면 8시 48분. 한쪽 눈썹 당 30초씩 1분간의 눈썹 그리기. 속눈썹, 아이라인 더하기 볼 터치 3분. 립스틱으로 화장을 마무리하면 시침이 숫자 9로 넘어간다.     

 

9시. 9시는 열차 탑승 시간이 임박했음을 뜻한다. 거울로 최종 스캔을 할 틈도 없이 현관문으로 이동한다. 지각의 불안을 잠재우는 9시 20분 열차. 만일 이 차를 놓친다면, 꼼짝없이 다음 45분 차를 타야 한다. 그 차만은 안돼! 그것은 청량리행이라 쓰고, 지각행이라 불리는 지옥의 열차. 타는 순간 퇴근 시간을 늦추는 차를 맞닥뜨리기 전에 폐가 튀어나오도록 지하철역으로 뛰어가자.      


삐빅-. 개찰구에서 카드를 찍고 9시 20분 차를 기다린다. 이번에도 해냈다는 소식.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1분이라도 더 일찍 회사와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는 직장인이 여기 있습니다. 지하철에 탑승한 뒤, 핸드폰 화면만 1시간을 내리 보며 회사를 기다린다. 내가 누구이고, 무얼 위해 살아가는지. 그런 철학적인 고민 따윈 접어두고, 회사만 생각한다. 지하철 창문 안으로 봄 햇볕이 고스란히 내려앉아도 나는 변하지 않는다. 날이 좋든 나쁘든, 나는야 일개미. 제일 좋아하는 벚꽃 나무의 잎이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제품을 팔러 수원에 갑니다.      



점이라. 

그래 맞아,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 눈 밑에 점이 있었구나!     

 

다시 시작된 하루. 그러나 오늘 아침은 여느 때와는 달랐다. 아니, 다르기로 마음먹었다. 어제 저녁, 퇴근길에 받아본 에세이 주제(*일 주에 한번 에세이를 쓰는 한 글쓰기 모임에 참여 중이다)에 생각 회로가 정지되었다. 점이라니. 내 얼굴에 점이 몇 개인지 세어볼 시간도 없는데, 점은 무슨! 잠깐. 얼굴에 점이 몇 개인지 진짜…. 모르잖아? 점이 뭐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괜찮은지 살펴볼 틈도 없었다. 나를 잊으려고 회사에 다니는 것은 아니었는데. 매일 회사와 가까워지려 애쓰느라 나와 부단히 멀어졌다는 걸 몰랐다.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쉬이 잠들 수 없던 어젯밤. 문득 지각을 하고 싶어 졌다. 지각해서라도 나와 대면해야겠다는 결심. 스스로와의 약속을 청한 후 겨우 잠이 들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아침 8시 반에 울린 알람 소리. 실은 8시부터 절로 깬 의식을 따라 30분을 침대에 누워 알람이 울리길 조용히 기다렸다. 해가 떴다! 여기 아침이…! 그가 하려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끊어버렸다. 이미 일어나 있었고, 나와 만날 준비는 되어있다. 그러니 재촉하려는 모든 것은 그 즉시 차단하겠다.     


입을 옷부터 천천히 살펴보았다. 머릿속에 갇혀있던 옷장을 꺼내 눈으로, 손으로 직접 옷을 찾았다. 층층이 쌓인 셔츠 사이로 잊고 있던 옷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작년 봄, 나들이용으로 샀던 겨자색 블라우스, 언니와 트윈 룩으로 맞춘 연보라색 후드티, 이번 생일 선물로 받은 하늘색 폴햄 카라 셔츠까지. 봄을 닮은 옷들이 올해 봄꽃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떨어지는 꽃잎을 자신의 위로 얹힐 기회도 누리지 못한 채, 여름을 기다리는 듯했다. 주인으로부터 잊혔다는 슬픔과 함께 옷장 구석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며. 얼마 전 차 안에서 스쳐본 개나리에 대한 아쉬움을 담아 오늘은 겨자색 블라우스를 택했다. 바지는 짙은 회색의 슬랙스, 양말은 하얀 매화가 수 놓인 베이지색 양말로.      


9시. 샤워 후 옷을 갈아입으니 열차 탑승 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이미 늦은 몸. 지옥의 열차를 타더라도 화장까지 말끔히 하고 출근하겠다. 오늘은 나도 만나고, 얼굴에 점이 몇 개인지도 세어봐야지. 전신 거울을 마주 보고 앉으니 왠지 모를 쑥스러움이 밀려온다. 남도 아닌 나를 보는 게 이렇게 어색한 일인가. 머리부터 하나씩 내려가 본다. 한 달 전만 해도 귀에 겨우 걸리던 머리가 목 중앙까지 내려왔다. 가르마 군데군데에 자란 새치에 놀라 뽑아보기도 한다. 아이고, 많이 늙었네, 늙었어. 늙은 건 머리만이 아니다. 야근에 찌든 얼굴이 수분기 하나 없이 푸석해져 있다. 왼쪽 쌍꺼풀의 개수는 2개에서 3개로 늘어났고, 눈가는 흑심보다 짙어졌다. 그리고, 점. 왼쪽 눈 밑에 둘, 왼쪽 볼에 둘. 이야, 오른쪽 볼에도 하나 생겼구나! 그 아래로 오른쪽 턱 끝에 자리한 점 하나. 드디어 알아냈다. 얼굴에 있는 점의 개수 6개.      


6개의 점과 그간 알아채지 못한 작은 기미들을 화장으로 덮으니 9시 15분. 오랜만에 본 나와의 만남은 뒤로 이제는 정말 출근길을 나서야 한다. 45분 지각행 열차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오늘의 지각을 대표님께 어떻게 설명해 드려야 할까. 하지만 이 고민은 금방 접었다. 오늘 투자한 15분으로 만난 나를 다른 이에게 변명으로 바꾸지 않겠노라. 늦으면 늦은 만큼 일을 책임지면 된다. 하나 내겐 일 말고도 책임져야 할 또 하나가 있으니. 아침에 일어나 부지런히도 출근 준비를 하는 사람. 회사에서 실패와 성과, 일의 희로애락을 넘나드는 직장인. 그렇게 매일을 사는 내가 잘살고 있는지 책임지고 확인할 의무가 있다. 얼굴에 점이 있는지, 흰머리가 자랐는지, 혹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한 번씩 중간 점검을 하며 돌볼 책임과 의무. 고로 오늘 아침의 일은 뿌듯했으니 이제는 후회 없이 타자! 지옥의 여얼... 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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