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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원 Aug 09. 2017

무엇이든 쓰세요. 기록이 기억을 지배합니다

기록과 기억

‘기록이 기억을 지배한다.’ 어느 카메라 광고의 홍보 문구였던 걸로 기억한다. 우리는 푸네스처럼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으므로, 기록해야 한다. 글감이 부족하면, ‘이런 일이 있었다’라는 주문도 소용이 없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글쓰기는 글을 쓰는 시간보다 쓰지 않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 글을 쓰지 않는 모든 시간은 글쓰기를 준비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책상에 앉아 고민만 하면, 없던 글감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글쓰기를 10년 이상 가르친 나도, 글을 쓰려면 며칠 동안 글감을 찾고, 그것에 관해 생각하고, 예전에 써둔 글이나 메모를 찾아보아야 한다.


나는 포켓 사이즈 몰스킨 노트를 애용한다. 입력 도구와의 일체감은 종이와 연필을 따를 게 없다. 다만, 종이와 펜은 번거롭다. 쓸만한 생각이 휙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경험은 누구나 해보았을 것이다. 영감은 어디서든 나타나고, 금방 사라진다. 종이와 펜을 찾을 시간이 없다. 그러므로 휴대폰이 답이다.


사람들은 스마트 폰으로 영화를 보고, 게임을 하지만, 작가는 글을 쓴다. 작가에게, 언제 어디서든 글을 쓸 수 있는 스마트폰의 등장은 인류 문명 최대의 성과이자 축복이다. 좋은 글쓰기 애플리케이션도 셀 수 없이 많다. 글쓰기로 치자면, 좋은 작가든 그저 그런 작가든 연장 탓을 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가끔은 종이 위에, 사각거리는 연필이나 만년필로 쓰고 싶을 때도 있으므로, 나는 아직 노트와 펜을 포기하지 않았다. 


글쓰기를 하려면, 사건 수집가 혹은 사건 기록자가 되어야 한다. 좀 더 그럴듯하게 말해서, 우리는 모두 ‘기억전달자’가 될 수 있다. 우리의 기록은 누군가에게 전달될 것이다. 요새 자서전을 쓰는 게 유행이라고 하는데, 자손들에게 돈이나 부동산이 아니라 ‘나의 인생’을 물려줄 수 있다는 것은 멋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혼란의 21세기, 삶을 위해 분투하던 OOO, 이렇게 살았노라.’ 혹시 아는가, 인류 문명이 멸망한 후, 지구를 방문한 외계인 역사학자가 당신의 메모를 토대로 지구사(地球史)의 한 장을 쓸 수 있을지도. 후손에게 남길 목적이든, 우주 역사학의 발전에 기여할 목적이든 일단 기록을 해야 가능하다.


기록하는 습관과 관련해서 개인적으로 매우 중요한 계기가 있었다. 나는 군 복무 시절 우연히 내무반에서 굴러다니던 책 한 권을 읽었다. 『시간을 지배한 사나이』였다(지금은 『시간을 정복한 사나이 류비세프』로 제목이 바뀌었다). 이 책은 구소련 과학자 류비세프(1890-1972)가 시간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추적한다. 놀랍게도 그는 56년간, 매일 자신이 어떤 일에 얼만큼의 시간을 썼는지 모조리 기록했다. 


나는 전역 후, 류비세프 흉내 내기를 시작했다. 먼저, 스톱워치와 메모용 노트를 샀다. 그리고 시간 활용을 기록했다. 주 단위, 월 단위로 통계도 냈다. 예상대로 시간은 줄줄 새고 있었다. 시간 통계를 기록한 지 석 달쯤 되었을 때, ‘무슨 대단한 인생을 살겠다고 이 짓을 해야 하나’라는 회의감이 들었다. 더군다나, 군대를 갓 나온 복학생의 삶에는 특별히 기록할 게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은 없었지만, 돈도 없었던 나는 온종일 하숙집에 틀어박혀 빈둥거렸고, 그날 기록지에 쓸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빈둥거림 6시간’이라고 차마 쓸 수는 없었고, 이 일을 계기로 더이상 시간 기록을 하지 않았다. 


‘시간 기록으로 삶이 달라졌어요’와 같은 뻔한 교훈을 기대한 독자에게는 미안하지만, 내 삶은 다시 느슨하고 게으른 쪽으로 흘러갔다. 그러나 애써 기록해둔 것들을 그냥 버리기는 아까웠다. 석 달 정도 모은 기록은 어지간한 책보다 두꺼워졌다. 비록 석 달로 끝나긴 했지만, 그 기록들은 박제된 시간 혹은 물화(物化)된 시간이었다. 나는 그간 기록했던 일지들을 모아서 한 권으로 묶었다. 


나는 요새도 가끔 그 기록들을 들춰본다. 벌써 15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일지를 펼치기만 하면 그때 내가 무엇을 했는지 뿐만 아니라,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도 어렴풋이 기억해낼 수 있고, 그 기억들은 늘 새롭다. 그 기록들은 내가 살아 있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증거다.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잘했던 일 중 하나가 시간 기록을 시도했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후로, 줄곧 나는 날마다 무엇인가를 기록한다. 어떤 거창한 목적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하게 되었다. 길을 가다가 문득, 음악을 듣다가 문득, 영화를 보다가 문득, 밥을 먹다가 문득 어떤 생각이든 떠오르면 적고 잊어버린다. 한참 지난 후에 다시 보면, 글감이 되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 그리고 또 한참 지난 후에 다시 보면, 글감이 아니었던 것이 글감이 되기도 한다. 


기록 습관은 적당한 긴장을 유지하게 해준다. 기록을 하려면, 자신의 현재 상태와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쓸만한 사건을 찾아 경찰서나 법원 등을 기웃거리는 기자들처럼 우리는 기록할만한 게 뭐 없나 삶을 기웃거리는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기록은 자기 삶을 객관화할 기회를 줄 뿐만 작가들이 애타게 찾아 헤매는 영감을 불러오기도 한다. 로또를 사지 않으면 로또에 당첨될 수 없다. 계속해서 뭔가를 쓰지 않으면 점점 쓸 말이 없어진다. 거꾸로, 특별한 일이 아니더라도 계속 기록하다 보면 반드시 쓸 거리가 생긴다. 많은 작가가 이구동성으로, 영감이 떠올라 쓰는 게 아니라, 쓰다보니 영감이 떠오른다고 말한다. 영감은 우리의 일상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지만 잠시 머물다가는 바람처럼 곧 사라진다. 영감을 붙잡아두는 유일한 방법은 영감의 안테나가 작동하는 그 순간 기록하는 것뿐이다.


전업 작가들은 우리가 일하듯 글을 쓴다. 작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뛰어난 작가들은 작업 시간과 분량을 정해두고 쓴다. 글쓰기 강사라는 특수한 직업 때문이겠지만, 전업 작가가 아닌 나 같은 사람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오전에는 글을 쓰거나 읽고, 가능하면 하루에 500자 이상은 쓰려고 노력한다. 


글쓰기를 평생 취미로 삼으려면 대단한 글을 쓰겠다는 욕심은 버리고, 일단 글을 쓰는 습관부터 길러야 한다. 그러려면, 책상에 앉아 머리를 쥐어뜯는 것보다는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짧은 메모를 쓰는 습관이 몸에 배야 한다. 모든 글은 짧은 기록에서 시작한다.


무엇이든 기록하라. 언젠가는 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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