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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 Apr 27. 2021

소금 매듭

쏟아지는 밀물을 썰물처럼 삼켰다.

마지막까지 버텼어, 잘 버티고 나왔어. 라고 말해주고 싶은 시절이 있다. 6개월 인턴 기간의 절반이 지난 2018년 겨울. 평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지하철 2호선에 몸을 실었다. 초점이 풀린 두 눈은 2시간 내내 지하철 바닥에 시선을 고정했고, 귀에선 드럼 비트가 강한 락 음악이 흘렀다. 음량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탓에 이어폰 밖으로 멜로디가 새어나갔지만, 무슨 노래인지 들리지 않았다. 눈과 귀가 반응할 수 없는 망연의 세계. 아무런 뜻도 없이 펼쳐진 생각에 빠져 입만 간간이 움직였다. ‘부디’, 벌어진 입술 사이로 오직 부디라는 말이 툭, 떨어질 뿐이었다.     



드르륵. 사무실 문을 왼쪽으로 밀어 공간 안의 사람들을 확인했다. 하나, 둘, 셋. 출근 시간이 제법 남았음에도 일찍 온 직원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 그도 있었다. 나의 사수, 나를 몹시도 미워했던 사수. 문의 움직임을 따라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린 직원들과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오늘 머리 스타일 바꾸셨네요”, “아이고, 피곤하신가보다.” 한 분 한 분께 인사를 건네며 사무실 안을 돌았다. 점차 가까워지는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한 사람. 그의 책상에 다다랐을 때, 점퍼 소매의 끝을 움켜쥐었다. “안녕하세요”, 타닥타닥 바삐 눌리는 키보드 소리로 그는 인사를 대신했다.



윽, 비릿한 냄새. 소금기 가득한 인사가 밀물처럼 쏴 밀려 마음을 철썩 내리쳤다. 타닥타닥, 철썩. 탁탁탁, 철썩. 공간 전체로 흐르는 상대의 냉랭함에 숨은 금세 턱 끝까지 차올랐다. 질문을 자르는 숨소리, 대답을 채우는 단어 사이의 뾰족한 정적, 낮은 목소리 톤과 높이 솟은 시선의 끝. 오전부터 시작된 냉기에 정신없이 허우적댔다. 그래도 부디. 오늘도 부디 버텨내야 한다는 절박함을 지푸라기 삼아 발버둥을 쳤다. 오후 내 눈물바다에 빠질지언정, 쏟아지는 밀물을 썰물처럼 삼킨다. 속에 든 불순물이 얼마나 큰지도 모르고, 입안을 헐게 할 물을 눈 꼭 감고 들이켰다. 마시는 동안 시간은 흘러 분명 내일이 되어 있을테니.      



허나, 하루에도 열댓 번씩 몰아치는 밀물은 아무리 삼켜도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나와 그 사이에만 존재하는 바다는 해가 달로 변하는 순간에도 썰물로 바뀔 생각 없이 만조를 유지했다. 다가가려하면 키를 세우는 파도. 그의 주위로 순식간에 쌓이는 파도 벽 덕에,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이 숨에 찼다. 어째서였을까. 성난 파도를 비집고 들어가 원인을 찾아보려 해도, 결국 돌아오는 건 소금물에 절여져 빨갛게 매워진 두 눈 뿐이었다.   



그렇게 입수하다 포기하기를 반복했던 여러 날이 지나고, 한 달 뒤 퇴사를 했다. 자진 퇴사는 아니고 계약 만료. 6개월간의 모진 풍랑을 뚫고 기어이 이력서 한 줄을 건졌다. 책상에서 짐을 빼던 날,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휴가차 떠났다는 여행. 인턴 기간 내 뒤통수에 건넨 그와의 인사는 결국 부재로 종결되었다.      



그가 없는 사무실. 잔잔한 평화 속에서 물건을 하나둘 정리했다. 머그컵, 연필꽂이, 파일, 슬리퍼, 양치 도구. 손때가 많이 묻은 물건일수록 미련 없이 버렸다. 소금기가 잔뜩 배 더는 쓸 수 없는 것들이었다. 쓸고 닦고 버리기를 반복한 지 두어 시간. 턱턱 닫히던 쓰레기통 입이 소리를 멈췄다. 넘쳐나는 불순물에 입을 다물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었다. 입안 가득한 쓰레기를 금방이라도 왈칵 토해낼 것 같은 표정. 그 괴로운 얼굴에 발을 넣어 6개월의 잔재를 욱여넣었다. 몸에 남아있을지 모를 소금 알갱이까지 전부 털어.      



다시 무로 돌아간 빈손의 주인은 끝인사를 마치고 회사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겨울 공기로 얼어붙은 땅. 냉랭한 땅이 건물 바깥으로 펼쳐졌다. 회사 밖도 평화롭진 못했다. 밀물과 썰물이 오갔던 곳 너머로 새로운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시작된 기한도, 명확한 목적지도 없는 취업 준비의 고통. 그러나, 퇴사 후 마음가짐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두려움 건너편에 자리 잡은 담대함. 왠지 모를 차분함이 온몸에 사르르 퍼져갔다. 그 순간, 손 안에서 무언가 느껴졌다. 매듭.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맺은 경험의 매듭이 빈손 위에 얹혀 소금 결정처럼 빛나고 있었다. 움켜쥐면 소금 알갱이가 바스러져 나오는 매듭을 붙잡고,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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