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원 Aug 16. 2017

아홉 살 아이에게 대통령 탄핵은 중요한 일이 아니에요

실제와 허구

우리가 경험하는 사건 중에는 현실 세계에서 진짜로 일어난 것도 있지만, 상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의 세계 속에서 일어난 사건도 있다. 글쓰기 소재가 될 수 있다면, 진짜 사건이든, 가짜 사건이든 중요하지 않다. 때로는 가짜 사건이 진짜 사건보다 더 좋은 소재가 될 수 있다. 


(ㄱ) 2016년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은 탄핵당했다.

(ㄴ) 1980년 7월 31일, 해리 포터는 고드릭 골짜기에서 태어났다.


(ㄱ)은 진짜 사건이고, (ㄴ)은 ‘해리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가짜 사건이다. 한국인에게는 탄핵 사건이 더 중요하겠지만, 영국에 사는 9살 꼬마도 그럴까? 중요한 것은 진짜냐 가짜냐가 아니라, 그 사건이 삶에 어떤 영향과 영감을 주느냐다.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의 효과가 중요하다. 


조지 R. R 마틴의 『왕좌의 게임』은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는데, 시즌 5의 마지막 장면은 충격적이다. 유튜브에는 이 장면을 본 전 세계 시청자들의 격앙된 반응을 모아놓은 동영상이 있다. 시청자들은 충격에 빠져, 분노하거나 울고, 욕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한낱 드라마 따위에 그런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이해되지 않겠지만, ‘사건의 효과’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당연한 일이다. 욕설이 나오게 만드는 사건이라면, 영화, 드라마, 소설 속의 허구적 사건이라도 소재로 삼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이런 일이 있었다’다음에 반드시 실제로 일어났거나 직접 경험한 사건만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진짜든 가짜든 내 마음을 움직인다면, 그걸 가지고 글을 쓰라. 예를 들어, 아래처럼 시작할 수도 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소설 『채식주의자』에서, 아내는 어느 날 갑자기 채식을 선언한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귀도는 아들 조슈아를 위해 거짓말을 한다. 
소설『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는 삼촌 빌보에게서 절대 반지를 물려받는다.


허구가 실제를 모방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실제가 허구를 모방한다. 현실이 허구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허구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일 때도 있다. 과정처럼 들리긴 하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은 사실과 허구가 교차하는 중간계다. 『스타워즈』에서 다스베이더와 스카이워커의 부자 관계, 『해리 포터』에서 해리를 학대하는 친척의 이야기는 모두 현실의 반복이자, 반영이다. 중간계에 사는 우리는 두 세계 모두에서 영감을 얻으면 그만이다. 


지뢰 근처에서 울리는 탐지기처럼 우리 마음은 진실에 반응한다. 진짜 사건이든 가짜 사건이든 마음이 움직인다면 거기에 진실이 똬리를 틀고 우리를 기다릴 가능성이 크다. 진실은 사실에 기초하지만, 사실만을 나열한다고 진실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우리는 경험을 해석하여 그 속에 숨은 진실을 드러내야 한다. 무엇을 쓰든,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삶의 진실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런 점에서 글쓰기는 진실을 드러내는(혹은 은폐하는) 한 방식이다. 보석세공사가 다이아몬드를 세공하듯, 작가가 진실을 드러낼 때, 독자는 거기에 반응한다. 진실이 담겨있기만 한다면, 우리는 르포르타주(reportage)뿐만 아니라, 소설과 시, 영화와 드라마, 심지어는 ‘짤방’과 ‘움짤’에도 감동한다. 나는 딸과 함께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을 보고 아래와 같은 글을 쓴 적이 있다. 


『겨울왕국』에서, 아렌델 왕국의 둘째 공주인 안나는 다른 동화 속 공주들처럼 왕자와의 행복한 결혼을 꿈꾸지만, 한스 왕자에게 배신당한다. 나는 왕자가 공주를 배신한다는 설정이 흥미로웠다. 백설 공주, 신데렐라,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인어공주 등, 전통적인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반복되던 공주와 왕자의 낭만적 사랑이라는 규범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영화에는 한스 왕자와는 달리, 안나를 진정으로 위하고 사랑하는 얼음 장수 청년 크리스토퍼가 등장한다. 만약, 안나가 크리스토퍼와의 사랑에 안주했다면, 이 영화는 낭만적 ‘이성애’라는 규범을 변주하는 데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안나는 크리스토퍼를 선택하는 대신, 자기 힘으로 언니 엘사를 구한다. 이 상징적 행위로 안나는 이성 간의 낭만적 사랑이 아니라 자매애를 통해 성장하는 최초의 디즈니 캐릭터가 되었다.

‘Girls don’t need a prince’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여성 성우가 퇴출당하는 황당한 사건이 버젓이 일어나는 한국 사회에서, 이 영화는 남성에 의해 구원받고, 보호받아야 하며, 남성에 의해 완전해지는 전통적인 여성상을 폐기한다. ‘겨울왕국 데이’를 정해놓고, 해마다 두 딸과 함께 ‘렛잇고Let it go’를 부르며 보고 싶은 영화다. 


『겨울왕국』에 나오는 사건들은 당연히 모두 가짜다. 아렌델 왕국이라는 곳도, 엘사, 안나, 크리스토퍼, 한스와 같은 인물도 실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영화는 나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남겼는데, ‘여성에게 왕자 따윈 필요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이었다. 이 메시지 안에는 현실이 응축되어 있고, 또한, 현실을 돌파할 대안도 들어 있다. 안나와 엘사를 닮은, 두 딸을 둔 아빠 처지에서 이 영화는 분명한 진실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뭐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